한국의 정치권에 모호한 용어가 넘치고 있다. 동양의 소피스트(Sophist) 철학이라 할 수 있는 명가(名家) 철학은 이름이 어지러워지면 세상도 어지러워진다고 했다. 이것이 유학에서도 받아들여졌던 정명론(正名論)이다.
그 중의 대표적인 것을 꼽아 본다면 ‘범여권’이란 모호한 지칭이다. 현직 대통령이 당적이 없는 비정상적인 상태에 있으니 이렇게 어정쩡한 이름이 돌림병이 되어 유행어가 되었다. 노 대통령이 당적을 가지고 있었으면 문국현 후보에게 범여권이라는 낙인을 감히 찍지 못했을 것인데 착잡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사람들이 정권과 정부를 쉽게 혼동한다. 예를 들어 노무현 정부, 노무현 행정부는 정확한 말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심리적으로 군부와 합작했던 것을 감추고 싶었기 때문에 ‘문민’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역연합에 의해 집권했다는 것을 살짝 가리기 위해서 ‘국민’을, 노 대통령은 정치엘리트들에 의한 대중들의 동원이 아니라 노사모로 대표되는 자발적인 캠페인에 의해 정권을 장악했다는 자부심이 배어있는 ‘참여’를 붙였다. 이런 전통 아닌 전통은 더 이상 관습이 되기 전에 그만 두고 다음에 들어설 정부부터는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아무개 행정부라고 하자.
정권이란 표현을 쓸 때에는 집권자, 또는 집권자와 함께 국정에 대해 의사 결정 능력이 있는 집단을 지칭할 때 쓰는 것이다. 한국이 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다면 간단하게 집권당의 이름을 따서 XX당 정권이라 하면 된다. 대통령제라 하더라도 대통령이 여당과 긴밀하게 의논하여 국사를 결정한다면 XX당 정권이란 말도 성립할 수 있고, 386정권이니, 부산정권이니 하는 말도 가능하다.
이런 관점에서 노무현 정권의 최대 파워집단은 관료였다. 현 정권의 구성요소는 압도적 지분을 가진 노 대통령과 비서 같은 측근들, 그리고 파워에리트인 관료들의 연합체로 이해하고 있다.
노 대통령의 집권은 민주당의 집권이 아니었으며, 열린우리당으로 분화되어서도 여당이 대통령의 의사 결정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국정에 대한 책임을 진 적이 없었던 관계로 그렇게 간단하게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을 해체할 수 있었다.
대통령제는 엽관제적 속성이 있어서 캠프가 당을 장악해서 대통령선거를 치르게 되어있다. 대통령을 만드는 사람들의 핵심역량은 정치적 동업자들인 참모들과 그들이 조직하는 엽관주의자들이다. 이들이 대통령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연하다. ‘낙하산 인사’라는 공격은 관료들의 이해를 반영하는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비공식적인 특수관계인들을 역량에 따라 국정시스템에 적극적으로 기용하여 집권자의 국정에 대한 자기책임성을 강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할 수 있다.
대통령이 관료들에 대한 임면을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관료들을 대통령의 사람들이라 할 수 있겠는가?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 노무현 대통령과의 관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대통령이 관료의 사생활까지 챙겨야 할 의무가 있는가? 내각제를 하지 않을 것이라면 정권과 정부의 모순은 풀 방법이 없다.
노무현 정권은 무엇이었나?
관료들에 의한, 관료들을 위한, 관료들의 정권이 노무현 정권의 본질이다. 노 대통령이 책임을 져야 할 부분은 관료들이 국가의 이름으로, 공공의 이름으로, 사회적 이익의 이름으로 교묘하게 포장된 관료집단의 이익을 분별해 내는 능력 없이 이들의 실무능력에 의존하여 국가를 통치했다는데 있다. 한국과 일본이 유능한 관료들에 의해 성장해 온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이웃 나라 고이즈미 수상이 우정성 개혁에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왜 걸어야만 했었는지 헤아려 보라.
웃지 못할 코미디는 민노당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민주주의적 멘탈리티를 가진 민주개혁세력이나 시민운동세력들이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이름으로, 복지의 확대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선의와는 반대로 국가 뒤에 숨어있는 관료들의 이익에 복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 때는 국가의 소멸과 폐절을 믿었을 좌파들의 아이러니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한나라당 박형준 대변인의 원전 인용을 패러디해보고 싶다. 역사는 반복된다. 한번은 희극으로, 한번은 비극으로!
노 대통령의 통치스타일 문제는 대통령제 국가에서 내각제 스타일의 통치를 실험한 것이다. 노 대통령도 이것을 문득 깨닫고는 헌법적 모순을 들고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노 대통령이 집권세력으로서 정권이기를 포기한 순간, 필연적으로 관료들의 세계인 행정부 수반으로 위치 지워진 것이며 관료들의 대표로서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노 대통령이 수상이었다고 가정하면 그 항변이 상당한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노무현을 반면교사로 삼아 내 본심이나 지향과는 반대로 앞으로 순수한 대통령제의 지지자가 될 작정이다.
노 대통령의 실패에 대하여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들, 질투심 많은 사람들은 전후 사정에 대한 고려 없이 386 책임론을 제기해 왔다. 386 측근들의 힘이 가뭇없이 사라진 뒤에는 ‘부산사람들’에게 책임을 떠넘겨왔다. 노무현 시대의 대통령비서실은 참모 기능보다 ‘비서’ 기능이 강했으며 ‘실세’들일 수 있는 사람들도 권력를 이용하기 보다는 대통령의 메신저 정도로 자신들의 역할을 제한하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이들에 대한 책임론은 대통령의 눈을 피해 왜 선수로서 뛰지 못했느냐는 질책이 될 수밖에 없는데 현 대통령의 스타일로 볼 때 그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민주당 주류들로부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고, 빚이 있을 수도 없는 대통령. 대통령이 야당으로부터 핍박을 받은 끝에 매를 맞은 값으로 벌어들인 열린우리당이 무슨 배짱으로 대통령에게 권력을 나누자고 할 수 있었겠는가? 열린우리당 시절의 문제는 대통령에 대한 부채의식과 자격지심이 지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좌파무능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심판은 노대통령 스스로 져야 하며, 그 대가는 실패한 대통령이 되어 퇴임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당연히 범여권과 민주개혁세력을 자처하는 사람들도 ‘방조죄’에 해당하는 책임이 있다.
유식한 사람들일수록 노 대통령을 정책적 차원에서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파트 값, 양극화 문제, 파병이나 한미FTA와 관련한 비판들이 그러한 영역이다. 그러나 항상 정책 위에 정치가 있다.
정책과 구분된다는 의미에서 정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정치사업의 핵심이 사람과의 사업이기 때문에 정무란 정치적 관계를 만들고 관리하며 발전시키는 사업의 총체를 의미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비서실에서 과감하게 정무수석을 없애버렸다. 이것이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에 대한 인식과 통치스타일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열린우리당은 야당들의 정치적 오판으로 말미암아 급작스레 의석의 과반수를 넘긴 거대 정당이 되었다. 야당은 둘째 치고 여당에 대해서도 정치적 수요가 엄청나게 불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중에 노 대통령은 야당에 연정을 제기하였다가 정치적 낭패를 경험하게 되는데, 야당에 대한 설득은 고사하고 여당 내부로부터도 강력한 비판에 직면하게 되어 버렸다.
엄청난 양의 정치사업이 필요한데 이것을 뒷받침해야 할 핵심실무단위인 정무수석을 없애버렸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결국 노무현 대통령은 핵심들의 실무적인 조력 없이 자신이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을 하겠다는 식이 되지 않을 수 없고 사심 없이 나라를 다스리려 했던 선의와는 관계없이 현실에서는 가장 오만하며 권위주의적인 행태를 보이게 되는 역설이 발생했다. 그리하여 범여권의 제1의 화두가 ‘소통’이 되었던 것이다.
단 한차례의 토론으로 제1야당의 대표였던 박근혜를 설복시키거나 상대방을 굴복시켜 연정을 실현시키거나 적어도 박근혜 대표에게 ‘수류탄’을 던질 수 있다고 본 정무적 감각을 무엇이라 해야 할까? 연정 같은 것은 적어도 상대방에 대하여 엄청난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야 상대에게 진정성을 보여줄 수 있고 최소한의 실현가능성도 있으며, 노무현식 ‘수류탄’도 상대 진영에 넘길 수 있는 것이다.
마치 권위주의를 해체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노 대통령은 과감하게 권력을 제자리로 돌려놓고자 하였으며, 각급 단위에 맞게 많은 권한을 위임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상반되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것 또한 비극적인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노무현 대통령은 정치가 아니라 정책으로 나라를 다스리려 했다. 도올 김용옥 기자가 노 대통령에게 소언(少言), 다문(多聞), 치대(治大)하라는 충고는 정확한 판단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정치에 대해서 이런 저런 실언으로 사람들을 아연실색하게 한 적은 있지만 자신이 추진하고자했던 정책을 여당, 야당을 상대로 모든 정성을 다해 정책 세일즈를 했다는 증거가 없다. 오히려 반대로 말을 너무나 아꼈던 것이, 소언이 문제였다.
대통령에 대한 충심을 가진 사람들이 노 대통령의 통치스타일에 대한 지적과 충고를 하면 그 주변 사람들의 대답은 언제나 대통령의 스타일이 ‘Shy’하다거나 ‘Show-off’를 싫어한다는 변명으로 일관했다. 거기에 대한 설득력있는 해답은 오히려 관료적이 아니었을까?
노무현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으로 철저하게 자신을 한계 지우고 있었던 것이며 정권이기를 포기한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대통령제 하에서 여당의 지원 없이 내각제하의 수상으로서 실험을 하고 있었다고 보여 진다. 노무현은 ‘경포대’(경제를 포기한 대통령)가 아니라 사실은 ‘정포대’(정권이기를 포기한 대통령)였던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실패한 대통령이다
반동에 의해 무산이 되었을 지라도 지역주의 극복과 정치개혁의 완수라는 일관성은 있었던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새로운 세계! 새로운 리더십!’이라는 새로운 시대적 과제에는 완전한 실패를 보여주었다. 노 대통령은 여기에서 통치능력의 뚜렷한 한계를 보여주었다.
세계화와 정보화의 결과인 디지털 디바이드에 의해 지구촌에도, 국내적으로도 분리되는 두 개의 세계. 그 국내적 현상이 양극화이다. 진보의 영원한 가치라 할 수 있는 공동체주의와 끊임없이 밀어닥칠 신자유주의와의 사상적 전선에서의 투쟁. 좌파개혁과 우파개혁 모두에 대하여 편견 없이 사회적 진보를 위한 정책의 이니셔티브. 노무현 정권은 이를 위한 국가의 전면적인 재개조라는 의제 설정을 생선가게의 고양이라 할 수 있는 관료들에게 맡김으로서 실패하고 말았다.
정부혁신의 이름으로 행정부에 과감한 구조조정을 위한 칼을 들이대는 대신에 나라의 운명, 작게는 정권과 자신의 운명을 저당 잡혀 버렸다. 관료들의 그 뛰어난 실무능력을 누가 당해낼 것인가? 그것은 노무현의 실패는 누구의 책임도 아닌 스스로의 책임이며 정책의 실패보다 정치의 완전한 실패였다.
내각제하에서는 집권당이 행정부인 동시에 정권이 될 수밖에 없지만, 대통령제하에서는 ‘대통령의 사람들’이 비서실, 정부, 여당, 강제력을 가진 권력기관과 인지능력을 예민하게 해 줄 기관들에 전략적으로 포진되어야 한다.
대통령은 여당에 대해서도 소극적으로 방치할 것이 아니라 정권을 공유하고자 해야 하며 심지어 자신의 정책 수행을 위한 ‘작업’과 로비의 대상으로 삼을 각오가 되어있어야 한다. 대통령이 여당에서 무슨 지위를 차지하건 충심으로 대화하고자 하는데 그것을 거부할 여당 의원이 있을까? 한국의 정치 문화 수준을 고려해 보면 성은이 망극해서 감읍해 마지않을 것이다. 야당에 대해서도 국정의 파트너로서 대통령 본인이 하고 싶은 정책의 실현을 위해 세일즈맨과 같은 성실성을 가지고 수다쟁이에 가까운 서비스를 아끼지 말아야 함은 물론이다.
노 대통령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공(功)도 반, 과(過)도 반이다.
먼저, 공의 영역은 한국에서 권위주의체제의 마지막 잔재를 성공적으로 청산하여 한국이라는 나라를 ‘정상국가’로 만든 창업자였다는 사실이다.
그의 불행은 문화혁명가로서 천신만고 끝에 권력을 잡았으나 그 권력을 운영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고, 치세에 적합한 지도력을 갖추지 못했다. 그의 말을 따르자면 구시대의 막내로서 대단한 성공과 업적을 거두었지만 새 시대의 첫차로서는 철저하게 실패했다. 한나라당과 그 지지자들, 그를 뽑아주었던 많은 중립적인 유권자들은 그 책임을 준열하게 묻고 있으며 노 대통령을 심판의 대상으로 삼게 되었다.
노 대통령은 민주개혁세력에게 참담함과 애석함이라는 감정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인간에게 행복보다는 불행이 항상 절실한 법이니 노 대통령은 실패한 대통령이다. 그리고 그 결과 ‘진보’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민주개혁세력과 민주화운동 세대로서 ‘386’에게 정상적인 야당의 길도 보이지 않은 폐허와 다름없는 정치 지형을 역사적 유산으로 남기게 되었다.
박정희의 ‘복권’에서 보듯이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가 현재의 평가로 고정될 것이라고 볼 수 없으며 김영삼 전 대통령처럼 ‘용 못된 이무기 성질만 남는다’는 식의 화풀이 정치만 하지 않는다면 역사의 장에서 훨씬 후한 평가를 받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노 대통령에 대한 태도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친노, 비노, 반노 모두 그릇된 태도이다. 스스로를 진보라고 믿는 모두는 노대통령이 밝히지 못한 새 시대의 국가적 과제가 무엇이었어야 하는지를 반추해 보아야 하며, 자신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부터 찾아야 한다.
좌파라고 역사를 진보시키는 것도 아니며 우파라고 뒤로만 가라는 법도 없다. ‘앞으로!’를 찾는 것이 진보이며 좌파와 우파는 당파성의 상대적 표현일 뿐이다. 노무현은 진보에 있어 극복의 대상이며, 넘어서야 할 대상이다. 극노(克盧)와 탈노(脫盧)가 정도이다.
노무현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는가? 노무현 정권과 참여정부의 실패에서 자유로운 자가 돌을 던져라. 노 대통령의 실패를 방관한 자들은 침묵하라. 야당 할 각오 없이 창당이란 방법으로 노무현으로부터 얄팍하게 탈출을 하려했던 자들은 침묵하라. 시대정신과 대안, 해법을 찾는 대신에 정면에선 줏대 없는 해바라기로 살면서 노대통령의 실언과 처세의 미숙을 이유로 뒷공론만 일삼던 정신적인 노예들은 침묵하라.
새로운 전쟁은 시작되었다노무현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이명박인가? 한국 보수의 과제는 반공주의 청산과 자유주의를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한국 보수들의 근본적인 문제인 국가에 대한 희생과 헌신을 보여주지 않으면 보수는 되풀이하여 역사의 준엄한 심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명박 후보는 추진력이란 리더십의 한 덕목은 있어도 인생의 이력 전체가 탐욕으로 점철되어있다.
이 후보는 대통령이 될 수 있다하더라도 정상적인 직무수행이 가능할까 의문이 들 정도로 대다수 국민들에게 약점이 잡혀있다. 작은 실수 하나라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백번을 양보하여 본인이 근신하여 무실역행(務實力行)하더라도 굶주렸던 보수들의 권토중래와 탐욕을 제어할 수 있으며 그가 보수들을 설득할 수 있는 도덕적 명분이 있는가?
87체제의 막내였던 노무현에 대한 진테제(Synthese)의 대표는 누구인가? 정동영 후보는 노무현 정권의 계승자인가, 새로운 시대의 대안 인가?를 유권자에게 물어봐야 한다. 이리 저리 말을 둘러대도 유권자들은 알고 있다. ‘심판 대상’의 방조자라는 사실을.
노무현에 대한 진정한 심판자는 이명박이 아니라 노무현에 대한 지양(止揚)의 입장에 서 있는 문국현이다. 문국현의 ‘사람중심 진짜경제’는 박정희의 성공과 그 역사적 한계를 보여주는 재벌 체제의 대항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한국에서 문국현 같은 기업가는 존재 자체로서 봉건적 잔재가 남아있는 기업집단들에게 불편하다. 동시에 재벌의 문제는 부의 축적과 지배구조의 문제는 물론 거기에 대항하면서 힘을 키워온 ‘노조’의 문제까지를 포함한다.
비정규직문제의 해결에서 대기업노조가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인가? 역사의 이행은 구체제 내의 비정상이라 할 수 있는 새로운 싹으로부터 출발해서 그것이 마침내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가 되는 과정을 밟는다. 문국현은 범여권일 수 없으며 미래를 밝히지 못하는 자칭 진보들에게 비정상적인 정치인일 수밖에 없다.
정동영 후보와 범여권, 민주신당 내외의 민주개혁세력은 문국현 후보를 일방적으로 짝사랑하다가 실연을 당했다하여 살충제 들고 설치는 볼썽사나운 협박을 거두어들일 때이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문국현에게 노무현정권을 심판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
덧붙이는 글 | 조혁 기자는 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 창조한국당 김영춘 선거대책본부장 특보로 할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