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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은 날씨가 궂어 마음이 가라앉았었다. 눈이라도 내렸다면 좋았을 터인데, 눈은커녕 비가 내렸다. 중부 지방에는 하얀 눈이 내렸다는 보도를 들었다. 겨울에 눈이 아니고 비가 내리고 있으니, 침잠된다. 옷깃 사이로 배어드는 한기가 그렇게 싫을 수가 없다.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16일은 달라졌다. 창가를 밝게 비춰주는 햇살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분명 유혹이었다. 부르고 있었다. 환한 세상으로 나오라고 하는 신호였다. 삭풍으로 움츠렸던 마음을 위로하고 있었다. 그러나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살아온 날들의 타성이 몸과 마음을 잡고 있었다. 어지러워진 정신을 추스르기가 쉽지 않았다.

 

어디론가 날아가고 싶다는 무의식이 발동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거친 길을 가고 싶었다. 무작정 출발하였다. 달리다가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곳에 가면 마음을 다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일상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곳이니, 그 곳에 가면 뭔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란 막연한 기대감이 커졌다.

 

실상사, 남원에 소재하고 있는 절이다. 절이라고 하면 산사를 떠올리게 된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절은 산에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깊은 산속에 있는 절이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그 이유조차 생각하지 않았다. 당연하니, 의문을 가질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실상사는 산 속이 아닌 들판 한 가운데에 있다.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 때 흥척 국사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선종 가람이다. 안내판에 의하면 828년의 일이라고 하니 세월의 무상함을 실감하게 된다. 역사가 깊으니, 중요한 문화재도 많다. 절 안에는 보물 제 33호로 지정된 수철 화상 능가 보월탑을 비롯하여 보물급 10점과 주요 민족자료 등 총 18종이 있어 찾는 이의 마음에 길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탑신은 사라진 비를 바라보면서 잃어버린 나를 생각하게 된다. 나라고 믿고 있는 몸은 잠시 의탁한 것일 뿐 참 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해준다. 나를 잃어버렸으니,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참 나를 잃어버렸으니, 방황할 수밖에 없고 헤맬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뿌리 없는 부평초 신세가 되었으니,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 아닌가? 절 안에는 빨간 산수유가 그대로 달려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처연한지 나를 잃고 방황하는 내 모습을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을에 빨간 열매를 만났다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겨울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실상사 경내에는 고기와 탑이 쌓여져 있었다. 문화재 발굴을 통해 출토된 수많은 삼국시대의 기와들은 보존하기 위한 방편으로 쌓아 놓은 탑이었다. 걸어온 지난 날들은 바람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 흔적에서 참 나를 찾을 수 있을까?

 

“야 ! 국물이 진하다.”
 

실상사에서 나를 찾다 보니, 배가 고팠다. 절에서 조금 떨어진 남원시 산내면의 식당에 들어갔다. 토종 돼지고기 요리를 잘 한다는 이름이 나 있었다. 어찌나 맛있는지, 일품이었다. 고기를 구어 먹고 난 뒤 누룽지를 시켰다. 그런데 그 누룽지 국물이 어찌나 진한지 신기할 정도였다.

 

고소한 맛이 그 어떤 음식과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났다. 비결을 물으니, 쌀뜨물을 사용하여 끓인 것이라고 하였다. 어머니가 생각났다. 어머니는 버리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세월 따라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고소한 누룽지 맛에 취하였다. 잃어버린 나가 바로 누룽지 속에 있다는 생각을 하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참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제법무아라고 하였던가? 없는 나를 찾으려고 하니, 찾을 수가 없고 텅 비어 있는 것을 있다고 착각하고 있으니,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닐까? 누룽지의 고소한 맛을 통해 참 나의 찾는 방향을 알아차린다.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채면 참 나를 찾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다.

덧붙이는 글 | 사진은 전북 남원시 실상사에서 촬영


태그:#나, #실상사,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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