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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12일 오후 서대전역 광장에서 '이명박 후보 지지'를 호소하는 유세를 하고 있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12일 오후 서대전역 광장에서 '이명박 후보 지지'를 호소하는 유세를 하고 있다. ⓒ 장재완

 

출마 여부와 상관없이 이번 17대 대통령 선거의 '진정한' 승리자는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와 기호 8번 허경영 후보인 듯싶다. 박근혜 전 대표는 '백의종군 하겠다'는 미묘한 수수께끼를 던지며 2선으로 물러섰지만 바로 그 공간에는 마땅히 찍을 사람을 찾지 못한 유권자들이 서성대고 있었다.

 

'아이큐 430'의 허경영 후보는, 만약 그의 공약이 '개그 콘서트'의 코너였다면 실소에 불과했겠지만, TV 토론을 통해 과감히 공언됨으로써 유력한 후보자들의 공약까지 공허하게 만들어버리는 놀라운 효과를 자아냈다. 예컨대 이 대도시의 점심시간을 잠시 일렁거리게 한 '결혼 수당 5천만 원'이라는 허경영 후보의 공약과 '낙동강에서 한강까지 파버리겠다'는 이명박 후보 공약의 거리는 그리 멀어 보이지 않는다.

 

그 반대의 셈을 해보자. 각 후보자의 이념이나 공약과 무관하게 관전평을 하자면 이번 대선 과정에서 스스로 뒷걸음질 친 쪽은 아쉽게도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가 될 것이다. 이회창 후보와 이인제 후보 때문에 모두가 잠시 잊고 있었지만, 권영길 후보는 대권 3수생이다. 앞의 3수생들이 권토중래의 기본 포석을 마련한 것에 비해 권영길 후보는 과연 선거 전략이 있었는가 걱정이 들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행보를 반복했다.

 

권영길 후보의 이해하기 어려운 행보

 

경선 과정에서 '양극화와 비정규직'이라는 당대의 화두를 가장 선명하게 내세운 정당이면서도 경선이 끝나자마자 임진각으로 가서 '코리아연방공화국'을 선언했고 그 다음에는 남쪽으로 내려가서 TV 시청자에게는 너무나 식상한 '민생 탐방 이미지'만 남기며 귀한 시간을 허비했다. 'BBK'라는 블랙홀은 권영길 후보의 공약을 가볍게 집어삼켜 버렸다.

 

그리고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가 있다.

 

올해 초부터 심심찮게 들여온 얘기를 잠시 복기해 보자. '이명박이 집권하면 진보 진영도 거듭 날 것'이라는 말이 있었다. 지금처럼 'BBK' 폭탄이 터지기 이전의 상황에서 이 역설적인 명제는 허무주의의 바탕 위에서 꽤 공감을 얻으며 번졌다.

 

이 역설적인 명제는 '이명박이 집권해야 진보 진영이 제 정신을 차리고 전열을 가다듬어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다'는 말로 풀이된다. 'BBK'라는 폭탄이 터지지 않았다면 투표 하루 전날인 지금에도 아마 이 같은 한숨이 지배적이었을 것이다. '집권할 능력이 없으면 집권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도 꽤 설득력 있게 번지곤 했다.

 

그러나 'BBK' 폭탄과 상관없이, 누군가 만약 지금도 그와 같은 명제에 동의하고 있다면, 딱 한나절만 진실로 심사숙고해 보자고 권하고 싶다.


만약 이명박 후보가 그동안의 여론조사대로 집권하게 되면 진보 진영은 거듭나게 될 것인가. 그럴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실권하게 되고 야당하게 되고 관공서에서 짐을 싸서 나오게 되고, 그러다 보면 절치부심의 뜻이 새롭게 피어오르기도 할 것이다.

 

 17일 새벽, 한나라당 이명박 대선 후보가 대통합민주신당과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첨예하게 대치한 상황에서 BBK 특검법 수용 처리문제로 의총을 마치고 차량에 탑승 하기전 지지자들과 인사를 하고 있다.
17일 새벽, 한나라당 이명박 대선 후보가 대통합민주신당과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첨예하게 대치한 상황에서 BBK 특검법 수용 처리문제로 의총을 마치고 차량에 탑승 하기전 지지자들과 인사를 하고 있다. ⓒ 윤대근

이명박 후보가 집권하면 진보 진영은 거듭나게 될까

 

그런데 그것은 일부 '진보 진영', 혹은 그 진영의 대리자가 되어 공직에 나갔던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것일 뿐, 지극히 평범한 서민의 삶과 그 영혼의 문제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일부 시민단체나 <한겨레> <오마이뉴스> 같은 매체들도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면, 역설적인 의미에서 탄력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동안 이 단체와 매체들이 초발심을 잊었다고 비판했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보수 정권에 맞서 왕성한 시민운동을 전개하거나 분연히 정론직필의 펜을 드는 일을 보게 된다면, '이제야 <한겨레>답고 <오마이뉴스> 답다'는 얘기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것 또한 일부 '진보 단체나 매체'의 경우일 뿐, 지극히 평범한 서민의 삶의 내면세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공직에 나간 일부 '진보 인사'나 몇몇 시민 단체와 매체가 '진보 진영'의 모든 것이 아니듯이, '진보 진영' 또한 평범한 삶의 안정성과 인간다운 내면적 삶의 풍요로움을 찾고자 하는 수많은 서민의 지극히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지난 가을에 들은 얘기다. 지역의 어느 문화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이 전하기를, 그곳 지자체의 문화 사업에 참여하였다가 두 가지 장벽에 가로막혀 포기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하나는 지역 특유의 토착적 관계망이고 다른 하나는 정권이 바뀔 것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슬며시 얼굴 표정을 바꾸기 시작한 기관의 장벽이었다.

 

그 사업은 '서민'이라는 두루뭉술한 범주가 아니라 저소득층 아이들의 문화 교육 체험 확대와 관련된 것이었는데, 나는 바로 이런 작은 일들이 조금씩 어긋나게 되리라는 불길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수십 년 동안 뿌리 깊은 공생공존의 묘를 터득해온 온 각 지역의 토호 관계의 부활이야말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된다면 집권 이후의 첫 번째 걱정거리다.


명망가 중심의 '진보 진영'은 바로 그 명망성(이른바 상징 자본)으로 사회적 위상과 개인의 경제 활동을 최소한이나마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간신히 일궈낸 일상 속의 작은 진보, 생활 속의 작은 전진(진보라고 말하기에는 쑥스러워도), 새로운 가치관과 방법론으로 착실하게 일궈낸 일상생활의 민주적 성과와 그 내면의 속살들이 지체되거나 더러 후퇴하게 될 일에 대해 우리는 지금 당장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지금 고민해야 하는 문제는?

 

이명박 후보가 당선된다고 해서 생활 세계의 후퇴 혹은 식민화가 발생하겠는가 하고 누군가 질문한다면, 'BBK' 속보를 잠시 접고 당장이라도 이명박 후보의 공약을 차근히 살펴보기 바란다. 공허하게 '진보적 세계관' 운운할 것도 없이, 지난 몇 해 동안 당신이 소박하게나마 동의해왔던 소중한 가치들을 발견하기가 꽤나 어려울 것이다.

 

요컨대 이명박 후보가 집권하면 뜻하지 않게 야당이 된 '진보 정치인'이나 모처럼 거리로 나온 '진보 진영'이나 새 지평을 맞게 된 '단체 및 매체'는 어쩌면 '모두 모여 함께 하나'가 되어 '제 정신'을 차릴 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그와 같은 '세력의 진보'를 걱정할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이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가치관과 방법들에 의해 새롭게 식민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것'이고 '연줄을 잡는 게 장땡'이 되는 상황에서 저소득층 공부방이나 방과 후 문화 교육이나 인문적 삶의 질 회복이나 소통과 연대나 싱싱한 창의와 상상이 하나같이 '능력 서열화'의 식민어가 될 수도 있는 일에 대해 우리는 오늘 당장 성찰해야 한다.

 

누군가는 이명박 후보가 'BBK' 폭탄에도 불구하고 당선될 것이라고 한다. 누군가는 취임하기도 전에 대혼란이 올지 모른다고 한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취임 이후라도 'BBK' 등의 문제로 탄핵 소추라는 회오리가 불어 닥칠 것이라고 한다.


그 과정은 정계 안팎의 몸싸움으로 그치지 않고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이 거리에서 맞부딪치는 상황을 예고한다. 기억하기도 싫은 지난 독재 시절의 거리 풍경을 벌써부터 걱정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다. 이미 정치판에서는 그와 같은 독설을 서로 주고받고 있다.

 

아, 뉘라서 그와 같은 상황을 원하겠는가. 좌우를 막론하고 그와 같은 상황은 진실로 피해야만 할 일이다.

 

당선 이후의 공황 상태를 걱정한다면... 투표하라

 

그래서 마지막으로 덧붙이는 말인데, 왜 당선 이후 혹은 취임 이후의 공황 상태를 걱정하는가. 오늘 하루 깊이 생각하면 될 일 아닌가.


거리에서 독설이나 몸싸움을 주고받으며 할 일을 내일 투표소에서 아주 간단하게 기표로 하면 되지 않겠는가.
 

이명박 후보가 찜찜하지만 능력은 있어 보인다구? 그런 줄 알았더니 사기를 쳤거나 적어도 사기범에게 당한 사람 같다고? 그렇다고 다른 후보를 보니 영 맘에 들지 않는다고?


그게 현실이지만 어쩌랴. 온 몸을 던져 지지하고 싶은 후보자가 마땅치 않은 것이 이번 대선의 특징이지만, 그렇다고 그 한 표를 포기한다면, 아마도 이번 겨울과 내년 봄의 거리는 누구도 원치 않는 격렬한 상황이 재현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좌우를 막론하는 얘기다.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누구라도 이번 겨울과 내년 봄에 생계를 잠시 접고 거리에 나가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힘든 길을 걷기 보다는 내일 투표소에서 한 표를 꾹 누르면 될 일이다. 붉은 인주로 해도 될 일을 굳이 같은 색의 다른 액체로 할 필요가 있는가.

 

아주 넓은 의미의 '진보 진영'도 마찬가지다. 명망가들의 야당 생활을 걱정할 때가 아니다. 생활 세계의 식민화를 걱정해야 한다. 당장 우리의 일상의 문제다.

 

거리에서 할 일을 투표소에서 해결하자.


#대통령선거#이명박#진보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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