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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다리로 똘이는 세 번 체포되어 건너갔다. 사진 속 한 재중동포 여성이 북한에 가서 친척과 면담을 마친 후 돌아오고 있다.
▲ 중국 도문시-북한 남양시간 다리 저 다리로 똘이는 세 번 체포되어 건너갔다. 사진 속 한 재중동포 여성이 북한에 가서 친척과 면담을 마친 후 돌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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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 거기 가면 북한으로 가는 다리가 하나 있어. 그 다리가 내가 세 번 잡혀가며 건넜던 다리야!”

귀환노동자 가정방문 여행 12일째. 한국으로 국제전화를 걸어 똘이와 통화를 했다. 철령시를 출발하여 연길을 지난다 했더니 도문시에 꼭 가보라고 한다. 도문시는 북한과 두만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접한 중국 최 변방 도시 중 하나이다.

똘이는 북한과 중국을 오가며 목숨을 담보로 하여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두만강을 숱하게 도하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꽃제비 아이들을 돕는 활동을 시작하긴 했지만, 중국에서 쉼터를 만들어 지원한 것은 나의 친구의 몫이었고 나는 당시 국외에서 장기 체류를 할 수 없는 조건이라 국내에서만 활동을 해야 했다.

그동안 동북3성 여기저기에서 오신 많은 재중동포들을 만나며 중국에 가면 꼭 그분들의 고향을 가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었다. 하지만 오늘 똘이와 통화하고부터 머릿속은 도문시에 대한 궁금증으로 가득 찼다. 연변에서 재중동포 몇 분을 급히 만나고 그분들께 부탁하여 차를 빌려 도문시로 향했다.

두반강변 수풀 너머로 작은 북한 도시가 보인다. 그 뒤로 온통 민둥산이다.
▲ 두만강변에서 바라본 북한 남양시 두반강변 수풀 너머로 작은 북한 도시가 보인다. 그 뒤로 온통 민둥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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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숲속 뒤로 토담으로 된 아담한 초소가 보인다.
▲ 두만강 변 두만강 숲속 뒤로 토담으로 된 아담한 초소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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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밤에 두만강을 몰래 건너 중국의 작은 마을에 도착했어요. 있잖슴까? 아무 집에나 우선 비럭질이나 해보자 해서 들어갔는데 엄청 놀랐다는 거! 조선족 할아버지 한 명이 우리보고 불쌍하다며 밥 한 공기를 퍼다 주는데, 하얀 입쌀밥이잖습니까? 진짜 엄청 놀랐습니다. 아, 이렇구나. 소문이 진짜구나. 중국이 이래 잘 사는구나 하고….” 

북녘 생활 십몇 년, 중국생활 4년, 한국생활 6년을 두루 거치며 북조선 말에서 연변 말투 그리고 우리나라 네티즌들이 쓰는 말까지 뒤죽박죽 뒤섞어가며 자근자근 늘어놓는 똘이의 잔잔한 무용담을 떠올렸다. 괜스레 아픈 상처를 툭툭 건드리고 싶지 않아 지난 이야기를 묻지 않으려 했고, 또 한편 텔레비전 개그프로그램을 보며 방구석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똘이의 모습을 보면 나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혹은 아무런 상처나 슬픔도 겪어보지 못한 친구일지도 모른다는 의심까지 갈 정도였으니까.

늘 얘기치 않은 상황에서 들려주는 똘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채 맞추어지지 않는 신비스런 모자이크 그림 조각들을 보는 듯했다. 언제고 한 번 똘이의 인생행로 전체를 기록해보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마침 이번 중국 여행 직전에 똘이가 그런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생활이 어려워 북한 신의주시에서 평양시내로 과일 장사를 하던 시절, 배급이 끊겨 식량을 구하러 중국으로 갔다가 소식이 끊겨버린 어머니, 배고픔으로 결국 앓아누우신 아버지, 급기야 두만강을 직접 건너야만 했던 상황, 세 번의 체포와 두 번의 탈옥, 다시 고향으로 가서 동생을 업은 채 감행한 마지막 두만강 도하, 제트보트를 타고 메콩강을 통해 전속력으로 탈출해 들어간 태국, 그리고 새롭게 마주한 남조선.

정말 신기한 것은, 20대 중반의 청년이 겪기엔 너무 힘겨웠을 그 지난한 날들 속에서, 생명을 위협하는 원수 같은 사람들을 그렇게 숱하게 만나면서도 똘이의 마음속엔 미운 사람들보다 고마운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이런 숲속에 숨어있다가 두만강을 건너곤 했다. 그렇게 하기를 수십 차례. 마침내 똘이는 중국 할마이 신고로 체포되었지만, 김대좌님같은 분을 만나서 풀려날 수 있었다.
▲ 두만강 숲 이런 숲속에 숨어있다가 두만강을 건너곤 했다. 그렇게 하기를 수십 차례. 마침내 똘이는 중국 할마이 신고로 체포되었지만, 김대좌님같은 분을 만나서 풀려날 수 있었다.
ⓒ 차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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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 잡혀간 것은 어떤 할마이 때문이에요. 그 할마이 우리 불쌍하게 보인다고 밥을 줄테니 자기 가게로 따라오라는 겁니다. 우리는 진짜 다른 생각 안 하고 그 할마이 따라가서 정신없이 밥을 먹는데, 아 잠깐 후에 그 할마이가 신고를 해서 공안들이 나타나서 저하고 친구하고 바로 잡혀갔어요.”

그렇게 중국 공안에게 잡힌 후 바로 저 다리 위로 끌려갔다고 한다.

“아, 그런데 제가 쌀 두 포대 어깨에 가득 진 채 잡혀갔어요. 며칠 동안 이 부대 저 부대 옮겨다니며 맨 아래 군인에서부터 점점 위로 불려갔는데 마지막에 한 대좌에게까지 갔는데, 아 엄청 좋은 사람인 겁니다. 그분 벌써 눈빛부터가 나를 불쌍한 투로 보는 겁니다. 뭐 욕 이런 것도 전혀 안 하고, 별다른 추궁이나 조사 같은 것도 안하더라고요. 그냥 한참 책상에 앉아서 혼자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더니만 우리 아버지 성함을 물어보더라고요. 대답을 해줬더니 편지 한 통을 써주는 거예요. 그리곤 편지 봉투에 담아서 저에게 주시면서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빨리 부대를 나가라고 하면서 우릴 보내주는 거예요.” (북한군 대좌는 한국군 대령급 직위입니다.)

“아무리 중국과 북한 사이라 해도 국경 수비대라면 훨씬 군 기강도 셀 텐데. 정말 신기하네. 그래 쌀은? 쌀은 어쨌어? 쌀은 그 부대에 빼앗겼지?”

“아뇨! 쌀 두 포대를 그대로 다 주는 거예요. 아 그래서 우린 부대원들이 혹시나 마음을 바꿔 우리를 다시 좇아오지 않을까 해서 다섯 시간 넘게 계속 쌀 두 포대를 들고 산 쪽으로 난 길을 따라 정신없이 뛰었어요.”

“그래? 아 너무 다행이다. 그런데 그 봉투는 도대체 뭐래?”

“있잖슴까? 저도 그 봉투가 너무 궁금해서 도저히 집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해서 결국 산을 다 넘기 전에 봉투를 뜯어서 뭐라고 적었는지 봤습니다. 아 진짜 나 그 중대장 아직도 잊지 못하겠습니다. 북조선에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통일되면 그 사람 꼭 다시 만나러 가서 반드시 인사드릴 겁니다.”

과연 그 봉투 안에 뭐라고 쓰여 있었던 것일까? 조국을 떠나 남의 나라에 가서 식량을 구걸하며 ‘조국의 명예에 흠을 낸’ 소년들이 특히나 북조선 군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렸을 것이 분명할 텐데…. 그 중대장이 썼다는 편지 내용을 듣는 순간 난 온 몸에 전율, 아니 소름이 돋았다.

(다음은 똘이가 기억하는 편지 내용을 쓴 것입니다. 진짜 편지는 북조선 말투로 썼겠으나, 똘이도 이젠 한국 사람이 다 되고 난 후라 고향의 말투를 다 기억하지 못해 우리가 쓰는 용어로 풀어서 썼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똘이 아버지.

우리 조선이 지금 상당히 어렵습니다. 배고픔이란 견디기 힘든 고통임이 분명합니다. 가족이 굶어 죽는 모습을 보다 못해 중국으로 쌀을 구하러 간 똘이의 행동을 크게 책하지는 않습니다. 더군다나 아버지께서 병에 들어 누워계시다 하니 똘이의 마음이 오죽 걱정이 크겠는지 알만 합니다. 그러나 똘이 아버지. 조금만 참고 견디어주십시오. 조선은 이제 곧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배급도 다시 시작될 것이고, 중국에 가서 식량을 구걸하지 않아도 될 만큼 강한 나라 조선으로 우뚝 설 것이니, 지금의 이 고난의 시대가 지날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똘이가 가져온 식량은 저희가 그대로 보내드립니다. 빨리 회복되시기 바라며, 다시는 똘이가 중국으로 가서 식량을 구걸하여, 우리 조선민족의 자존심을 훼손시키는 부끄러운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조선은 반드시 다시 일어서고 말 것입니다. 00부대 대좌 000

똘이는 아직도 그에게 따뜻한 자비를 베풀어준 김00 대좌님을 기억하고 있다. 조선은 반드시 다시 일어설 것이라던 그 대좌의 신념은 어쩌면 더 이상 악화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무너져 내린 북녘의 식량사정에 대한 마지막 항변이었을지도 모른다.

나이 열여섯, 몸무게가 30kg을 겨우 넘어선 조그만 아이가 아버지가 아프다며 쌀 두 포대를 가득 들고 두만강을 건너다 체포되는 서글픈 조국의 재난 앞에 그는 아마 가슴을 쓸어내리며 비탄에 젖었을 것이다.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무서우리만치 기막힌 상황에 처한 조국의 현실에서,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며 쌀 두 포대를 그대로 안기어 보내준 것은 그가 할 수 있었던 최고의 자비였으리라 확신한다.

조국을 생각하는 충성심과, 가엾은 인민을 동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볼 줄 아는 그런 감성을 지닌 북조선의 인민군이 존재하다니. 아니, 존재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애당초 근거 없는 편견에 불과했겠지만, 누구에게서도 그리고 어떤 신문이나 책에서도 이런 북조선 군인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나의 놀라움이 무척 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일은 1990년대 후반, 그러니까 ‘탈북자’를 둘러싼 온갖 끔찍한 소식이 본격적으로 들려왔던 2000년 이전에 있었던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똘이가 기억하는 첫 번째 체포에서 겪은 일이다. 이후 똘이는 식량사정이 나아지지 못해서 다시 수십 차례 두만강을 넘어 식량을 구하다 두 번이나 더 체포되었다. 그리고 이 두 번의 체포과정에서는 위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 아주 혹독한 체포 및 조사, 투옥 과정을 겪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한 시간이 넘게 두만강 가에서 똘이가 잡혀갔던 그 다리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다리 주변에는 다리와 두만강, 그리고 두만강 건너 북한 남양시를 화폭에 담아내기 위해 관광객들이 저마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북적거리고 있다. 중국 남방계 관광객들까지 무척 많은 것을 보면 이곳도 어지간히 잘 알려진 관광지인 것 같다.

DMZ가 미국인들에게 아시아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관광지 중에 하나인 것처럼, 이곳 두만강변에서도 우리 민족의 아픔과 상처가 타민족에게 한낱 관광거리로 전락하고 있는 현실을 보게 되어, 너무나 서글프고 원망스럽다.

사진촬영에 여념이 없는 일행을 잠시 뒤로하고 나는 두만강가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중국변방에서 낙후된 도시로 알려진 곳인 이곳 도문시만 해도 주말을 맞은 오늘 강변에는 가족들이 강가에 나와서 소풍을 즐기는 모습이 무척이나 평화스럽다. 재중동포에게 듣자니 북한이 곧 개방될 것을 예상해서 벌써부터 이 도시의 부동산 가격이 오르고 있다고 한다. 정말이지 인간에게 딱 맞는 수식어는 경제적 동물이란 생각이 들 뿐이다.

어둠이 잦아든 저녁 두만강가로 중국인들이 가족끼리 함께 나와서 휴일을 즐기고 있다.
▲ 두만강변 어둠이 잦아든 저녁 두만강가로 중국인들이 가족끼리 함께 나와서 휴일을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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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가에 서서히 어둠이 잦아든다. 똘이가 숱하게 건넜던 그 두만강이 바로 내 눈앞에서 유유히 흐르고 있다. 길은 관광지에서 벗어난 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호기심에 나는 강변을 따라 계속 걸어가다 이내 수풀 속으로 들어갔다. 강 건너 북한군 초소와 은폐를 위한 참호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맞은 편 북한쪽 강변에는 오직 군인들만 가득하다. 삽을 들고 부지런히 땅을 파내는 군인들, 웃통을 벗고 몸을 씻고 있는 군인들, 바위에 걸터앉아 땀을 식히고 있는 군인들. 북한군 부대에서 군악대의 연주에 맞추어 한 여군의 카랑카랑하고 매서운 군가가 생음악으로 흘러나온다.

나무 한 그루 찾아볼 수 없는 민둥산들이 남양시를 둘러싸고 있다. 산마저 마치 허기에 져 기력을 잃은 모습이다. 저 민둥산들을 매일같이 보며 김 대좌는 10년이 지난 아직도 강성대국이 되지 못한 채 고난의 행군을 지속해야 하는 조선의 현실에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을지 모르겠다.

이 곳을 지나면 북한이다. 저 너머에 군인들이 경계를 서고 있다.
▲ 북한으로 가는 기찻길 이 곳을 지나면 북한이다. 저 너머에 군인들이 경계를 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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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더 걷다 보니 중국에서 북한으로 가는 기찻길이 나왔다. 중국 군인이 경계의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철길 건널목에서 혹시나 북한으로 가는 기차를 구경할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삼십 분가량 서 있었지만 기차는 어느 쪽에서도 오지 않았다.

중국 내 마지막 건널목. 기다려도 기차는 오지 않았다.
▲ 북한으로 가는 기찻길 건널목 중국 내 마지막 건널목. 기다려도 기차는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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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10년 전, 1997년에 판문점에 방문했었다. 눈에 보이는 경계선은 아무것도 없는데 반은 북한 영토, 반은 남한 영토라는 회의실에 숨죽이며 앉아있던 순간 창밖에서 우리를 신기한 듯 쳐다보던 북한군인과 눈이 마주쳤다. 무서울 것이라 예상하던 그 북한군인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장난기 섞인 웃음을 보이며 민망한 듯 달아났었다.

비무장지대에 흐르던 그 긴장과 어울리지 않았던 그 군인의 모습과 그리고 두만강변에서 체포된 아이들을 쌀부대 채로 돌려보냈던 그 김 대좌의 이야기가 우리 안에 감추어진 그 음습한 모습들을 조금이나마 벗겨내 주었으면 좋겠다.

통일이 되면 나도 똘이와 함께 김 대좌님을 찾아뵐 것이다. 그때 우리 똘이를 살려줘서 너무 고맙다고 꼭 말할 것이다. 김 대좌님이 있어 아직 조선의 자존심이 무너지지 않은 거라고 꼭 말씀드려야겠다.

역시 중국 내 마지막 기차역. 머지 않아 이 기찻길을 따라 북한으로 들어가리라. 똘이와 함께 김대좌를 만나서 고맙다고 인사를 드려야겠다. 그럴 날이 오겠지.
▲ 북한으로 가는 기찻길 역시 중국 내 마지막 기차역. 머지 않아 이 기찻길을 따라 북한으로 들어가리라. 똘이와 함께 김대좌를 만나서 고맙다고 인사를 드려야겠다. 그럴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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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두만강, #재중동포, #귀환노동자, #가정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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