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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에 집을 나섰다. 대통령 선거일에도 출근을 해야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출근해서 일하다가 잠깐 투표하러 갔다 와도 된다고 했다지만 일터와 투표소의 거리가 멀어 잠깐만의 시간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대통령 선거날조차 아침부터 일어나 동동대는 아내의 모습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이 물씬 느껴진다.

 

새벽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내는 집을 나섰다. 투표소를 거쳐 일터로 가기 위해서다. 나도 아내를 따라 나섰다. 우리보다 먼저 투표를 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새벽 잠 없어 일찍 나온 어르신들도 있었지만 아내처럼 일터에 가야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있었으리라.

 

투표를 마친 뒤 아내를 일터까지 태워다 줬다. 일터 앞에서 내린 아내는 애들 밥 잘 챙겨 주라며 손을 흔들었다. 정규직인 나는 오늘 집에서 쉬기 때문이다. 아내를 일터로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니 아이들은 아직도 꿈속 여행 중이었다.

 

일터를 떠난 아내를 대신해서 거실 청소를 하는데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다. 김진숙의 <소금꽃나무>란 책이다.

 

이른 봄에 피기 시작해서 늦가을이 되어서야 지는 꽃이 있다. 온몸을 땀으로 적시며 일하는 노동자들의 작업복마다 피어나는 꽃이다. 잎사귀도 없이 꽃만 흐드러지게 피우는 나무가 있다. 소금꽃나무인 노동자들이다.

 

<소금꽃나무>의 저자 김진숙을 가까이서 본 적이 있다. 2006년 겨울 부산 역사교사모임에서 주관하는 자주 연수에 참가했을 때였다. 그 자리에서 민주노총 부산지역 지도위원 김진숙의 강연이 있었다.

 

강연을 하기 위해 연단에 올라선 그의 첫인상은 평범했다. 하지만 강연은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강연 내내 온몸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가방 끈도 짧고 생쥐 콧구멍에 틀어박을 돈도 없던 여자 아이가 홀홀 단신 객지 생활을 하며 경험했던 참혹했던 기억들. 노동운동을 하다가 끌려가 당했던 끔찍한 고문 이야기. 수배 시절 이야기. 그 어려움 속에서도 가슴 가득 정을 주고받았던 동료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

 

<소금꽃나무>를 읽으며 강연 듣던 때의 상황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아니 좀더 구체적이고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훨씬 더 큰 충격과 울림으로 다가왔다.

 

아빠 그런데 내가 일자리 구해 줄 테니까
그 일 그만 하면 안 돼요?
그래야지 운동회, 학예회 울 아빠도 보잖아요.
다른 애들은 아빠 자랑도 하는데
내가 빨리 일자리 찾아 줄게요. 화이팅!
참, 아빠 무서웠죠?
오빠가 아빠노릇 잘 해요,
사랑해요.
<크레인 위에 있는 아빠께 혜민이가 보낸 엽서, 책 속에서>


낮은 곳에 피어 발길에 차이고 밟히기도 하지만 흐드러진 소금꽃 피우는 이들의 서럽도록 아름다운 이야기에 또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낮은 곳에 피었다고 꽃이 아니 기야 하겠습니까.
발길에 차인다고 꽃이 아닐 수야 있겠습니까.
발길에 차이지만 소나무보다 더 높은 곳을 날아 더 멀리 씨앗을 흩날리는 꽃.
그래서 민들레는 허리를 굽혀야 비로소 바라볼 수 있는 꽃입니다.
민들레에게 올라오라고 할 게 아니라
기꺼이 몸을 낮추는 게 연대입니다.
낮아져야 평평해지고 평평해져야 넓어집니다.
겨울에도 푸르른 소나무만으로는 봄을 알 수 없습니다.
민들레가 피어야 봄이 봄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책 속에서>

 

열여덟 꽃다운 나이에 노동자가 되어 철야를 밥 먹듯이 하면서도 주먹질에 발길질에 몸을 내맡기고 살던 이야기, 버스 안내양이 되어 일을 끝내고 돌아가 속옷까지 모두 벗긴 채 검사받고 입금하던 이야기, 용접이 뭔지도 모르면서 다른 곳보다 돈 많이 줄 거라는 생각에  용접 기술 배워 한진중공업에 입사해서 땜쟁이가 되고 기름밥 수를 쌓아나가던 시절의 이야기, 사고로 추락사한 동료의 유가족이 보상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는 현실에 분노해서 노동조합 대의원으로 출마했던 이야기….

 

그 혹독했던 때, 아무도 기적을 믿지 않던 시절 온몸으로 기적을 만들어가던 사람들이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단지 과거의 역사를 기억하고 회상하기만 하던 때, 스스로 역사가 되어 세상을 열어가던 사람들이 있었다.

 

<소금꽃나무>에서는 그들의 서럽도록 아름다운 이야기가 눈물겹게 그려지고 있다. 그들은 아직도 이루지 못한 꿈을 안고 살고 있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꿈이 그것이다.

덧붙이는 글 | 김진숙/후마니타스/2007. 5/10,000원


소금꽃 나무

김진숙 지음, 후마니타스(2007)


태그:#소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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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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