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고장 충남 금산 제원면 천내리 들판에 '약 630년 동안 한자리에서 무엇을 지키고 서있을까?'라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용호석(龍虎石)이 있다. 이 용호석(龍虎石)은 충남금산군제원면 천내리 1006번지에 자리 잡고 있는데 충청남도지정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어있다. 이 용호석 앞으로 금강이 휘감아 돌고, 뒤로는 낮은 구릉에 이어 성주산(529m), 월영산(529m), 양각산(565m)이 있으며, 강 건너에는 넓은 들이 펼쳐져있다. 현대 사람들은 용호석을 놓고 두 가지 추측을 하고 있다. 하나는 공민왕(1330~1374)이 자신의 능묘로 표식했다는 설과 또 하나는 천도에 대한 설이다. 충남도지정 유형문화재 제4호에 대한 안내판에는 용호석은 2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제원면 천내리 마을 서쪽을 흐르는 강변에 있으며 제원대교에서 북쪽으로 500m지점에는 용석(龍石) 그리고 그로부터 다시 북방으로 100m떨어져 호석(虎石)이 위치하고 있다고 적혀있다.
용석(龍石)은 70×80㎝ 가량되는 대석(臺石) 위에 조각되었으며 높이 138㎝ 전후 폭81㎝인데 이름을 상징한 듯한 여러개의 과형돌기(過形突起)와 그 사이에 꿈틀거리는 용이 몸체가 조각되어 있다. 여의주를 물고 있는 입 양쪽에는 아가미와 수염이 표현되어 있다.
한편 호석(虎石)은 110㎝×65㎝의 장방형 대석(臺石) 위에 앞발을 세우고 앉아있는 모습을 조각했는데 동체에는 두툼하게 융기(隆起)된 곡선과 원형을 교호(交互)로 조각하여 호랑이 털 모양을 만들었다. 몸체는 서향하고 있으나 머리는 북쪽을 향하였으며 입을 크게 열고 있다고 설명돼 있다. 따라서 이 용호석의 유래는 고려말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안동으로 피난을 내려온 공민왕이 자신의 능묘 위치를 정하고 필요한 석물을 준비하게 하였으나 개경으로 돌아간 후 그대로 두었다는 설이 전해온다.
이에 대해 강성복 민속학자는 "고려 말 난을 피하여 안동으로 피난 온 것은 역사적으로 확인된 사실"이라며 "금산에 들렸는지는 기록에 없지만, 공민왕이 다시 개경으로 올라가다가 인근 영동 영국사에 머물렀다고 추측되며, 풍수지리에 능통한 공민왕이 두루 지역을 살펴보다가 금산 제원 천내리에 금강이 휘 감아 돌고, 뒤로는 불쑥 약간 불쑥 솟아오른 능선과 준봉들이 펼쳐져있는 이곳이 '선인이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는 형국'이라 하여, '선인부사도강형(仙人浮莎渡江形)의 명당'이라며, 자신의 능묘의 위치를 정하고 용호석으로 표식 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말했다. 그 후 공민왕은 개경에 환도한 후 정신착란 등으로 인해 1374년 피살되어 생을 마감해 그대로 방치된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추측은 천도설이다.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는 공민왕을 풍수지리의 대가라고 평가한다. 최 교수는 "공민왕이 권신들을 몰아내고 신진사대부를 등용하여 토지재분배, 노비해방 등의 개혁정치를 펼치려고 시도한 흔적이 역사적으로 나타나는데, 풍수지리를 개혁의 한 수단으로 활용한 흔적이 곳곳에 나타난다"고 말했다. 또 고려사에는 공민왕이 풍수지리를 활용한 흔적이 곳곳에 있는데 스스로 토목공사, 노국공주의 능 선정, 개경의 기세가 쇠하였다는 이유로 천도할 곳을 평양과 충주로 정하기도 했다. 물론 공민왕은 천도의 터를 평양과 충주만 정한 것이 아니라, 전국 곳곳에 좋은 땅을 수소문해 천도의 터로 표식 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주장과 함께 금산 제원면 천내리 들판 한가운데는 고려공민왕이 세원 것으로 추정되는 용호석이 약 630년을 지키고 서있는데, 지금도 이곳에는 새로운 무덤들이 여기저기에 늘어만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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