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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노랗고 투명한 햇살이 루체른의 산과 호수에 쏟아지고 있었다. 햇살이 닿는 집이나 상가의 벽면도 시시각각 밝게 몸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부지런한 일본인 관광객 몇 명은 벌써 루체른 구시가의 이른 아침에 사진기를 들이대고 있었다. 사람이 빠져나간 루체른 구시가의 아침은 어제와 사뭇 다르게 고요했다.

 

 나는 이 평화로운 정경을 루체른 시내의 가장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기로 하였다. 나는  루체른 시내 북쪽을 둘러싸고 있는 무제크 성벽(Museggmauer)을 향해 걸었다. 15세기경에 루체른 전체를 둘러싸던 무제크 성벽이 지금은 북쪽의 900m 정도만 남아 있지만, 루체른 시내와 그 주변의 알프스를 조망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다.

 

 

어제 아내, 딸과 다니던 로이스(Reuss) 강변과 헤르텐스타인 거리(Hertenstein Str) 뒤편의 언덕을 오르니, 벽면에 무제크 성벽이라고 쓰인 곳이 나왔다. 성벽의 다락방 같이 생긴 건물의 어두운 내부로 들어가자 가파른 계단이 나왔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랐다. 계단 위의 문 밖에는 운치 있는 성벽 위의 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친절하게도 여행자가 성벽을 자세히 둘러볼 수 있도록 성벽의 안내도가 붙어 있었다.

 

무제크 성벽에는 9개의 탑과 같이 높은 망루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 탑 중에서 가장 높이가 높은 만리 망루(Mannliturm)과 함께 쉬르머 망루(Schirmerturm), 지트 망루(Zytturm)만이 개방되어 있었다. 성벽의 망루에 오르니, 피어발트슈테터(Vierwaldstatter) 호수와 루체른 구시가의 평온한 정경이 창살 밖, 바로 발 아래에 펼쳐지고 있었다. 호수 뒤로는 필라투스(Pilatus)산이 루체른을 굽어보듯이 불뚝 솟아 있고, 그 위에 흰 구름이 걸려 있었다.

 

  성벽을 내려올 때도 올라갈 때와 같은 계단을 사용하였다. 루체른 시내 반대편으로는 푸른 잔디 언덕이 평화롭게 펼쳐지는 작은 공원이 있었다. 공원 주변을 지나는 주민도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한적한 곳에서 홀로 발걸음을 옮겼다. 잔디밭 뒤의 마을과 개인 주택들은 현대적이면서도 루체른의 오래된 성벽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성벽 옆을 따라서 나란히 걸었다. 나는 성벽 곁에 듬성듬성 서 있는 키 큰 나무들을 벗 삼아 천천히 걸었다. 신선하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나는 성벽을 따라 앞으로 걷고 있지만, 머리 속에는 서울에서의 지나간 과거의 시간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회색의 성벽에서 조금 떨어져서 보니, 높은 성벽 위에 서 있는 망루의 모습이 모두 달랐다. 비슷한 듯 다른 개성 있는 망루들은 성벽을 가지고도 예술적 감성을 풍부하게 표현하는 스위스인들의 예술적 기질을 보여주고 있었다. 교회의 첨탑같이 뾰족한 망루가 있는가 하면 성벽 위에 탑같이 솟은 망루가 있고, 말 그대로 전형적인 망루같이 생긴 망루가 육중함을 자랑하고 있기도 하였다.

 

  나는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높다란 성벽보다도 이 망루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망루는 혼자서 루체른의 이 푸른 하늘을 이고 있듯이 서 있었다. 나는 군사적 시설물인 망루가 이토록 파란 하늘과 어울리는 곳을 전에 보지 못하였다. 키 큰 나무들이 키 자랑 하듯이 망루에 가까이 왔지만 망루는 왕궁을 지키는 근위병처럼 굳건히 서 있다.

 

 

  공원에는 청동인물상이 입에서 시원스런 물을 내뿜는 분수가 있었다. 나는 분수대 옆에 앉아서 다리를 쉬었다. 분수에 고인 물은 곧 넘칠 듯이 가득 차 있었고, 인물상의 입에서는 물이 계속 보태지고 있었다. 청동상의 뚫린 눈 속으로 성벽과 나무들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분수대 옆에 앉아 성벽을 바라보다가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눈앞에 보이는 망루 꼭대기에 무언가 서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니 그 것은 망루 꼭대기 지붕에 꽂혀있듯이 서 있는 기사 상이었다. 탑같이 생긴 망루의 지붕 위에 익살맞은 기사 상을 올려놓은 것이다. 투구까지 쓴 이 기사상은 왼쪽 허리에 칼을 차고 오른 손으로는 창을 들고 있었다.

 

  이 하늘의 기사는 성벽 밖을 바라보지 않고 성벽 안쪽인 루체른 시내를 향하고 있으니, 성벽을 지키는 졸병이 아니라 루체른을 수호하는 의미의 장군일 것이다. 이 기사 상이 생긴 나름의 내력이 있겠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성벽의 망루에 설화와 유머를 올려놓는 루체른 인들의 여유가 내심 부러웠다.

 

 

  이 기사는 언제부터 성벽의 맨 꼭대기에서 루체른의 푸른 하늘을 이고 있었을까? 사람이 만든 무생물의 기사 상이지만, 루체른 사람들의 마음이 이입된 이 기사는 루체른 도시를 지키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루체른과 루체른 호수를 굽어보고 있었을 것이다. 루체른 사람들은 도시를 지켜주는 수호신인 이 하늘의 기사를 보면서 마음이 든든했을 것이다.

 

 

  나는 성벽을 따라 언덕을 천천히 한걸음씩 내려왔다. 성벽 앞 초원에는 나를 웃음 짓게 하는 게 또 있었다. 토끼 같이 온 몸에 털이 복스럽게 난 소 몇 마리가 풀밭에 방목되고 있었다. 스위스 융프라우에서 본 소들과도 다른 모습의 소들이었다. 사람들이 기르는 소들은 대개 털이 많지 않은데, 알프스의 추운 지방에 적응한 소들이라 그런지 누런 털이 탐스럽게 자라 있었다. 산악지방에서 자라서인지 다리도 짧은 편이다. 다리 짧고 털복숭이인 소가 눈만 껌벅거리는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내가 다가가서 사진을 찍어도 눈만 껌벅거린다.

 

  언덕 밑으로는 알프스에서 흘러내려온 짙푸른 로이스(Reuss) 강이 힘차게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맑은 공기를 품은 아침 바람이 불어 풀잎들이 넘어지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에 땀이 흐르지 않아 기분은 더 할 수 없이 상쾌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산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이 아름다운 언덕을 뒤로 하고 내려간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나는 언덕길을 돌아보며, 조용히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성벽의 과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했다. 성벽의 모습은 내가 삶을 사는 곳과 매우 이질적이지만, 성벽을 돌아보는 기분은 마치 내 삶을 되돌아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침의 자연은 성벽에 부서지는 환한 햇빛을 품고 있었다. 그 햇빛은 사진 속 이미지에 단순히 엷은 황금빛과 같이 찬란하게만 나왔지만, 진짜 성벽의 햇빛은 그 황금색에 바람과 아침 냄새, 그리고 고요함을 담고 있었다. 시간은 멈춰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스위스, #루체른, #무제크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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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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