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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
▲ 책표지 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
ⓒ 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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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겨울 풍경 하나. 자욱한 담배 연기, 군용 담요 둘러쓰고 앉아 분주하게 오가던 손길. 그 손길을 따라 이어지던 환호와 탄식. 문풍지 사이로 들어온 찬 겨울바람에 등잔불이 흔들리면, 군용 담요 둘러쓴 사람들의 그림자도 덩달아 흔들렸다.

긴 겨울밤 보내기가 지루했던 어른들은 동네 사랑방에 모여 술내기 화투를 쳤다. 아이들은 그 사랑방에 덤으로 끼고 싶어 했다. 화투판이 벌어진 사랑방 한 구석에 웅크려 앉아 구경하다 보면 얼큰한 안주 몇 점 얻어먹을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겨우내 이런 풍경이 이어졌다. 대부분 겨울밤 놀이 정도에 머물렀지만 패가망신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가까운 친척 한 사람이 그렇게 무너졌다. 그는 긴 겨울을 읍내 노름판에서 숙식을 하다시피했다.

결국 가진 재산 다 날리고, 아이들이 해다 놓은 나무까지 팔아 노름 돈으로 날렸다. 아비가 노름으로 재산을 날린 탓에 그 집 아이들은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가 되었다.

도박과 노름의 역사 속으로

새벽종이 울리고 새아침이 밝았으니 너도나도 일어나 잘 살아보자고 외치던 때가 1970년대였다. 100억불 수출과 1000불 소득의 그날까지 허리띠 졸라매고 저임금도 장시간 노동도 참고 견디자던 시절이다.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자는 구호에 모든 것을 걸었던 때였다.

1970년대의 역사에서 겨울밤 사랑방의 화투판에 주목하는 사람도 있을까. 아마도 없지 싶다. 마을길도 넓히고 지붕도 개량되었으니 살기 좋은 농촌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농촌 사람들은 하나둘 농촌을 떠나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사람들은 왜 화투판에 매달렸을까.

저자는 기존 역사 연구의 사각지대였던 도박과 노름에 주목했다. 왕조사, 정치사, 귀족 문화처럼 한줌밖에 안 되는 지배층의 역사에서 매몰되었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줄다리기, 고싸움놀이, 차전놀이 외에 골패도 하고 투전도 했던 민중들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저자의 눈에 띈 역사 속의 도박의 사례를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백제의 개루왕은 도박에서 이겨 도미의 아내를 빼앗았다. 신라의 귀족들은 주사위 놀이로 밤을 지샜다. 고려의 의종은 스포츠도박의 중독자처럼 국사를 돌보지 않고 격구에 몰두했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고려 말 가장 뛰어난 격구 선수였다. 중종 때는 궁중에서 쌍륙판을 벌이던 일당 간의 싸움으로 문소전이 불타 버렸다. …(중략)… 을사오적의 한 사람인 이지용은 나라를 판 돈으로 화투판을 벌였다. - 책 속에서

힘 있고 권력 있는 이들의 도박은 힘없는 백성들의 피눈물로 이어졌다. 개루왕과의 도박에 패해 아내를 빼앗긴 도미는 그 절박한 상황을 모면하려 애쓰지만 왕의 노여움을 사서 눈알마저 뽑힌다.

정사를 돌보기보다는 격구와 같은 도박에 몰두했던 의종은 무신정변으로 왕위에서 쫓겨난 뒤 살해당했다. 격구는 무신정변 뒤에도 권력을 등에 업고 계속 번창했다. 격구장을 넓히기 위해 민가를 허물기 일쑤였다. 을사조약에 찬성하는 자신의 행위가 병자호란 당시의 최명길의 행동에 비길만한 일이라며 떠벌였던 이지용은 그 대가로 얻은 막대한 돈을 노름으로 탕진했다.

도박을 권하는 사회

이제 현실로 눈을 돌려보자. 형법상 도박은 불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 속에서 도박은 공공연하게 권장되고 있다. 아예 사행산업의 명목으로 합법화되기도 한다. 카지노, 경마, 복권 등이 대표적이다.

카지노나 경마 로또 등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린다. 한 순간에 인생을 역전시킬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난이 죄가 되는 세상, 너나없이 부자 되기를 갈망하는 사회가 빚어낸 현상이다.

부자가 대접받고 가난은 무시되는 사회, 정상적인 노력을 통해 부자의 대열에 합류하기 어려운 사회에서 사람들은 카지노나 경마 로또를 통해서 일확천금과 신분 상승을 꿈꾸게 된다.

하지만 그들의 꿈은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꿈에 불과하다. 로또 1등 당첨 확률이 814만 5060분의 1이라고 한다. 이 정도면 맑은 하늘에서 벼락 맞을 가능성보다 어려운 확률이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로또에 매달리고 카지노나 경마에 눈길을 돌린다.

부와 권력이 세습되고 부동산과 학력이 세습되는 사회 속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신분 상승을 꿈꿀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도박이다. 인생 대역전의 길이 환하게 열려 있는 듯한 환상 속에서 사람들은 불가능한 환상에 매달려 살게 된다. 그들이 환상에 젖어 있는 한 모든 것이 세습되는 사회 구조는 온존될 수밖에 없다.

헛된 꿈과 환상에 젖은 도박 중독자들에게 저자는 마지막 당부를 하며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그대, 잃었을 때 떠나라. 툭툭 털어버리고 떠나라. 그래야 비로소 그대의 미래와 가족의 희망이 태양처럼 솟을 것이다.” - 책 속에서


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

유승훈 지음, 살림(2006)


태그:#노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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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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