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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전 딸 부부도 함께 식구들과 저녁을 했지만, 성탄절인데 어제 과음을 한 탓인지 집에 앉아 있는 아들과 집안에서 저녁을 하기는 좀 밋밋하다. "간단히 나가서 저녁이나 할까"하니 좋다 한다. 그런데 나도 즉흥적으로 꺼낸 말이라 메뉴를 고르기 쉽질 않다. 돼지갈비, 회…. 그러다 왜 갑자기 곱창이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성탄절 저녁메뉴로 곱창이 좀 거시기하기는 하지만 어떠냐하니 "거 괜찮지요" 한다.

예나 이제나 대포집(선술집)이라고 불리우려면 이런 쇼케이스 하나 있어야 제맛이다. 찬 기온에 물 맺힌 유리 너머로 곱창이 푸짐하게 올려진 쟁반이 겹겹이 쌓여 있다.
▲ 선술집 쇼케이스 예나 이제나 대포집(선술집)이라고 불리우려면 이런 쇼케이스 하나 있어야 제맛이다. 찬 기온에 물 맺힌 유리 너머로 곱창이 푸짐하게 올려진 쟁반이 겹겹이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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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동네까지도 시내버스가 다니고 마을버스도 뻔질나게 다니지만 오래 전에는 시내버스 종점이 쌍문동이었다. 근처에는 경기북부로 가는 시외버스 정류장도 함께 있어 쌍문동에는 그만그만한 선술집 겸 실비집들이 많이 있었다. 그중에는 아직도 맥을 이어 나오고 있는 유명한 집도 있는데 그중 하나가 곱창집이다.

저녁때 가면 손님이 미어터져 신발주머니에 신발을 챙겨 가지고 들어가야만 하는 집이라 장시간 눌러앉아 먹기도 미안한 집이라 불편하긴 하지만 그런데도 찾아 가는 것은 가격대비 맛이 좋은 집이기 때문이다.

사실 곱창이라는 것은 원래 매우 저렴하여 서민이 값싸게 단백질를 섭취할 수 있는 방편이었다. 그래서 청진동 해장국이나 시장 국밥에는 살코기를 뺀 나머지부분인 부속고기를 푸짐하게 넣어 끓여냈던 것인데, 언제부터인지 양곱창에도 양극화 현상이 불어와 어떤 곳에서는 쟁반에 쫘악 펼쳐져 나왔던 양곱창이 익으면서 같은 값의 꽃등심 크기로 오그라들어 버리니 어처구니 없을 때가 있다.

1만8천원짜리 곱창 한 판. 두 사람 먹기 딱 좋은 양이다. 어떤 곳에서는 쟁반에 펼쳐나온 곱창이나 양이 불판에서 자기 가치가 꽃등심이나 되는 것처럼 오그라 들어 버리니 이래서는 서민음식이라 할 수 없다.
▲ 곱창혼합 한판 1만8천원짜리 곱창 한 판. 두 사람 먹기 딱 좋은 양이다. 어떤 곳에서는 쟁반에 펼쳐나온 곱창이나 양이 불판에서 자기 가치가 꽃등심이나 되는 것처럼 오그라 들어 버리니 이래서는 서민음식이라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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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폿집'이라고 하면 길가의 허름한 선술집을 이르는 말인데, 붉은 페인트로 '왕대포', 안주일절(일체)이라고 쓴 미닫이 유리문 곁 벽에 붙어 있는 허름한 쇼케이스에는 고정메뉴로 돼지족발이나 곱창이 기름때 묻은 유리 뒤에 놓여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 갈라치면 비틀어져 다시 조금 닫았다 열어야 하는데, 안에 들어서면 퀴퀴한 막걸리 냄새와 연탄 냄새가 코를 찌르고 대개는 드럼통 자른 목로에 연탄불, 그 위에 석쇠를 올려 놓은 것을 흔히 볼 수 있어서 곱창은 이런 데 올려놓고 구워서 굵은 소금에 찍어 먹는 것이 제 격이라 하겠다.

이런 선술집은 체면을 차리고 점잖게 먹는 곳이 아니라, 오다가다 곁에 앉아도 인연이라고 어디 가느냐고 물어보며 한잔, 성씨가 같다고 해서 한잔 먹는 곳이 아니든가?

이렇게 김치까지 올려놓고 먹을 때쯤이면 주위 모든 사람이 친구가 된다. 성씨가 같아도 '내 술 한잔 받으소', 고향 방향만 비슷해도 동향이라고 한잔. 바로 이 맛이 대포집 맛 아니겠는가?
▲ 익어가는 곱창 이렇게 김치까지 올려놓고 먹을 때쯤이면 주위 모든 사람이 친구가 된다. 성씨가 같아도 '내 술 한잔 받으소', 고향 방향만 비슷해도 동향이라고 한잔. 바로 이 맛이 대포집 맛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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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깔린 거리를 걸으니 원조집이 아닌 후발집은 아직도 장사를 하고 있으나 일단 원조집을 찾아가 본다. 불이 꺼진 간판 그러나 벽에 붙어 있는 쇼케이스에는 물 맺힌 유리창 너머로 곱창이 들어간 쟁반들이 겹겹이 포개져 있어 나를 맞아준다.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가니 좁은 홀에 빼곡히 들어 찬 타일로 덮혀진 시멘트 목로가 예전과 다름이 없다.

그러니 내가 처음 한 판에 8천원, 1만2천원까지 먹어 보았던가? 지금은 1만8천원이니 그리 많이 올랐다고 볼 수는 없다. 자동으로 나오는 썰은 양배추, 마늘, 김치 한 접시와 쐬주 한 병. 주문하자마자 즉시 대령하는 곱창 한 판. 곱창이 익어 가는 것을 기다리며 주인 할아버지 안부를 물으니 아직도 정정하시단다.

입가심으로 밥볶기. 철판에 깔아놓은 돼지기름이 크리스마스에 내린 눈과 같이 보이니 역시 술은 그래서 먹는 것이야-.   이 정도면 병이지요?
▲ 곱창집의 화이트 크리스마스 입가심으로 밥볶기. 철판에 깔아놓은 돼지기름이 크리스마스에 내린 눈과 같이 보이니 역시 술은 그래서 먹는 것이야-. 이 정도면 병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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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안주발인가? 아들은 제대하고 처음 먹어보는 곱창이라며 묻지도 않는 군대 얘기를 꺼낸다. 지글지글 구워지는 곱창에 삭은 김치를 넣어가며 아들 친구 이야기, 진로 이야기, 버스 종점에서 집까지 걸어 들어가던 이야기,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며 반(半) 판 더 시켜서 권커니 자커니 먹으니 벌써 시간이 많이 흘러 버렸다. 마지막으로 밥 한 그릇 볶아 먹는데 불판 위에 붓는 돼지기름이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내리는 눈꽃 같다.

크리스마스에 케이크를 놓고 그럴듯한 음식을 먹는 것이 일상화된 것은 이미 오래 되었지만, 이야기 들어주는 집사람과 술 한잔 같이 할 수 있는 아들과 함께 대포집에 앉아 오붓한 시간을 가질 수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우리는 내친 김에 아들이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 걸었던, 이제는 아파트 숲이 되어버린 골목길을 달빛과 벗을 하며 낄낄대며 집으로 돌아온다.   

타일을 붙인 시멘트 목로. 벌써 내가 아는 한 이 모양대로 30년 가까이 된다. 계산하는 아들. 주인 할아버지가 아줌마 자리에서 계산을 하곤 했는데 뵙지 못하니 좀 섭섭하다.
▲ 계산대와 시멘트 목로 타일을 붙인 시멘트 목로. 벌써 내가 아는 한 이 모양대로 30년 가까이 된다. 계산하는 아들. 주인 할아버지가 아줌마 자리에서 계산을 하곤 했는데 뵙지 못하니 좀 섭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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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역(쌍문동)에는 우체국 건너편에 진주집, 황주집을 비롯하여 역사를 자랑하는 곱창집이 몇 집 모여 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닥다리즈포토갤러리 http://yonseidc.com/ 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곱창집, #쌍문동, #진주집, #황주집,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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