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 방송을 끝으로 SBS 특별기획 <로비스트>(극본 주찬옥 최완규, 연출 이현직 부성철)가 조용히 종영했다. 마지막회 시청률은 11.1%(TNS 미디어리서치). <주몽>의 송일국-최완규 흥행 콤비의 재결합, 톱스타 장진영의 안방극장 복귀작, 그리고 키르키스스탄 해외 로케이션과 대규모 총격전 등 무려 100억원을 상회하는 엄청난 제작비. 동 시간대 방영된 <태왕사신기>를 능가하는 강력한 라이벌이 될 것이라던 초반 예상과는 달리 너무도 초라한 결말이다. <로비스트>는 당초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무기 전문 로비스트’라는 이색 직업군의 이야기를 다룬 ‘전문직 드라마’를 표방하여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정작 뚜껑을 열자 프로폐셔널한 로비스트들의 세계는 전혀 보이지 않고, 어설픈 복수와 치정극, 그리고 비현실적인 전개로 점철된 멜로 드라마만이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로비스트>의 실패는 다분히 지난 상반기 방영되었던 MBC <에어시티>를 떠올리게 한다. 국내 최초로 인천공항을 배경으로 항공업 종사자들의 이야기를 다루겠다며 주목받았던 <에어시티>는 방영 내내 <대조영>의 기세에 눌려 평균 시청률 10% 초반을 벗어나지 못하고 조용하게 막을 내려야 했다. 소재는 다르지만, <에어시티>의 행보는 <로비스트>와 흡사하다. 이정재-최지우라는 톱스타 커플을 내세운 것이나, 전문직 종사자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막대한 제작비를 투입한 ‘장르 드라마’라는 점. 그리고 일단 시청률 경쟁에서 동 시간대 막강한 사극 경쟁작이 선점하고 있던 화제성을 극복하지 못한 것, 부실한 극본과 캐릭터 등으로 인해 용두사미로 마감했다는 것까지도 그러하다. <에어시티>는 항공본부 운영실장과 국정원 요원을 각각 남녀 주인공으로 내세웠으나, 이 둘을 무리하게 커플로 연결시키는 과정에서 드라마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방향을 잃었다. 드라마는 항공 이야기와 첩보액션을 일관성없이 오락가락하며 극적 긴장감을 상실했고, 남녀주인공의 직업적 전문성을 부각시키지 못한채 결국 공항에서의 또 다른 연애담으로 전락해야 했다. 이름값이 뛰어난 스타를 기용했지만, 정작 전혀 로비스트답지 않은, 항공 전문가나 국정원 요원 같지 않은 캐릭터와 배우 간의 부조화는, 스타 캐스팅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직업에 관한 전문성이 실종된 상황에서, 단발적으로 이어지는 에피소드의 나열은 극적 긴장감을 유지해주지 못한 채, ‘사건을 위한 사건’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시청자에게 싸늘한 실망감만을 안겨주었다. 오늘날 한국 드라마들이 전문직 이야기의 개발에 눈길을 돌린 이유는 ‘장르의 다양화’에 있다. 그동안 사극을 제외하면 한국의 드라마들은 대부분 남녀 간의 연애담이나 불륜, 출생의 비밀 등을 소재로 한 홈드라마를 벗어나지 못했다. 주인공의 직업이나 사회적 배경은 그저 이야기의 도입부를 꾸려나가기 위한 양념에 그쳤을 뿐, 극 전개에서 필연적인 영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의학드라마라고 한다면 ‘병원에서 연애하는 이야기’, 기업드라마는 ‘회사에서 연애하는 이야기’, 농촌드라마는 ‘시골에서 연애하는 이야기’라는 비아냥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 한국형 트렌디 드라마의 엄연한 현실이었다. 상반기 방영되었던 <하얀 거탑>의 성공은 한국형 장르 드라마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하얀 거탑>은 엄밀히 말해 정통 ‘의학드라마’는 아니었지만, 병원을 무대로 남자들의 신분상승을 위한 욕망과 권력 투쟁을 현실적으로 다루어낸 ‘정치드라마’로서 높은 완성도를 보여줬다. 특히 정교한 의학지식과 병원사회의 서열구조, 의료사고에 대한 법규 등 실제 현실을 연상시키는 철저한 고증과 리얼리티를 기반으로 드라마의 공감대와 현실성을 높였다는 점에서 전문직 드라마가 지녀야 할 미덕을 보여주었다는데 의의가 있다. 남녀 간의 상투적인 연애담이나 출생의 비밀 같은 작위적인 설정을 덧붙이지 않고도, 인간사의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정치투쟁과 권모술수, 이상주의와 실리주의의 충돌, 조직사회의 카르텔 구조 등 현실적 공감대를 통해 어필한 <하얀거탑>의 드라마적 완성도는 새로운 장르에 목마른 한국 드라마에 하나의 귀감을 제시했다고 할만하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형 전문직 드라마의 실험은 아직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고 있다. 미스터리, 스릴러, 의학, 법정극 등 다양한 장르를 소화할 수 있는 제작 노하우의 부족, 전문적인 작가군의 부재는 한국 드라마의 한계이기도 하다. 오늘날 <프리즌 브레이크> <24> 같은 해외의 수준 높은 장르 드라마들을 통해 높아진 시청자들의 눈높이는, 이제 단순히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의 차원을 넘어,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요구하고 있다. <에어시티>나 <로비스트>는 한국형 전문직 드라마를 만들어내기 위한 과도기의 시행착오였다고 할만하다. 두 작품은 일단 새로운 장르에 대한 수요를 확인했다는데 성과가 있지만, ‘리얼리티’와 ‘전문성’에서 시청자들을 만족시키는데 실패했다. 무늬만 ‘소재주의’로 시청자의 시선을 끄는 시대는 지났다. 단순히 이색적인 직업을 보여주거나 해외 로케이션 등으로 볼거리를 전시하는 차원을 넘어 드라마 속 세계의 이야기를 얼마나 설득력있게 관객에게 전달할 수 있는가에 성패가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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