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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8일 아니면 29일 출발하여 30일 혹은 31일에 돌아오는 일정의 겨울여행을 몇 해 되풀이하고 있다. 이 기간은 나와 나의 아내가 그런대로 무난히 시간을 낼 수 있고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피할 수 있어 절묘하다. 어딜 가던지 붐비지 않아 대접도 잘 받고 숙박도 비교적 자유롭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교통체증이 거의 없어 일정을 무리하게 잡아도 거의 차질이 없이 다녀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여정은 단순하게 잡았다. 먹거리와 잠자리를 정해 놓고 여행일정을 잡은 것이다. 먹거리로 잡은 장소는 여수다.

 

지난여름 여수여객터미널 근처 금성횟집에서 회를 먹은 것이 잊혀지지 않아 택한 곳이다. 작은 물고기를 뼈 채 썰어 된장과 함께 배추 잎에 싸먹는 회쌈이 제일인데 양념이 아주 맛있게 된 된장이 일품이다. 이 집 근처에서 서성거리기라도 하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 집, 겁나게 맛있는 집여…"하고 묻지도 않은 말을 건넬 정도다. 국물을 맑게 낸 매운탕과 갓 김치, 배추김치, 총각김치에 소박한 젓갈 맛도 잊을 수 없다. 

 

 

잠자리로 택한 곳은 영암. 잠에서 깨어났을 때 우뚝 솟은 월출산이 그리워 다시 보고픈 마음에 택한 곳이 영암이다. 사실 동쪽으로는 순천 선암사와 송광사에 가리고 서쪽으로는 소위 '남도 답사1번지'에 의해 치이고 남으로는 보성 녹차 밭의 유명세로 상대적으로 덜 찾는 장흥, 화순지역을 마음에 두고 택한 곳이다.

 

영암의 월출산호텔은 비교적 가격이 저렴하면서 깨끗하고 물도 좋아 여행 중간에 쉬어 갈만한 좋은 곳이다. 제일 좋은 것은 며칠 앞두고도 예약이 잘된다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월출산의 전경, 마을과 논, 밭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와 여느 숙소와 다른 감흥이 인다.

 

여수와 순천 얘기는 미루고 둘째 날부터 시작해 본다. 무리한 여행으로 피곤하여 늦잠을 잤는데 밖은 온통 새하얗게 변하였다. 밤 11시까지만 해도 별이 총총히 빛나고 있었는데 밤새 눈이 내린 모양이다. 눈 쌓인 무위사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원래는 장흥 보림사, 화순 쌍봉사와 운주사를 보기로 했는데 이 일정은 다음으로 미루고 서둘러 무위사로 향했다.

 

최근 무위사를 찾은 것은 재작년 유난히 더운 여름날이었다. 그 때는 너무나 더워 함박눈이 소복소복 쌓인 무위사를 상상했는데 이제야 함박눈이 쌓인 무위사를 보게 된 것이다.(참고 2006.8.20  무위사의 새벽에 마음을 빼앗기다, 오마이뉴스)

 

"한여름 온 식구가 김 매러 간 사이 대청에서 낮 잠자던 어린애가 잠이 깨어 엄마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는 듯한 절"이라 했던 무위사. 흡사 밤새 푹 잔 어린애가 혼자 일어나 아무 소리 없이 두리번거리며 놀고 있는 모습처럼 평온하다.

 

온 절이 눈으로 덮인 풍경은 우리 모두 일순간 어린애로 만들어 버렸다. 이 곳을 찾은 이는 몇 명 안되었지만 모두 환성과 탄성을 지르기보다는 모두 숨죽이며 가슴 깊숙이 이 풍경을 담아 가려는 듯 두리번거리고 있다.

 

 

아담하여 위압적이지 않은 천왕문에서 계단과 함께 바라보는 극락보전의 풍경이 무위사 제일경인데 백구 한 마리가 안내라도 하듯 천왕문을 들어서고 있다. 이 개는 필경 '나의문화유산답사기'에 나오는 누렁이의 후손일 듯 싶은데 이 개도 나이가 들어서인지 답사객에 지쳐서인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제 할일 하고 있는 듯 길을 앞선다.

 

개와 관하여 '나의문화유산답사기'에는 무위사의 누렁이와 해남 대둔사 유선여관의 노랑이가 등장한다. 무위사의 개는 능구렁이고 유선여관의 노랑이는 무척 부지런한 개로 나온다. 무위사의 누렁이가 공무원이었다면 유선여관의 노랑이는 사기업의 영업사원 정도라 할까? 

 

지금 누렁이와 노랑이는 모두 죽고 무위사에는 누렁이의 손자가 유선여관엔 노랑이의 자식이 있다 한다. 그러니까 위에서 말한 개는 누렁이의 손자이다. 이 손자는 답사객이나 불자가 오면 눈만 깜박이는 누렁이보다는 좀 나아 일어나서 답사객이나 불자를 안내하는 척이라도 한다.

 

 

천왕문에 올라서면 경사가 그다지 급하지 않은 계단 너머 극락보전이 흐릿하게 들어온다. 완만한 계단을 보면 우리의 심성이 담겨 있는 듯 별다른 잔재주를 부리지 않고 자연 그대로 만들어 소박하기만 하다. 그 주변에 배롱나무며 동백나무를 심어 천왕문 아래에서는 극락보전의 일부만 보인다.

 

배롱나무의 빈 가지에도, 일찍 핀 광백(狂柏)과 피어오르기 시작한 동백꽃 몽우리에도 순한 흰 눈이 그림처럼 내려앉아 한폭 그림을 만들어 낸다. 느릿느릿 걷고 싶은 길이다.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길이기에 내가 지나가 그림을 망쳐 버리고 싶지 않았다. 한쪽으로 조심스럽게 걸어올라 맞이한 극락보전.   

 

 

눈맞고 있는 극락보전은 무위의 경지를 몸으로 표현이라도 하듯 인위적이지 않으면서 포근히 내려앉는 눈을 그대로 몸으로 받아 내며 자연과 한 몸이 된다. 

 

 

흰 눈은 극락보전 앞 좌우의 괘불 위에도, 삼층석탑 위에도 내려앉아 있다.흰 눈을 뒤집어 쓴 숱 많은 나무는 천불전을 포근히 감싸고 있다. 키 작은 미륵전·산신각은 눈의 무게를 힘겨워 하면서도 굳건히 이겨내고 있는 것 같다. 미륵전석불이 안에 계셔서 그렇게 느껴지는 지 모르겠다.

 

내가 '남도의 어머니'라 이름 붙인 미륵전석불도 오늘은 쉬시는 가보다. 평소 부지런히 움직이고 억척스럽게 일만 할 것 같은 데 오늘은 주변이 조용하다.

 

 

무위사는 가질만큼만 가진, 더 이상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절이다. 천왕문 계단이 웅장한 축대이었던들, 극락보전의 규모가 한치라도 크고, 삼층석탑, 극락전, 미륵전의 키가 조금 높았던들 이렇게 사랑스런 절로 남지 못하고 사람들이 외면했을 것이다.

 

 

단순하고 겸허하며 소박하고 순리가 포근히 담겨 있는 무위사. 오늘도 무위사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얻고 떠난다.      


태그:#무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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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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