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따뜻한 겨울. 부지런히 손빨래해서 바깥에 널고, 이불도 담벼락에 널어서 말립니다.
▲ 빨래 널기 따뜻한 겨울. 부지런히 손빨래해서 바깥에 널고, 이불도 담벼락에 널어서 말립니다.
ⓒ 최종규

관련사진보기


2007년 12월 24일 월요일 아침, 햇살이 따뜻하고 맑아서 이불을 팡팡팡 털며 담벼락에 널어놓습니다. 절기로 따지면 동지를 지난 날인데 이렇게 따뜻해도 될까 생각하면서도, 겨울에 따뜻하니 몸도 녹고 보일러 안 돌려도 되어 좋은 대목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겨울이 따뜻해질수록 이듬해 날벌레와 나쁜 벌레가 들끓을 텐데요. 겨울 두어 달 동안은 괜찮을지 모르나, 겨울이 지나고 난 아홉 달쯤은 고달플 텐데요. 여름이면 겨울이 생각나고 겨울이면 여름이 생각난다지만, 겨울이 겨울답지 않아도 될는지요.

예배당이 워낙 많은 인천입니다. 강남 어디는 몇 걸음만 걸으면 성형외과가 있다는데, 인천에서는 몇 걸음만 걸으면 예배당이지 않나 싶을 만큼 많습니다. 개화기 때 서양 선교사들이 서울에 들어가는 길목으로 인천을 거쳐 왔기에 인천에는 이리도 서양 종교가 많이 깃들었을까요.

온갖 계열, 온갖 파벌 예배당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습니다. 조그마한 예배당도 있으나 아파트 다음으로 높직한 건물은 으레 예배당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습니다. 아파트가 있기 앞서까지만 해도 높직한 건물은 모두 예배당이었습니다.

종파가 다른 예배당이지만, 이 다른 예배당들은 25일을 앞두고 ‘예수님 이 땅에 오심을 기뻐하고 섬기는 잔치’를 준비하느라 바쁩니다. 믿는 방법은 달라도 믿음 줄기나 믿음 뿌리는 하나인 셈일까요.

예배당 많은 인천에는, 한옥에 깃든 교회도 있습니다.
▲ 한옥 교회 예배당 많은 인천에는, 한옥에 깃든 교회도 있습니다.
ⓒ 최종규

관련사진보기


낮 두 시를 지나고 세 시가 될 무렵, 사진기를 들고 집을 나섭니다. 오늘은 모처럼 겨울치고도 따뜻한 날이니, 이런 날 낮에 동네 마실을 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길을 걷습니다. 문득, ‘예수님 오신 날을 맞이해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니 안 되니 하고들 이야기가 많은데, 지구온난화로 따뜻한 겨울이 더욱 따뜻해진다면, 눈 오는 예수님 오신 날을 바라는 일이란 너무 속 좁은 노릇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겨울이 겨울다울 수 있도록 우리들 살림살이가 달라지지 않고서야, 이날에 맞추어 눈이 오기를 바란다고 해 보아야 헛노릇이 아닐까 싶습니다.

송현시장을 지납니다. 따로 살 거리는 없지만, 낮에 저잣거리 지나가는 일이 드물어서 그냥 지나가 봅니다. 해질 무렵까지 도서관을 지키고 있는 날이 많아서, 늘 저잣거리 잠들 즈음 해서 길을 나서니, 낮에 저잣거리를 지나는 느낌이 새삼스럽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 저잣거리를 지키는 아주머니 할머니 아저씨 할아버지들도, 저잣거리 바깥나들이를 거의 못하면서 한 삶을 보내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모두들 인천 토박이로 쉰 해 예순 해 일흔 해 여든 해를 사셨겠지만, 바로 이웃 동네가 어찌어찌 흘러 흘러 지금 이대로 자리 잡고 있는지까지 두루 헤아리는 분은 드물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살짝 비탈진 냉면골목 언덕길 끝자락. 먹고 마시고 돈을 쓰는 골목만이 '문화거리'는 아닐 테지요.
▲ 냉먼거리 끝자락 살짝 비탈진 냉면골목 언덕길 끝자락. 먹고 마시고 돈을 쓰는 골목만이 '문화거리'는 아닐 테지요.
ⓒ 최종규

관련사진보기


저잣거리를 빠져나와 건널목을 건넙니다. 화평동입니다. 요즈음은 화평동 기찻길 옆이 ‘냉면 골목’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제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때까지, 그리고 고등학교를 마치고 한두 해 뒤까지 이 길은 ‘냉면 골목’이 아니었습니다. ‘색시집 골목’이었습니다.

그때 냉면집은 드문드문 있었고, 냉면집을 마주하고 길쭉하게 색시집이 늘어서 있었고, 골목골목에도 색시집이 있었습니다. 지난날 색시집이 있던 자리는 모두 쓸어내고 없애면서, 동인천부터 용산까지 급행전철을 놓으며 길을 넓히는 데에 반쯤 쓰고, 나머지는 주차장으로 돌렸습니다.

옛 인천여고 너머 굴다리 밑으로 해서 길게 이어져 있던 색시집 길.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이쪽 길은 쉽사리 지나가기 어려워서, 늘 인천여고 뒷길로 올라가며 인일여고 앞길을 지나서, 쌍둥이빌딩처럼 뾰족탑이 둘 나란히 서 있는 전동감리교회 앞쪽으로 나가는 길로 하여 만석동에 사는 동무녀석 집으로 찾아가곤 했습니다.

오늘은 화평동 큰길(화도진길)을 따라서 걷습니다. 길 건너편으로 ‘영희식당’과 ‘은혜슈퍼’가 마주하고 있습니다. ‘영희’와 ‘은혜’는 누구 이름일까요. 가게 아주머니 이름일까요? 가게집 아이 이름일까요?

거두어들이고 빨래집게만 대롱대롱 남아 있는 빨랫줄을 봅니다. 빨래널개를 봅니다. 골목집을 볼 때면 무엇보다도 이 빨래줄과 빨래널개에 눈이 갑니다. 집 안쪽에 들여놓아도 좋은 빨래이고, 햇볕에 말릴 수 있도록 옥상이나 마당에 내놓아도 좋은 빨래입니다.

옆지기가 발걸음을 멈추고 웃습니다. 뭐를 보고 웃는가 했더니, 어느 닭집 유리벽에 붙여놓은 그림 때문입니다. 닭집 임자가 손수 그린 그림 같습니다.

저마다 다 다른 모습과 생각으로 꾸리는 가게일 테니, 이렇게 손그림 알림판을 붙여놓아도 재미있겠지요.
▲ 손그림 알림판 저마다 다 다른 모습과 생각으로 꾸리는 가게일 테니, 이렇게 손그림 알림판을 붙여놓아도 재미있겠지요.
ⓒ 최종규

관련사진보기


화수동으로 접어듭니다. 지난날에는 모두 골목집이었으나 이제는 아파트가 우뚝우뚝 올라섰습니다. 앞으로도 이곳에 남아 있는 골목집을 죄다 쓸어내 없애고 아파트로만 우뚝우뚝 올려세우는 도시계획만 밀어붙일는지. 골목집 자리에 아파트를 올려세우면, 골목집 사람들이 그 아파트에 들어가서 살 수 있을는지. 골목집에서 살 때 달마다 나가는 세금과 아파트에서 살 때 달마다 나가는 관리비는 얼마나 벌어질는지.

지난날에는 연탄집이었음을 보여주는 간판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구멍가게 앞을 지납니다. 가게 앞 거님길에 잘게 썰어 놓은 무를 펼쳐 놓고 말립니다. 무말랭이 만드시려나 보네요.

화도진공원 앞. 화도진도서관에서 일하는 분한테 잠깐 인사를 하러 가 볼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하고, 화도진공원으로 들어가기로. 공원 앞에서 1000원짜리 햄빵 파는 분이 있어서 하나 사서 냠냠짭짭.

이 동네에 살던 어릴 적에도 그러했고 요즈음도 그러한데, 인천 중구와 동구 쪽에는 손바닥만한 쉼터 하나 없습니다. 동네사람이 느긋하게 쉬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도 나누고 모일 만한 자투리땅 하나 없습니다. 옹기종기 모여 사는 골목길이 동네 사람들한테 쉼터일 뿐, 동사무소나 구청이나 시청 테두리에서 마련해 준 쉼터는 한 군데도 없습니다. 오로지 이곳 하나, 화도진공원뿐.

그렇지만, 화도진공원은 역사가 있는 건물이라 공원으로 삼았을 뿐이지, 동네 사람들 쉼터로 마련해 놓은 공원이 아닙니다. 그래서 화도진공원으로는 ‘들어가는 문’이 곧 ‘나오는 문’입니다. 앉아서 쉴 자리도 마련해 놓지 않습니다.

그래도 젊은 넋들한테는 이 화도진공원은 그나마 있는 모임터이기 때문에, 제가 고등학교 다니던 그때, 돈 없고 시간 많고 할 일 없는 또래 동무들이 이곳에 우글우글 모이곤 했습니다. 수다도 떨고 담배도 피우고 이성친구도 만나던 자리였습니다.

곰곰이 더듬어 보니, 인천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젊은 넋들은, 밤 열 시나 열한 시까지 이어지는 ‘억지’ 자율학습에서 몰래 빠져나온다고 한들 갈 곳도 없고 무언가 할 만한 것도 없습니다. 차라리 학교에 박혀서 잠만 자거나 노는 게 더 나을 수 있습니다.

화도진공원에서 제 눈길을 가장 끈 것은 "들어가지마시오"라고 적어 놓은 알림푯말.
▲ 화도진공원에서 화도진공원에서 제 눈길을 가장 끈 것은 "들어가지마시오"라고 적어 놓은 알림푯말.
ⓒ 최종규

관련사진보기


화도진공원에 마지막으로 와 본 때가 언제였던가 헤아려 보니, 1994년 2월입니다. 열세 해 만에 발을 들였군요. 열세 해라는 세월, 그때 1994년 2월에는 2000년이 오겠느냐는 생각을 했는데, 조금만 있으면 2010년입니다. 그 열세 해라는 세월 동안, 화도진공원은 외로운 섬으로 바뀌었습니다. 빙 둘러서 아파트에 갇혀 버린 섬.

그리고 화도진공원에 깃든 옛 한옥들은 어설픈 페인트 세례를 받았습니다. 아무래도 ‘문화재 복원’이라는 이름이었겠지요. 비바람에 닳고 빛바래던 나무기둥과 흙벽은 온통 페인트 세례를 받고 겉보기로만 멀끔해 보입니다.

공원을 빠져나오는 길에 헤맵니다. 너무 오랜만에 와서 그렇기도 하지만, 이곳이 외통수였음을 깜빡 잊고 끝까지 가 보다가 다시 돌아섭니다. 이곳에서 인라인을 탈 아이들이 있을 텐데, 공원 길바닥은 우둘투둘한 돌을 깔았고, 비탈이 끝나는 곳에는 배수구를 마련해 놓아서 바퀴가 ‘잘 빠지도록’ 해 놓았습니다.

이제는 두산중공업으로 넘어가 버린 옛 대우중공업 공장 옆을 지납니다. 코를 찌르는 냄새가 납니다. 으윽. 쇠를 다루는 공장이군요. 숨을 쉬기 어렵습니다. 바로 코앞에 사람들 살림집이 빼곡하게 있고, 초등학교(만석초등학교)도 있는데. 이렇게 코를 찌를 뿐 아니라 뚫거나 녹이는 듯한 냄새가 풍기는 중공업 공장이 버젓이 있어도 좋은지.

아니, 사람들 살림집과 초등학교하고 멀찍이 떨어진 곳에 중공업 공장이 있어도 큰탈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곳에는 사람만 안 살 뿐, 풀이 있고 꽃이 있고 나무가 있습니다. 벌레가 있고 들짐승이 있고 날짐승이 있습니다. 물고기가 있고 물풀이 있습니다.

아파트와 빌라 사이에서 가까스로 옹크리고 있는 어느 골목집.
▲ 작은 골목집 아파트와 빌라 사이에서 가까스로 옹크리고 있는 어느 골목집.
ⓒ 최종규

관련사진보기


만석교회 옆을 지납니다. 중공업 공장을 마주하고 있는 교회. 이 교회를 다니는 분들은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길에 무엇을 느끼고 생각할까요.

이제 만석동 9번지. 내 고등학교 세 해 동안 내리 짝꿍동무로 지내던 녀석네 골목집. 9번지 ○통 ○반이 이 녀석 집이지. 지금도 그곳에 그대로 있겠지? 녀석은 올 2월에 집을 나와서 계산동으로 혼자살림 나왔다고 하지만, 어머님은 그 집에서 혼자 사신다고 했으니.

동무녀석 집을 마지막으로 찾아온 때는 2000년이었던가 2001년이었던가. 2002년에도 왔던가? 가물가물.

난간에 매어둔 자전거를 구경하고, 바로 옆에 엄청난 크기로 자리잡고 있는 동일방직 공장을 건너다 봅니다. 1970년대 밑바닥에서 솟구쳐오른 노동운동이 대단했던 그곳 동일방직. 동일방직 옆으로는 꽤 높은 아파트가 우줄우줄 솟아 있습니다. “저기에 언제 저런 아파트가 생겼지? 저 자리에도 집이 있었고 공장이 있었는데….”

갖가지 옷이 갖가지 빛깔로 집 앞을 꾸며 놓고 있습니다. 이 모습이 참 좋아서, 이 빨래 널린 집 앞에서 한동안 서서 넋 놓고 바라보았습니다.
▲ 골목집과 빨래 2 갖가지 옷이 갖가지 빛깔로 집 앞을 꾸며 놓고 있습니다. 이 모습이 참 좋아서, 이 빨래 널린 집 앞에서 한동안 서서 넋 놓고 바라보았습니다.
ⓒ 최종규

관련사진보기


집 앞 울타리까지 빨래를 잔뜩 넣어놓은 집 앞을 지납니다. 예나 이제나 함석으로 된 지붕이 많이 보이고, 예전에 찾아오던 때나 이제나 집 앞 빨랫줄에는 빨래가 그득하고 크고 작은 꽃 그릇은 집 둘레를 채웁니다.

헛. 그런데 동무녀석 집으로 들어서는 계단이 막혔습니다. 어인 일이지? 예전에는 난간 잡고 좁은 계단 타고 올라가야 했는데. 이상하다, 이상하네, 생각하며 막힌 곳 옆으로 살짝 뚫린 계단을 타고 오릅니다. 그리고 안쪽 골목으로.

제 생각이 틀림없다면, 계단을 타고 골목으로 접어들어서 첫 번째 왼쪽 안 오른편 집이 동무녀석 집.

지금 시간에는 어머님이 바깥에 일 나가시고 안 계실지 모르지만, 늘 밤에만 찾아왔기에 설마 하는 마음으로 찾아와 보았습니다. 집 생김새가 조금 낯섭니다. 어, 이 집이 틀림없이 맞을 텐데. 음, 모르겠네(나중에 동무녀석한테 전화해서 물어보니 이 집이 맞다고 하더군요. 동무녀석네 집도 세월 때가 더 묻으면서 좀 바뀌었구나 싶습니다).

다음에 일요일쯤, 또는 저녁나절에 맞추어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가기 앞서 전화를 한 통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천천히 걸으며 만석동 9번지를 빠져나옵니다. 이곳에 올 때면 늘 동무녀석 집만 갔기에 다른 골목으로는 안 지나다녀 보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골목으로 슬슬 두리번두리번 살피며 걷습니다.

우쭐우쭐 올라선 ‘만석비치타운’이라는 높은 아파트를 고개올려 바라보고, 계단 난간을 따라 이어 놓은 빨랫줄도 살며시 쓰다듬어 보고, 골목길 한켠에 그대로 남아 있는 미용실 간판도 바라봅니다.

누군가는 말합니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가 '만석동'이라고. 그러나 저는 다르게 느낍니다. 이 동네사람들은 누가 말하듯이 '돈만 밝히는 사람'이 아니기에, 이 동네사람들이 가난할지 모르나, 이 동네를 가난하다고 말하는 사람보다 즐겁고 오붓하게 살아왔다고.
▲ 만석동 누군가는 말합니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가 '만석동'이라고. 그러나 저는 다르게 느낍니다. 이 동네사람들은 누가 말하듯이 '돈만 밝히는 사람'이 아니기에, 이 동네사람들이 가난할지 모르나, 이 동네를 가난하다고 말하는 사람보다 즐겁고 오붓하게 살아왔다고.
ⓒ 최종규

관련사진보기


그렇게 나오는 길에, 지붕 위에서 노니는 고양이 둘을 봅니다. 이런 골목집이니까 고양이도 놀 수 있겠지요. 아파트만 있는 곳에서는 고양이들이 지붕 타기를 할 수 없겠지요.

두 마리 고양이뿐 아니라 더 많은 고양이가 이 골목집 지붕을 타며 놀겠지요. 아니, 살아가겠지요.
▲ 고양이 2 두 마리 고양이뿐 아니라 더 많은 고양이가 이 골목집 지붕을 타며 놀겠지요. 아니, 살아가겠지요.
ⓒ 최종규

관련사진보기


담벼락에 분필로 그려 놓은 낙서를 봅니다. 동네 꼬마가 그렸을 테지요. 옆지기가 발이 많이 아프다고 합니다. 가만히 보니 신발 뒷굽이 한쪽으로 많이 갈렸습니다. 이런.

거의 부축을 하듯이 팔짱을 끼고 아주 천천히 걷습니다. 바로 코앞이 만석부두입니다만, 오늘은 거기까지 갈 수 없고, 동일방직 앞으로도 둘러볼 수 없겠네요.

오던 길을 되짚습니다. 만석동 9번지 끝자락에서 울타리에까지 빨래를 널고 있던 집 앞을 지납니다. 아저씨가 나와서 빨래를 걷습니다. 오른손으로 걷고 왼팔에 하나하나 걸칩니다.

“따숩지요?” 아저씨가 우리를 보며 웃으면서 말을 겁니다. “네?” “겨울인데 날씨가 참 따뜻하다구요.” “아, 그렇지요.” ‘따숩지요’라는 말마디를 처음에는 못 알아들었는데, 난닝구 바람으로 빨래를 걷던 아저씨 모습을 보고서야 무슨 말씀을 하는가 알았습니다.

공장이 있던 자리에 새로 올라선 아파트를 봅니다. 이 아파트는 동과 동 사이가 대단히 좁습니다. 30층 안팎 되는 아파트인데, 건너 동 집안이 훤히 들여다보일 만큼 가깝습니다. 좁은 땅에 돈벌이 되도록 집을 올리자니 이렇게 되었을 테지요. 말 그대로 자그마한 ‘미니 주유소’를 지나니 화평동 냉면 골목 들머리. 거짓말 않고 이 동네에서 오래된 ㅅ냉면집에 들어갑니다. 옆지기는 따숩게 덥힌 찬 국수를 먹고, 저는 만두를 먹습니다.

가게 간판처럼, 참 작은 주유소입니다.
▲ 작은 주유소 가게 간판처럼, 참 작은 주유소입니다.
ⓒ 최종규

관련사진보기


(지난 12월 24일, 인천 동구 만석동 9번지 골목길을 거닐었습니다. 이곳은 제 오래된 동무녀석이 사는 동네인데, 예전부터 지금까지 ‘전국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라는 나쁜이름이 찍혀 있습니다. 통계수치와 월평균수입으로 치자면, ‘전국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라는 딱지가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왜 우리들 골목집이나 동네 문화가 ‘돈 높고 낮음’으로 평가받아야 할까요.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터전, 있는 그대로 서로 나누고 함께하는 문화로 ‘그 동네가 살 만한지 살 만하지 못한지’를 헤아려야 알맞지 않을까요.)

덧붙이는 글 | 지금 인천시는, 중ㆍ동구 둘레를 놓고, 또 남구를 비롯한 오래된 동네를 놓고 ‘도심정화사업’을 벌여 골목집과 재래시장을 몰아내고, 동구 배다리 둘레는 ‘너비 50미터짜리 산업도로(길이 2.41km)’를 골목집이 몰려 있는 동네 한복판에 놓으려는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산업도로를 뚫은 뒤에는 골목집을 모두 쓸어내고 아파트와 쇼핑센터를 올려세운다고 합니다.

대단한 이름이나 많은 돈벌이나 큰 힘 하나 없이 조용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동네가 이곳 인천 중ㆍ동구, 또 남구입니다. 경제개발과 경제성장하고는 조금도 안 어울릴 수 있겠지만, 온 삶을 바쳐 땀흘려 일하고 조그마한 몸뚱아리 드러누울 작은 집 한 칸이나 방 한 칸 마련하여 살아가는 사람들한테도 ‘내 집에서, 내 땅에서, 조용하면서도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다가 숨을 거두어 흙으로 돌아갈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라님 정책을 한 번도 거스르지 않고 허리 구부정할 때까지 살아온 사람들 숨결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배다리 골목길 이야기]를 띄웁니다. 이 땅에는 사람이 살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고, 골목길에는 낮은자리 사람들, 그러니까 서민들 숨결이 녹아난 보금자리가 있음을 들려주고 싶고, 돈으로는 헤일 수 없고 물질로는 채울 수 없는 눈물과 웃음이 서린 우리 손때 묻은 길과 집이 있음을 말하고 싶습니다.



태그:#골목길, #골목집, #인천, #만석동, #배다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