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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와 6조직계제(六曹直啓制)

 

핵심은 이것입니다. 의정부서사제냐, 6조직계제냐는 것입니다. 의정부서사제는 쉽게 말해 '국정을 삼정승 중심의 의정부에서 논의하면서 안건 처결 권한도 쥐여주는 제도'입니다. 왕에게는 사후 보고 체계만 갖추는 제도죠. 실질적인 권력은 영의정·좌의정·우의정 등, 삼정승에게 있습니다.

 

반면, 6조직계제는 6조라는 부처들이 의정부의 논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왕에게 직보 체제를 갖추며 집행하는 체제를 말합니다. 조선왕조 초기의 피비린내나는 권력투쟁은 '의정부서사제'와 '6조직계제'의 갈림길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태종 이방원이나 수양대군과 같이 섬뜩한 마키아벨리스트의 기질까지 엿보였던 왕권주의자는 당연히 '6조직계제'를 주장했지만, 조선왕조의 실질적인 설계자인 삼봉 정도전이나 단종 체제의 실질적인 축이던 절재 김종서는 '의정부서사제'를 주장합니다. 단순한 권력투쟁과도 같았지만,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왕권주의자와 신권주의자의 노선 투쟁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보면, 절재 김종서는 문종의 급서라는 급작스러운 상황에서, 삼봉 정도전이 꿈꾸던 재상 중심의 정치체제를 이룩하고 실천한 그 후예라고 할만 합니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수양대군의 야심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마키아벨리스트의 결단이 그야말로 어떤 것인지, 쉽게 파악하지 못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18년 숙청 작업'을 뒤집은 '세종'

 

 

"창업 후 채 십 년도 되지 않아 보위에 오른 그에게 일각일각은 참담한 난세였으며, 시시때때로 궁궐은 사지였고 정글이었다. 그러므로 재상들을 통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정치를 추구하는 '의정부 서사제'의 안정적 구현을 기다릴 여유가 처음부터 그에게는 없었다.

 

하나에서 열까지 행정부서 곳곳의 문제를 자신의 힘 아래 확고하게 두어 그 어떤 반역도 허락지 않으려는 강력한 왕권의 구현을 목표로 하는 '육조 직계제'를 채택하는 것은 창업군주 태종에게는 선택이 아니라 시대의 대세이며 숙명이었을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를 몰아내고, 형제를 죽였으며, 처남도 도륙시킨 태종 이방원. 그렇기 때문에 그는 마키아벨리스트라는 평가도 듣습니다. 하지만 태종 이방원 스스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변명을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왕권 강화의 핵심은 '거치적거리는 존재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미 삼봉 정도전이라는 최대의 적수와 한바탕 전쟁을 벌여 간신히 승리한 태종 이방원으로서는, '삼봉 정도전'이라는 이름이 반면교사의 교훈이 됐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남이든 누구든 가리지 않고 방해가 될만한 자는 철저하게 몰락시키는 냉혈한 기질이 유감없이 발휘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태종의 최대 치적은 세종"이라는 이야기, 그런 일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삼봉 정도전'으로부터 비롯된 반면교사의 효과로 인해 아들의 정치적 행보를 방해할만한 외척과 공신들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군사권을 장악한 상왕의 자격으로 사돈의 집안까지 도륙을 냈으니, 병약한 아들을 위해 '이미 피로 얼룩진' 아버지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정치적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듯, 태종 이방원은 스스로 악명을 감수하며 '6조직계제'를 바탕으로 한 강력한 왕권체제를 유산으로 물려줍니다. 이 점에서, 태종 이방원이 훗날의 수양대군보다 한 수 위입니다. 수양대군은 조카와 형제는 죽일 수 있었지만, 공신들을 쳐버릴 능력은 갖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세종은 아버지의 유산을 뒤집어버립니다. 일단 병약했기 때문입니다. 의정부서사제가 부활하며, 황희와 맹사성을 비롯한 정승들의 권력이 부활합니다. 신권이 부활한 환경이었기 때문에, 왕이 직접 주도하는 '훈민정음 창제'에도 보수주의자들의 반대도 조직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강하게 밀고 나갈 프로젝트가 있다면, 아버지의 길을 유지하는 게 좋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선비를 사랑한다'는 천성을 가진 세종으로서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선비들을 위해 '수령금지고소법'이라는 악법을 만들어 황희와 함께 유지에 만전을 기울였으며, 신문고 제도도 폐지해 버립니다.

 

하지만 세종 사후에 의도치 않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장남 문종은 너무 병약해 재위 2년도 못 버티고 아버지를 따랐으며, 아무것도 모르고 얼떨결에 왕위에 오른 단종이 남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절재 김종서라는 문무의 재능을 겸비한 고명대신의 존재가 있습니다. 세종 특유의 '선비 사랑'과 일가붙이의 병약함이, 되레 태종 이방원의 꿈을 무너뜨리고 삼봉 정도전의 꿈을 3년간 부활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제2의 태종 이방원' 수양대군이 할아버지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러다가 여기에서 다시 한번 반전. 세조 자신은 물론 아들과 손자까지 병약했고 태종 이방원과는 달리 공신에게는 칼을 들이대지 못하면서 '의정부서사제'를 넘어선 '원상제'가 도입된 것입니다.

 

'의정부서사제'와 '6조직계제'의 정치적 함의는, 이렇듯 수십년에 걸친 피비린내를 양산합니다. 그러다가 세조의 '원상제' 선택을 계기로, 수백년이 지나 꼬투리를 잡아서 집권당을 주기적으로 교체시킨 19대 숙종의 재위기간을 제외하고는 조선왕조는 '신권 전성시대'를 열어갑니다.

 

<대왕 세종>이 묘사할 '세종'은?

 

 

"왕실에서 왕자로 태어나, 삼자(三子)임에도 본의 아니게 세자가 되고 또한 군왕이 되어서 그는 외롭다. 아니 어쩌면 이런 파행을 거쳐 왕이 되지 않았다 해도 군왕이라는 자들이 원래 다 외롭다. 그의 결정이 많은 이의 행불행을 좌우하고, 때로는 그의 결정이 전쟁을 만들기도 하여 하 많은 사람들의 목숨마저 좌지우지 하니, 그 결정을 쉼 없이 해야 하는 자에게 외로움은 어쩌면 숙명이다.

 

추운 겨울날, 삭풍에 사정없이 흔들리는 용포를 수습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묵연히 서 있는 뒷모습, 그것이 그의 이미지다.

 

가장 아끼는 신하를 정적들로부터 보호하지 못했을 때, 하여 그의 죽음을 목도해야 했을 때 종당에는 아내마저 폐서인을 하여 내쳐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원치 않은 여인네를 품어야 했을 때, 전쟁을 하자 한 신하들을 설득하여 화친을 했으나 그 결정으로 인해 수많은 백성들의 목숨을 날려야 했을 때, 대국에게 실리를 위해 자존심 버리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을 때 그는 바로 저 뒷모습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어깨에 얼마나 많은 한숨과 눈물이 배어 있었을까."

 

KBS1 사극 <대왕 세종>의 홈페이지에 소개된 '세종'에 대한 소개입니다. 이 소개에서 '세종'의 모든 것이 드러납니다.

 

'본의 아니게 군왕이 됐고', '아버지의 옥상옥 군림기간'이 4년이나 지속되면서, 세종은 즉위 당시부터 강력한 왕권을 제시할 상황이 아니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이 본인 특유의 성격과 어우러져 '의정부서사제'로부터 비롯되는 '신권의 시대'를 열어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려던 간에 '많은 한숨과 눈물이 배어 있'을 수도 있으며, 아버지가 처가를 도륙내고 신하들이 아내를 쫓아낼 것을 권유해도 큰 목소리를 내세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드라마는 이에 대해 세종의 고뇌를 바탕으로 그리겠지만, 실질적으로는 정치적 상황과 세종 특유의 천성이 잘 맞물린 결과이기 때문에, 세종 본인은 할 말이 없는 입장이라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세종 중심의 정치적 상황 묘사나 '인간 세종'에 대한 묘사는 큰 기대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왕'이라는 칭호와 함께 지폐의 주인공으로 대중화되면서, 세종은 실질적으로 신격화돼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령고소금지법'의 장본인이라거나 '신문고 폐지'를 이끌었다는 정치적 일정은 크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제 경우라면, 오히려 그런 부분도 확실하게 묘사했을지도 모릅니다.

 

<대왕 세종>은 어린 충녕대군 시절부터 묘사하면서 '태종의 정치'부터 부각시킵니다. 태종과 양녕대군의 갈등도 크게 부각될 것입니다. 이속에서 우리가 꾸준히 지켜볼만한 부분은 '의정부서사제'와 '6조직계제'가 어떤 변화를 맞이하며 조선왕조 초기의 변란을 유도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을 지켜보면, 우리 정치 상황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명박 당선자의 '작고 강한 청와대'

 

이명박 당선자는 '작고 강한 청와대'를 지향하면서, 한때 '책임총리제'까지 진행했던 참여정부와는 달리 총리의 권한을 약화시킬 것이 예상되고 있습니다. 정치적 비중이 작거나 정치 상황에 익숙치 못한 학자 출신들이 총리 후보로 거론되는 것도 감안해야 합니다. 조선왕조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이명박 당선자는 '6조직계제'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간에서 나도는 '박근혜 총리 임명 가능성'은 실현 가능성이 떨어진다고 보고 있습니다. 일단, 이명박 당선자를 끝까지 긴장시켰던 정치적 라이벌이자 적수가 총리가 될 가능성이 떨어집니다. 오히려, 태종 이방원이 삼봉 정도전이나 넷째 형 회안대군 방간을 철저하게 몰아냈고 피도 눈물도 없는 숙청작업을 벌였던 것을 기억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합니다.

 

게다가, 박근혜 전 대표도 '국정 운영 협조'와 '공천 문제'라는 이질적인 문제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이명박 당선자의 '작고 강한 청와대' 속에서, 권한이 약화된 총리 직을 수락한다는 것도 지극히 결정이 어려운 일입니다. 박근혜 전 대표가 총리직을 수락한다면, 내심 '의정부서사제'를 원할지도 모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일례로, 이해찬 전 총리 재임 당시의 '책임총리제'가 보수언론의 비판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이명박 당선자의 국정운영 방향이 잘 드러내는 대목입니다. 인수위 활동이 여전한 가운데 총리직 임명이 논란이 되는 상황, 그속에서 '6조직계제'와 '의정부서사제'의 갈림길을 그릴 <대왕 세종>은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미디어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명박#인수위#박근혜#대왕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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