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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과 딸
아들과 딸 ⓒ 오창경

"우리 집으로 가자. 미역국도 끓여 놨다. 윤 서방은 어머니 모셔다 드리고 오게. 그럼 사부인, 안녕히 가십시오. 에미는 걱정하지 마세요. 몸조리 잘 해서 보낼테니까요."

둘째 아이를 낳고 병원에서 퇴원하던 날, 병원 앞에서 흔히 있을 법한 풍경 속에 내가 있었다. 그 풍경 속의 주인공은 나였지만, 연출자는 친정 엄마가 아니라 친정 아버지였다.

나는 친정 엄마의 비호를 받지 못하고 아이를 낳아서 키워야 하는 불행한 산모였다. 시집도 못간 스물일곱살에 엄마를 먼저 하늘 나라로 보낸 자식이었다.

그래도 첫 아이를 낳았을 때는 한 동네에 사는 시어머님이 산후조리를 해주실 수 있었고 맘 편히 누울 수 있는 우리집이 있어서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그러나 불과 2년 사이에 큰 아이와 두 살 터울로 둘째를 낳았을 때는 우리가 처한 상황은 180도 달라져 있었다.

납치하듯 친정으로 데리고 가신 아버지

중풍기가 있던 시아버님이 자리보전을 하며 대소변까지 받아내는 상황으로 병세가 악화되었던 터라 일흔살 노구의 시어머님은 오히려 병구완을 받아야 할 정도로 심신이 지쳐있는 상태였다.

더구나 남편이 의욕적으로 새로 시작한 사업 때문에 우리의 보금자리는 시골로 옮긴 상황. 따라서 출산은 도시의 큰 병원에서 해놓고 오도가도 못할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렇다고 홀로 되신 친정아버지와 대학교에 다니는 남동생만 사는 친정집으로 산후조리를 하러 가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은 남편과 함께 고민한 끝에 팔리지 않아서 비어있던 우리 집으로 다시 들어가 산후조리를 하는 한 달만 지내기로 하고 퇴원하는 길이었다.

둘째를 낳던 날 퇴근길에 병원에 들러 무심하게 퇴원 날짜를 묻던 친정아버지의 속뜻을 나와 남편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예상치 못했던 친정 아버지의 등장에 남편과 시어머님의 넋이 나가 있는 동안 아버지는 나를 납치를 하듯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빈집 같은 너희 집으로 가느니 아빠라도 있는 집이 낫지. 요즘 세상에 산후조리라고 별 것 있겠냐? 기저귀야 일회용 쓰면 되고 빨래는 세탁기가 알아서 하니까 걱정하지 마라. 애비도 이제 홀아비 생활에 인이 박혀서 못하는 요리도 없다. 설거지 정도는 동근이도 잘 하니까 네가 손에 물댈 일도 없을 거다."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 안에서 친정집으로 가는 내내 내 눈에서 흘러 내린 눈물은 이제 태어난 지 일주일 밖에 안 된 딸아이의 볼을 얼마나 적셨는지….

친정 엄마를 복제한 것 같은 세 남자의 산바라지

  이 아이를 낳았을 때 친정 아버지로부터 산후조리를 받았다. 벌써 9살이 되었다.
이 아이를 낳았을 때 친정 아버지로부터 산후조리를 받았다. 벌써 9살이 되었다. ⓒ 오창경

학창 시절을 보낸, 먼저 간 엄마의 체취가 남아 있는 친정 집으로 나는 돌아왔다. 친정 아버지의 산바라지를 받으러 갓난아이를 안고 돌아왔다. 어버지는 빈 방으로 남아 있던 내 방을 말끔히 청소해놓고 보일러 돌려서 이부자리까지 깔아 놓으시고는 산모가 된 큰 딸을 데리러 오신 거였다.

"우리 울지 말자. 아빠는 엄마가 너희 사남매 남겨 놓고 그렇게 허망하게 갔을 때는 오히려 안 울었다. 아빠가 정말 울고 싶었을 때는 네가 서른 살이 넘도록 시집 못 가고 있을 때였다. 이제 너까지 시집 보내고 이렇게 아들 낳고 딸 낳고 했으니 아빠는 정말 울 일이 없다."

울어서 퉁퉁 부은 눈에서 하염없이 떨어지는 눈물 섞인 미역국을 울음과 함께 삼키며 나는 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친정 엄마가 없는 설움과 홀로 되신 아버지 보기가 안쓰러워서 울면서 궁여지책으로 친정에서 시작한 나의 산후조리는 점차 친정 엄마를 복제한 것 같은 세 남자의 비호를 받게 되었다.

아버지는 새벽에 일어나 전기 밥솥에 밥을 해서 식탁에 밥상을 차려 놓으시고는 나를 깨운 뒤 아침밥을 함께 먹고 출근을 하셨다. 설거지와 집안 청소는 늦게 일어나는 막내 남동생이 하고 학교에 갔다. 그리고 나면 남편이 시어머니가 끓여준 미역국이며 밑반찬을 싣고 와서 딸아이 목욕을 시켜주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나의 산후조리로 인해 안주인이 없는 친정집은 오히려 군대보다 더 질서 정연하고 역할 분담이 뚜렷해졌다. 두 부자(父子)만 살던 집에 아이를 낳은 딸이 돌아오자 모처럼 활기가 도는 것이었다.

빈집에 들어오기 싫어서 밖으로 돌던 아버지의 퇴근 시간이 빨라졌을 뿐만 아니라 청춘 사업에 바쁜 남동생까지도 큰누나 손에 물 안 대게 한다면서 일찍 들어오는 것이었다. 씨암탉 해줄 장모도 없는 처갓집에 매일 드나들기 미안했던 남편은 알아서 치울 것 치워주고 손 볼 것은 없는지 살펴주며 시댁에서 먹거리들을 공수해와서 두 부자가 끊여 먹던 초라한 밥상을 진수성찬으로 차려주었다. 

친정 엄마가 없는 친정집, 더 이상 서럽지 않았다

"네 엄마처럼 잘 울면 안 봐줄건데, 넌 안 울어서 이 할애비가 안아준다. 웃어봐. 까꿍!"

퇴근하고 오신 아버지는 딸아이부터 들여다보고 안아주셨다. 아이를 낳는 순간부터 눈물이 마를 날이 없던 엄마 때문에 춘삼월 꽃바람에도 볼이 터야했던 딸아이는 얼마나 순한지 칭얼대는 법도 없이 잠도 잘 자고 모유도 잘 먹어서 친정 엄마가 없는 친정집에서 몸조리를 해야 하는 내 처지를 더 이상 서럽게 하지 않았다.

"누나, 낮에 심심할텐데 비디오라도 빌려다 줄까? 책을 빌려다 줄까? 말만 해."

산후조리를 하는 동안 하루에 비디오 한 편씩 보고 베스트셀러까지 챙겨 읽은 산모는 나 밖에 없을 것이다. 따뜻하고 익숙한 친정 엄마표 산후조리 대신 투박하지만 정겨운 친정 아버지표 산후조리를 받은 산모는 이 세상에 나 밖에 없을 것이다.

덕분에 아이를 낳은 지 10년이 되어가는 지금껏 산후조리를 제대로 못해서 오는 질병으로 시달리지 않고 억센 시골살이를 알콩달콩 잘 해내고 있다. 겉으로는 항상 씩씩한 척 하시는 친정 아버지께서는 이 달에 홀로 칠순을 맞으신다.


#산후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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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의 시골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조근조근하게 낮은 목소리로 재미있는 시골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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