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간 방송된 SBS의 대하 드라마들을 보고 있노라면 유감스럽게도 ‘용두사미’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르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서동요>나 <토지> 등 비교적 일관된 완성도를 지켜나간 프로그램도 있었지만, 지난 몇 년간 <여인천하>,<야인시대>,<왕의 여자>를 비롯하여 지난해 종영한 <연개소문>에 이르기까지 초반의 높은 인기와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실망스럽게 흐지부지된 작품들도 결코 적지 않다. 최근에 SBS의 대하드라마 징크스를 이어가고 있는 작품은 바로 월화드라마 <왕과 나>다. <여인천하>,<왕의 여자>등을 연출하며 사극의 대가로 꼽히는 백전노장 김재형 PD의 연출력과 주민수, 박보영, 유승호 등 아역 연기자들의 눈부신 호연, 조선 시대 내시들을 강력한 정치집단이자 궁중 전문직으로 재조명해 낸 상상력으로 이 작품은 방영 초반 호평을 얻었다. 방송 3회 만에 시청률 20%를 돌파하는 인기로 월화드라마의 새 강자로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방영 중반부를 넘어서며 잇단 악재 속에 휘말린 가운데 뚜렷한 하락세를 드러내고 있다. 후발주자이자 동시간대 경쟁작인 이병훈 PD의 <이산>(MBC)과 초반에는 팽팽하게 경쟁했으나 지금은 시청률에서 10% 이상 뒤처졌다. 최근 <왕과 나>는 15%대 이하에서 정체 현상을 보이고 있다. 시청률보다 더 큰 문제는 당초 드라마의 기획의도가 갈수록 희미해지는 가운데, 극적 완성도가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왕과 나>가 초반 팬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사극에서 조연이나 감초에 지나지 않았던 내시들의 시선으로 풀어낸 정치사극이라는 점과 그간 역사에서 연산군 위주로 다루어져왔던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를 성종과 내시 김처선을 둘러싼 삼각관계의 멜로드라마 형식으로 접근한 신선한 상상력에 있었다. 그러나 중반부에 접어들며 드라마는 이야기의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드라마는 최근 한달 가까이 성종과 어을우동의 스캔들을 둘러싼 갈등을 주로 다루고 있지만, 중심 스토리가 필연성과 흡인력을 지니지 못한 채 겉돌고 있다. 처선(오만석)을 둘러싼 출생의 비밀, 처선의 짝사랑과 중전 소화(구혜선)의 미묘한 정서적 교감, 설영(전혜빈)의 음모와 조치겸(전광렬)과의 갈등, ‘되살이 내시’ 자치를 둘러싼 갈등 등, 궁궐 내외에서 벌어지는 각종 에피소드들이 전체적인 흐름에 유기적으로 엮이지 못하고 물과 기름처럼 나뉘면서 각기 다른 단편들을 한 작품에서 보고 있는 느낌이다. 한창 긴박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는 시점에 생뚱맞게 다른 인물의 이야기가 튀어나오면서 흐름이 깨지기 일쑤고, 정작 중요한 장면은 급박한 이야기 전개에 맞춰 얼렁뚱땅 넘어가기 일쑤다. 방영 초반부의 드라마가 적절한 복선과 인물들의 갈등관계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키며 긴장감을 조성했던 것과 달리, 최근 방송분은 배우들의 연기나 장면 연출이 시간에 쫓겨 부랴부랴 찍은 듯한 느낌이 역력하다. 갑작스러운 등장과 퇴장을 반복하고 있는 설영의 알 수 없는 행동이나, 정한수에게 노 내시(신구)를 독살한 사실을 고백하는 중요한 장면이 너무 간단하게 처리된 것, 처선의 생모 오씨가 조치겸의 부인에게 구타를 당한 충격으로 잃어버린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는 어이없는 설정 등이 대표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왕과 나>의 방황은 드라마의 본론이라 할 수 있는 성인 연기자들의 시대로 넘어오면서 시작됐다. 첫 대하사극 주연을 맡은 오만석의 뛰어난 연기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가 연기하는 김처선은 주인공임에도 이야기 전개에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관찰자의 수준에 머물고 있다. 사극 경험이 부족한 고주원과 구혜선, 김사랑, 전혜빈 같은 젊은 배우들의 어색한 부조화와 많은 등장인물들이 산발적으로 등장하지만 어정쩡한 캐릭터 속에서 인수대비(전인화)나 정한수(안재모) 같은 인물들의 비중과 역할은 여전히 애매하기만 하다. 내시들의 이야기가 어느샌가 사라지고 사실상 여인네들의 궁중암투와 왕의 ‘부적절한 스캔들’에만 매몰된 듯한 이야기는 ‘왕과 나’가 아닌, ‘여인천하2’가 아니냐는 불만을 자아내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최근 배우 유동근이 스태프를 폭행하고 김재형 PD가 건강을 이유로 중도에 하차하는 악재가 이어졌다. 이 모든 사태에는 ‘쪽대본’ 혹은 ‘생방송 촬영’(?)으로 대표되는 한국 드라마 제작구조의 고질적인 병폐가 배후에 있다. <왕과 나>는 급조된 대본과 열악한 제작구조속에서 드라마의 필연적인 완성도 저하를 피해갈 수 없었고, 방영 중반에는 다시 연장방송을 염두에 둔 듯, 불필요한 에피소드들의 남발로 인한 늘어지는 극적 전개를 감당하지 못하여 후반부로 갈수록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막대한 제작비가 요구되는 대하사극은 스타 캐스팅이나 소재 자체보다는 긴 호흡의 드라마를 일관되게 지탱해 나갈 만한 노하우가 가장 큰 변수로 꼽힌다. <왕과 나>가 당초 예정된 50부작에서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려면 이제 약 10회 분량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게으른 극 전개에서 이야기가 허우적 대는 동안, 중전의 폐위와 연산군 시대로 이어지는 굵직한 이야기들을 다루는 데도 숨이 가쁘다. 대하드라마에서 어떤 이야기를 소재로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마지막까지 품질을 지켜나갈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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