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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24일 화요일, 날씨 짙은 구름, 순례 32일째.
베가 데 발카르세에서 폰프리아까지, 23km.
오전 7시 40분 출발, 오후 5시 도착.


새벽같이 일어나 어제 사둔 비닐봉지를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불빛 하나 없는 새카만 식당에는 몇 명의 순례자들이 짐을 꾸리며 길을 준비하고 있다. 어제 식당에 남아 있던 쌀을 보고 반드시 아침에 밥을 해 먹고 떠나겠다고 작정을 했다. 가스 스토브에 불을 당겨야 할 텐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여기저기서 도움을 받아가며 손 랜턴을 입에 물고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나서야 미역국 한 사발과 볶음밥을 완성할 수 있었다. 급하게 밥을 입에 퍼 넣으며 뿌옇게 밝아오는 새벽녘을 맞았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지체했다.

숙소를 나와 걷기 시작했다. 고도표에서 확인한 대로 낮은 오르막으로 시작되는 길은 짙푸른 신록이 싱그럽다. 마치 그림 속을 헤매듯 걸어 닿은 ‘라 파바(La Faba)’, 길 오른편으로 작은 냇가가 참 이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신발도 양말도 전부 벗어놓고 풍덩 뛰어들고 싶었지만 손이 바르르 떨리는 추위 속에서 감히 해낼 수가 없었다. 사방을 둘러보며 ‘대체 여긴 어느 비밀의 숲인가’, 무엇에 홀린 듯 걸었다. 길 한 쪽에 버려진 세탁기 속에서 무성하게 자란 풀들이 대견하다. 그런데, 왜 세탁기가 길가에 버려져 있지?!

눈이 시릴 정도의 절경에 감탄과 찬사도 곧 멎어, 나는 마치 바람처럼 지나친다. 앉아서 쉬고 싶어, 좀 더 찬찬히 예쁘고 좋은 것들을 보고 싶어, 사진도 찍고 싶어, 그렇지만 마음 한 쪽에서 나를 부채질하는 것은 ‘당장 뭔가를 끝내야 해’, 열심히 그 명령에 따라 발을 놀린다. 정신없이 산을 기어오른다. 급경사로 이어지는 거친 돌길에 숨이 턱턱 막히고 땀방울이 바닥에 툭툭 떨어진다. 헛디딘 발걸음에 미끄덩하고 중심을 잃어 등골이 서늘하다.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올려다보았다. 빛이 닿을 여지도 없이 빼곡한 숲길, 대체 끝이 있기나 한 건지, 지나치는 마을마다 폐가에 사람들이 사는지도 의심스러워져 결국 ‘내가 지금 맞게 걷고 있는지’ 자체를 의심하게 되는 순간,

대체 끝이란 게 있는 걸까, 주저앉고 싶다. 그만두고 싶어. 밤이면 침대벌레 상처의 간지러움에 잠들지 못하는 것도, 매일 등짐을 지고 발을 끌듯 걷는 것도, 누가 날 해칠지도 모른다는 불안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것도, 모두가 지끈거리기만 해. 여기가 맞긴 맞는 거야? 대체 누가 날 떠민 거야?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그러나 도리가 없었다. 고개를 가로젓고 깊은 숨을 들이마신다. 그리고 발걸음을 다시 내딛는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곧 생각이 걷힌다. 길이 힘들어지면 멀리 보는 것보단 차라리 시야를 좁혀서, 당장 지금 걸을 길만 따라가는 것이 차라리 견디기 쉬웠다. 곧 새소리(와 파리소리), 길 앞을 다다다 달음질치며 함께 걷는 양떼들의 목에서 딸랑거리는 종소리, 바람소리, 햇빛, 정말 오래간만의 따스한 햇빛을 느낄 수 있었다.

오 세브레이로 가는 길 들판에 우의를 곱게 펴고 점심먹는 시간
▲ 오 세브레이로 가는 길 들판에 우의를 곱게 펴고 점심먹는 시간
ⓒ J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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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길은 산등성이 능선에 접어들어 탁 트인 풍경과 두둥실 뜬 구름이 아름답다. 볕 잘 드는 길 언저리 얕은 언덕에 판초우의를 펼쳐놓고 누워버렸다. 몸을 길게 늘이고 갸르릉 거리며 따사로움을 만끽한다. 문득 가방 속에 넣어놓은 먹을거리들이 떠올랐다. 그 가운데 어제 호르케가 건네준 초콜릿 푸딩이 눈에 띄었다. 마지막까지 그것을 먹지 않겠다고 뒤로 제쳐두었다.

‘어떤 맛인지는 궁금한데…’, 결국 껍데기를 벗기고 한 입을 떠먹었다. ‘으악, 달아. 역시 달아!’하며 몸서리를 치는 것도 잠시, 금세 작은 컵 하나를 싹싹 비우고 껍데기 언저리를 핥으며 아쉬워했다. 역시 내게는 위험한 달콤함이었다.

부른 배를 깔고 엎드린 채 일기를 쓰다 불현듯 붉은 판초 위로 새카만 깨들이 달려드는 것에 기겁을 하고 ‘꽥!’ 소리를 질렀다. 몇 발자국 위에 자리를 펴고 부산스럽게 점심을 먹던 독일 할머니들도 ‘꽥!’, 따라하며 웃는 모습이 왜 이렇게 미운지, ‘할머니들, 제가 오늘 좀 피곤해서 같이 실실 쪼갤 배알이 없어요. 빨리 좀 가 주세요. 혼자 있고 싶단 말이예요’, 차마 말하지 못하고 그저 열심히 신호를 보낼 뿐이었다. 그러나 할머니들이 금세 짐을 싸들고 떠나자 어쩐지 나도 더 이상 그 곳에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덩달아 일어나고 말았다.

오늘 산길 가운데에서 지금까지 20일을 걸어왔던 카스티야 레온 지역을 벗어나 드디어 마지막 지역인 ‘갈리시아(Galicia)'에 닿게 된다. 거대한 비석에 순례를 상징하는 십자가를 가운데 두고 두 지역의 문장이 박혀 있다. 고개를 홱 돌려 지나온 땅을 쳐다보며 ‘지긋지긋했던 카스티야 레온 안녕!’ 하고 인사를 던지고 다시 걸었다. 시원섭섭한 마음이 그림자처럼 눈앞에 드리워졌다.

카스티야 레온과 갈리시아 사이에서 순례의 마지막 땅 갈리시아를 알려주는 이정표
▲ 카스티야 레온과 갈리시아 사이에서 순례의 마지막 땅 갈리시아를 알려주는 이정표
ⓒ J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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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오 세브레이로(O Cebreiro)'에 닿았다. 천 미터가 넘는 고도답게 불어오는 바람이 칼날처럼 매섭다. 여기저기 순례자들이 보이고 성당을 중심으로 기념품가게와 식당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이곳은 순례길 위의 주요 관광지 중 하나였다.

미사 중의 전병과 포도주가 실제 성체와 성혈로 성변화를 일으켰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산꼭대기 성당의 미사시간에 조용히 들어가 성체를 받았다. 독일어로 진행되는 미사에 갸우뚱했는데 알고 보니 독일 가톨릭 단체가 신부님을 모시고 성지순례를 왔나보다. 기념품 가게에서 핀이며 엽서를 고르고 있는 나에게 단체의 머플러를 둘러맨 아저씨가 손짓을 한다.

“어디서 왔어? 아까 미사 때 있었지? 순례자야? 신기하구나.”

하며 이것저것을 물어온다.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대꾸를 했다. 별 생각도 없이 있었는데 아시아인인 내가 그들 속에 끼어 있었으니 퍽 눈에 띄나보다. 문득 아까 미사 시간에 의자에 앉아 고개를 젖히고 의식불명 상태에 있었던 것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했다. 부랴부랴 기념품을 사 가방에 봉투를 구겨 넣고 걷기 시작했다. ‘오늘은 조금 힘들었어요. 하느님, 조금만 이해해주세요’, 그러고 보니 미사 내내 따뜻한 품에 폭 안겼다 나온 것 같기도 하다.

이어지는 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지난하게 교차했다. 정오를 넘겨 뜨거워지는 햇빛 아래로 바람은 여전히 서늘했다. 입이 심심해 피스타치오를 하나씩 입안에서 굴리며 껍데기를 발치에 툭툭 뱉으며 걸었다. 입술이 쓰릴 정도로 짰다. 혀로 입 주변을 날름거리며 ‘으아~ 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사방을 둘러봐도 내 절규를 들을 이 하나 없었다.

로케 성인상 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조각상
▲ 로케 성인상 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조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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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케 성인 언덕(Alto de San Roque)’에는 거친 바람에 맞서 모자를 눌러쓰고 있는 거대한 순례자상이 서 있었다. 그 옆에서 똑같은 몸동작을 하며 한바탕 웃고 사진 몇 장을 찍었다. 아무도 사는 것 같지 않은 침묵에 휩싸인 동네를 지나며 잔뜩 얼은 채로 걸었다. 숨 넘어 갈 듯한 급경사를 올라 도착한 ‘포요 언덕(Alto de Poyo)' 근처 작은 바의 노천을 지나가는데 들꽃으로 장식한 아름다운 밀짚모자가 익숙했다. 바로 라바날에서 만났던 이브 아저씨와 크리스티앙 아줌마 부부였다. “여기서 또 만나네요!” 하며 반가운 마음에 땀으로 축축해진 것도 잊어버리고 얼싸 안았다.

잠깐 짐을 기대놓고 의자에 걸터앉아 그 동안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저씨와 무릎을 마주보고 앉아 당신들 부부의 다정한 뒷모습이 참 부러웠다고, 나는…, 어쩌면 우리 가족들에 대해서 한 부분밖에 알지 못했고, 그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했었는지 모르겠다고, 많은 것을 오해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주고 함께 눈물 흘렸던 그날처럼.

“이 식당에서 숙소를 겸하고 있어서 오늘은 여기서 머물까 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지만 더 이상 무리할 수는 없지.”
“저는 조금 더 걸어가 보려고요. 아쉽지만, 산티아고에서 만날 수 있겠지요?”
“그럼. 우리도 8월 안으로는 도착할 테니까, 산티아고에서 만나서 또 이야기하자.”

크리스티앙 아줌마는 영어가 서툴러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순 없었지만 함께였던 내내 따뜻한 웃음을 머금은 채 나를 바라보아 말보다 더 많은 교감을 나눈 것만 같다. 두 사람과 꼭 끌어안고 가방을 짊어진 채 오랜 시간 손을 흔들어 인사를 전했다. 앞으로 한 시간은 내리막길, 발걸음도 가볍다.

‘폰프리아(Fonfria)'의 순례자 숙소는 작은 바를 겸하고 있었다. 육중한 나무원목을 잇대어 만든 침대 옆에 짐을 기댔다. 솔솔 풍기는 나무향이 기분 좋았다. 샤워를 마치고 빨래거리를 가지고 나왔다. 빨래터의 개수대는 발치의 버튼을 꾹 누르면 물이 나와 양손으로 빨래를 해내기 좋은 아이디어였다. 물기를 꼭 짠 빨랫감을 비닐에 담아 염소가 풀을 뜯고 강아지가 활보하는 잡초들판 한쪽 빨랫줄에 척척 널었다. 저 멀리 ‘음메’, 하고 목을 빼는 소 울음소리가 들린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구나.’, 멍한 채로 올려본 하늘은 파랗다 못해 시리기까지 했다.

아직도 멀기만한 저녁식사를 기다리며 기아에 허덕이던 나는 숙소 라운지에 드러누워 갈리시아 지역 관광책자를 들춰본다. 별을 몇 개나 단 호텔과 고즈넉한 까사 루랄(Casa Rural, 전원 펜션)의 사진이 으리으리하다. ‘이런 호화판 여행은 나랑 거리가 멀~구만’, 눈을 가늘게 뜨고 화려한 카달로그를 무심하게 넘기다 문득 눈앞의 통 창에 비친 풍경에 넋을 빼앗겼다. 오늘 내 두 발로 오르내렸던 바로 그 산과 구름들…, 이 순간 나는 그 어떤 호텔과 고급 휴양지도 부럽지 않아.

저녁은 여덟 시, 별관 식당건물에서 순례자들을 위한 ‘순례자 메뉴(Menu Peregrino)’를 제공한다. 밥 때를 못 기다리고 슬리퍼를 끌고 숙소를 기어 나왔다. 차 한 대 다니지 않는 이차선 도로를 무단 횡단해 푹신한 고깔모자를 쓴 낮은 돌집의 문을 열었다. 어두운 실내 한쪽 긴 테이블에 흰 보자기며 집기들이 가지런히 준비되어 있었다. 안쪽부터 자리를 채우라는 듯이 손짓으로 순례자들을 안내하는 아주머니를 따라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느새 자리를 빼곡하게 채운 순례자들은 약 스무 명 정도, 테이블 위로 빵바구니와 비노를 부지런히 나누며 순례자들의 저녁식사는 시작되었다.
폰프리아에서 순례자 식당 외관
▲ 폰프리아에서 순례자 식당 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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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삼오오 무리지어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람들 속에서 오늘은 조용히 밥만 먹고 들어와야지, 묵언수행을 하겠다고 속으로 작정을 했다. 비노를 따라주거나 음식을 건네받으면 새침(?)하게 ‘고마워요.’, 하곤 묵묵히 식사를 이어갔다. 그러나 어느새 옆에 앉은 이가 스위스에서 온 선생님 코인느이며 남편과 사촌들과 함께 길을 걷고 있고, 멀리 앉은 벨기에 사람 샨텔의 끝없는 수다를 조용히 귀 기울이며 그녀가 토요일에 생일임을 들었다.

상석에 앉아 샨텔과 죽이 맞아 식탁을 온통 자기 분위기로 몰고 가며 이력서를 읊고 있는 시끄러운 미국인이 “내가 중국에서 교수를 한 적이 있지. 중국은 어메이징 해! 한자의 아름다움이란! 아시아 언어도 곧잘 하는 편이지. 하하하! 일본어로 안녕을 어떻게 하냐면….” 하기에 아시아 사람 앞에 두고 별 말을 다 하는구나, 무심코 ‘피식’ 웃었더니 금세 조용해진다. 괜히 내가 미안해져 “더 드실래요?” 하며 국자를 들고 나서서 사람들에게 음식을 퍼주고 한바탕 웃고 말았다. 결국 오늘의 작정도 허사가 되었다.

‘산티아고 타르트(Tarta de Santiago)' 한 조각으로 디저트까지 모두 비우고 “모두 내일도 잘들 걸으세요!” 왁자지껄하게 치른 저녁식사의 말미에, 폴란드 아주머니가 내게 오셔서는 자기의 노트를 펼쳐 보여준다. ‘올라(안녕)’, 그리고 아줌마가 만났다는 한국 순례자의 이름이 한국어로 쓰여 있었다. “그래요, 이거 한국어예요!”하며 반색을 했더니 참 좋은 친구였다며 웃어 보이신다.

밤 열 시, 여전히 환한 창 밖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숙소 침대에 기어 올라갔더니 식사 중에 만난 샨텔이 내 옆 침대의 이웃이었다. “너 아까 토요일에 생일이었다고 했지? 미리 축하할게” 했더니 나를 보고 한국어로 ‘오늘이 내 생일이에요’를 써달란다. 자기의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생일임을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각국어로 써서 가방에 붙이고 다닐 생각이라고 했다. “그거 좋은 아이디어구나” 하며 펜을 들었다. 문득 폴란드 아줌마가 보여준 한국인 순례자의 고운 필체가 떠올라 쉬이 글씨를 써 제낄 수 없었다. 한 획 한 획을 정성스레 적어 쥐어주니 “이게 그 뜻이야? 예쁘다” 하며 종이를 한참 들여다본다.

노을이 내려앉기 시작한 바깥세상, 숙소의 불이 하나 둘 꺼지고 순례자들은 잠에 빠져든다. 더는 못 해먹겠다며 주저앉고 싶었던 시작, 고된 등산의 피로에 절어 실신한 채로 안겼던 미사, 이브 아저씨와 크리스티앙 아줌마와의 재회, 아시아 사람에 대한 버거운 관심 속에서 그럭저럭 여기까지 왔다. 내일 목표는 라바날에서부터 반드시 가고야 말겠다고 콕 집어놓았던 사모스의 베네딕도 수도원, 때마침 7월 25일, 바로 산티아고 성인 축일이다.

한국에서 일정을 짜며 ‘무슨 일이 있어도 축일 전야의 불꽃축제를 보고야 말리라’ 하며 오늘, 산티아고에 닿을 계획을 세웠다. 지금 나는 산티아고로부터 132킬로미터 떨어진 산중마을에 있다. 함께 출발했던 친구들은 지금쯤 화려한 불꽃 아래에서 그들의 위업을 축하하고 있겠지? 한국에서 하나하나 예약해 놓았던 모로코행 왕복 티켓,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과 독일의 쾰른, 스위스 알프스의 라우터브루넨 숙소도 모두 갈아엎고 길 위에 붙박혔다. 이 길이 나를 완전하게 채워주었기에, 단 한 조각의 후회도 지금 내 안에 들어찰 자리는 없다.

덧붙이는 글 | 2007년 여름 스페인 산티아고 가는 길 순례기입니다.



#산티아고가는길#스페인#도보여행#성지순례#카미노데산티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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