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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은 광화문에서 정남으로 내달으면 도착하는 곳이다. 그래서 최근 정동진(正東津)의 이름을 따서 정남진(正南津)으로 부르기도 한다. 묘하게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추운 중간진과 일직선상에 놓여 가장 따뜻한 남쪽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장흥은 동쪽으로 보성, 서쪽으로는 강진·영암, 북쪽으로는 화순에 접한다. 북쪽엔 제암산, 가지산이 있고 남쪽엔 천관산이 있어 대체로 지세가 높은 고장이다. 보성엔 보성강이 있다면 장흥에는 탐진강이 있다. 탐진강은 가지산에서 시작되어 장흥읍을 거쳐 강진으로 흘러 들어간다.

 

보림사는 탐진강 상류 가지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장흥읍에서 탐진강을 따라 거슬러 오르면 유치면에 이르고 이 곳에서 동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보림사에 닿는다. 보림사는 통일신라 구산선문 중 가지산문의 중심도량으로 선종의 도입과 함께 맨 먼저 선종이 정착된 곳이기도 하다.


선종은 달마대사가 인도로부터 중국에 소개한 것으로 당대에는 이단이나 마찬가지였다. 경전에 의지하지 않고 각자 자기의 마음을 깨달아 부처가 된다는 가르침으로 교리와 권위를 중시해온 종래 귀족불교의 틀을 벗어난 혁신적인 사상이었다.

 

중국에 달마대사가 있었다면 신라에는 도의선사가 있었다. 도의선사는 선종을 신라에 처음 소개한 분이다. 경전이나 해석하고 염불을 외는 것보다 자기자신의 마음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외쳤고 인간의 평등과 인간성을 중시하는 진보사상을 가졌다.

 

이런 법맥은 도의선사, 염거화상에 이어 보조선사 체징으로 이어졌다. 헌안왕 4년(860년) 체징은 장흥 가지산사로 옮겨 가지산문을 연다. 경덕왕 18년(759년), 원표대덕에 의해 세워진 가지산사는 대략 100년 뒤에 보림사라는 큰절로 변모하면서 가지산문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보림사는 한국전쟁으로 일주문과 천왕문을 제외한 모든 건물을 잃었다. 그러나 '선종대가람' 이름에 걸맞은 명품 석조물들은 답사객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발길을 머물게 한다. 

 

보림사를 몇 미터 앞에 두고 오른쪽 산언덕, 양지바른 곳에 6기의 부도가 지세의 높낮이 따라 흩어져 서있다. 맨 위의 것이 동부도라 불리는 것으로 보물 155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시대의 부도로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 이 부도는 전체적으로 중대석과 지붕돌의 폭이 좁아 웅장하기보다는 마르고 키가 커 보인다.이 부도 뒤에서 밑에 있는 6기의 부도를 한꺼번에 보는 맛이 좋다.

 

보림사에 닿으면 일주문이 제일 먼저 반긴다. '가지산 보림사'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지붕은 무척 화려해 보인다. 안쪽의 '선종대가람'이라 적혀 있는 현판은 선종의 본거지라는 자부심을 내보이는 듯하다. 현판 왼쪽 한 모퉁이에 '옹정4년'이라 적혀 있어 일주문은 영조2년(1726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천왕문은 일주문과 함께 한국전쟁의 화를 면한 유일한 건물이어서 다른 애정이 간다. 중종 34년(1539년)처음 조성된 것으로 사천왕상 4구와 금강역사상 2가 모셔져 있다.

 

모든 절이 천왕문에서 보는 광경이 제일일 경우가 많은데 보림사도 예외는 아니다. 일주문에서 감추어진 경내가 여기에서는 훤히 들여다보인다.

 

사천왕상은 우리나라 목조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동방지국천왕이 분노한 얼굴표정을, 서방광목천왕은 근엄한 얼굴표정을 하고 있고 남방증장천왕이 미소를 머금고 있는가 하면 북방다문천왕은 부릅뜬 눈에 입을 벌리고 있는 등 그 표정도 다양하다.


이 절의 하이라이트는 대적광전 앞마당이다. 앞마당에는 삼층석탑 두기가 동서로 마주 서있고 그 사이에 석등이 있다. 대적광전 안에는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 모셔져 있는데 모두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쌍탑은 통일신라 경문왕 10년(870년)에 선왕인 헌안왕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건조 연대가 확실하다. 임란과 한국전쟁을 겪었으면서도 상륜부까지 온전히 남아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2층으로 쌓은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놓고 머리장식을 얹은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이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하나의 돌로 쌓았으며 지붕돌 밑면의 받침이 5단씩이고 네 귀퉁이가 심하게 들렸으나 경쾌할 뿐 추하지 않다.

 

감은사지 삼층석탑처럼 웅장하지 않고 불국사 석가탑처럼 우아하거나 세련된 것 같지는 않으며 남원 실상사탑과 거의 흡사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장식성이 부각되지 않는 묘한 느낌을 주는 탑이다.

 

단아하고 순박하나 그렇다고 꾸미지도 않았으면서도 촌스럽지 않은 '자연미인'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석등은 장식이 많이 되어 통일신라 후기의 특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석탑과 같은 연대에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된다.


바닥돌과 아래받침돌, 간주석, 윗받침돌 그리고 불을 밝히는 화사석, 그 위의 얹는 지붕돌, 지붕 모두 온전하여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아래받침돌엔 연꽃무늬를 새겼고 지붕돌 모서리끝부분엔 꽃 장식을 하여 화려한데 수수한 탑과 대비되어 오히려 잘 어울린다.

 

대적광전에 모셔져 있는 철조비로자나불상은 철원 도피안사의 불상과 같은 파격적인 얼굴은 아니더라도 기존의 불상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을 받는다. 도피안사의 불상이 경문왕 5년(865년), 보림사의 철불은 858년에 만들어진 것이니까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도피안사의 불상이 씩씩하고 도전적인 그 지역을 대표하는 아저씨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보림사 불상은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기존의 얼굴과는 많이 달라 좀더 현실적인 얼굴 모양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건장하고 당당해 보인다.

 

대적광전 동쪽엔 대웅전이 있고 그 뒤편으로 보조선사 부도와 부도비가 있다. 이 부도는 보조선사 체징의 부도로 부도비와 함께 헌강왕 10년(884년)에 세워졌다.

 

완벽한 형태미를 자랑하는 연곡사 동부도와 섬세한 조각솜씨가 돋보이는 쌍봉사 칠감선사 부도에 비하면 견줄 만한 것이 못 된다.


굳이 견주어서 얘기하자면 지붕돌이 몸돌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아 좀 부자연스러워 보여 '부조화의 형태미'를 가졌다고 볼 수 있고 기단의 아래받침돌의 구름무늬와 상대석의 연꽃조각이 섬세하게 조각되었지만 쌍봉사 부도에 비하면 뒤쳐지는 것으로 보여 '기교없는 조각솜씨'가 묻어 있는 것으로 둘러대면 적절할 것 같다. 그래도 동부도에 비하면 전체적으로 무게감이 있어 보인다.    

 

부도비는 부도와 같은 해에 세워졌으며 돌거북과 비신, 비석머리 모두 온전히 남아 있다. 비신에는 보조선사의 행적이 적혀 있다. 돌거북의 콧등과 머리에 하얀 눈이 쌓여 위풍당당한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순진하고 귀엽게 보인다.

 

보림사는 돌 문화재의 보고다. 삼층석탑과 석등, 보림사 초입의 동부도, 보조선사의 부도와 부도비 등 모두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어 우리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즐거움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보림사 앞길로 난 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조그만 마을이 나오고 마을 언덕에 두 기의 부도가 있다. 양지바른 언덕에서 홀로 우두커니 서 있는 부도와 함께 마을 앞을 흐르는 물과 멀리 보이는 산세를 보고 있으면 큰 감동을 받는다.


풍마우세(風磨雨洗)의 모진 세월을 견디며 1000여 년을 몸 성히 버티어 낸 보림사 석조물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느끼며 발길을 돌린다. 


태그:#보림사, #보림사삼층석탑, #보림사 석등, #보림사철조비로자나불상, #보조선사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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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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