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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버지는 그 때 건강이 좋지 않으셨다. 그래도 몸이 좋은 날이면 새벽에 버스정류장에 바래다주시고 어머님이 오실 시간이면 리어카를 끌고 마중을 나가셨다. 버스정류장은 초등학교 근처에 있었으므로 어떤 날은 부모님을 만나 리어카에 올라타고 세상 다 얻은 듯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여름에는 아이스크림 하나면 온 세상을 다 얻은 듯 했고, 한 겨울에는 군고구마나 센베과자 한 봉지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아버님은 몸이 아파 자주 누워계셨고, 우리 형제자매들이 어머님을 도와드리러 새벽에 일어나곤 했다. 초등학교시절 많이는 아니고(내가 막내였기에) 몇 번 새벽에 일어나 채소를 팔러 가시는 어머님을 첫차에 태워드리고 빈 리어카를 끌고 집에 돌아온 적이 있다. 혼자서 끌기에는 묵직하던 리어카가 짐을 내려놓고 요란한 소리를 털털 내며 집으로 돌아올 때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을 떠올리곤 했다. 70년대 중반의 일이다.

 

 

혜화동 골목길. 각종 채소를 실은 트럭이 골목을 누비며 확성기로 손님들을 끌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는 소리였는데 나로서는 오랜만에 들어보는 소리다. 허긴 아침 일찍 출근했다가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가니 그 어간에 동네가 어떤 분위긴지 잘 알지 못한다.

 

허나, 대부분의 물건을 재래시장이나 동네의 작은 슈퍼마켓도 아닌 대형마트를 주로 이용하는 요즘이니 확성기를 통해 들려오는 소리가 마치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라는 모라디오방송국의 프로그램을 듣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한다.

 

골목길이 얼마나 복잡한지 막다른 골목길을 돌아 나와 좁은 계단으로 이어진 골목길을 돌고 돌다 보면 어떤 때는 내가 앞서고, 어떤 때는 트럭이 앞서곤 했다.

 

“아저씨, 이 동네 골목계단에 꽃 그려진 곳이 어딘지 아세요?”

 

 

모르는 길이라도 대충 알아서 찾아다니곤 했는데 이미 낙산공원에서 대학로까지 허탕을 치고 다시 올라온 길이라 찾아다닐 엄두가 나질 않았다. 아니, 완벽한 허탕은 아니었다. 시작 초입에서 벽에 그려진 그림들을 만났으니까. 그 그림들을 따라가면 될 것 같았는데,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도 제법 있어 그 곳이라 생각했는데, 어느 새 나는 다른 골목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그 곳을 떠난 사람들도 있고,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곳에 살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저 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모처럼 부모님을 모시고 나들이를 했다. 차 안에서는 혜화동 이야기가 이어졌다.

 

“서울에 그런 곳이 있나 깜짝 놀랐지? 전망은 좋을지 모르지만 사람 살기는 참 힘든 곳이지. 지금은 많이 좋아졌나 몰라.”
“뭐, 옛날 산동네가 다 그렇죠 뭐.”

 

 

어머니는 잠시 추억 속으로 여행을 하시는 눈빛이다. 아내가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하는데 아들인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나 혹은 잃어버린 기억들까지 끄집어낸다.

 

“내가 모르는 것까지 당신이 어떻게 아냐?”
“집에서 어머님이 얘기해 주니까 알지. 당신 회사가고 없을 때 어머님하고 다 얘기했지.”
“그랬구나.”

 

뭔가 어린 시절의 비밀을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도 어머니의 말벗이 되어주고, 그것을 하나하나 자기의 기억처럼 간직해 준 아내가 고맙다.

 

“거기도 거여동 재개발지구처럼 그런가?”
“거기? 지금이야 거여동재개발지구보다는 난 것 같지만 이전에는 엄청나게 고생했을 것 같던데? 거여동이야 평지지만 거긴 아예 산이던데 뭐.”

 

그러자 어머님이 말을 꺼내신다.

 

“그려, 계란을 큰 함주박에 이고 계단을 올라가다보면 위를 볼 수 있나? 좁은 골목길에 들어섰다가 낮은 지붕에 함주박이 걸려서 넘어지는 바람에 계란을 다 깨먹은 적도 있었단다. 얼마나 아까운지 깨진 날계란을 울면서 먹기도 했지. 그래도 사람들이 나와서 거들어줘. 그러면 고맙다고 금이 간 계란들을 건네주고 다음에 가면 단골이 되곤 했지.”

 

 

지금이야 계란판이나 플라스틱 상자 같은 것들이지만 그때는 짚으로 10개씩 계란을 묶어서 팔았다. 그래서 양계장에서 계란을 떼 오는 날이면 늦은 밤 혹은 새벽까지 짚으로 계란을 묶곤 했다.

 

계란은 주로 농한기인 겨울에 내다 파셨고, 봄동이 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 갖가지 채소를 내다 파셨다.

 

그러니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거의 쉴 틈이 없으셨던 어머니는 늦은 밤 내다 팔 채소들을 손질하시다 말고 백열전구 아래 앉아서 까딱까딱 졸고 계실 때가 많았다. 어머니를 도와드리기도 했지만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어린 마음에 ‘난 이 다음에 공부를 잘해서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하고 다짐하곤 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신화가 그래도 통하는 시절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꿈이었고, 성공의 도식이라는 것이 요즘도 변함이 없다는 것이 불행한 일이지만 ‘공부=좋은 대학=성공’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비상한 머리를 가지고 태어나진 못했는지 학교공부로 성공하는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길을 걸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나보다 공부 못하는 친구들이 연습문제를 척척 풀어오는 것이 신기했다. 그때 처음으로 교과서 말고 참고서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중에야 물론 참고서가 없었기에 끙끙대며 문제를 풀던 그 때를 감사하긴 했지만 조금은 슬픈 추억이다. 내 삶에 파랑새는 없는가 했다.

덧붙이는 글 | 혜화동 일상을 담았으며 어머니와 관련된 '혜화동과 어머니' 이야기로 3회 연재할 예정입니다. 이화동, 낙산동, 혜화동 일대인데 편의상 혜화동으로 표기합니다. 


#혜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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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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