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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동 명물 한옥마을. 뒤로 보이는 산이 남산이다.
 필동 명물 한옥마을. 뒤로 보이는 산이 남산이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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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는 모두 518개 행정동, 470개 법정동이 있다. 행정동은 관리상 편리를 위해서 인구가 많은 법정동을 여러 개로 쪼개거나 인구가 적은 법정동을 여러 개 모아서 관리한다. 법정동 신림동은 행정동으로 신림1동부터 10동으로 쪼개지고, 법정동인 누하동·옥인동·통인동·효자동·누상동·창성동 등은 행정동 효자동이 관리한다.

법정동과 행정동 관계를 살펴보면 그 동의 인구를 대략 가늠할 수 있다. 서울에서 인구가 제일 많은 동은 신정3동이다. 2006년 자료에 따르면 무려 4만9989명이나 된다. 공릉2동·성산2동·상계1동·염창동 등도 모두 4만 명이 넘는다. 필동1가·2가·3가·남학동·예장동·충무로3가·주자동 등 법정동 7개 동과 장충동2가·충무로4가·충무로5가 및 묵정동 일부를 맡고 있는 필동은 인구가 5560명에 불과하다.

1998년 지방선거 때는 서울에서 가장 작은 선거구로 소개되기도 했다. 큰 아파트 단지가 없는, 한가한 동네라는 점을 인구는 잘 보여준다.

아쉽게도 필동에 옛 골목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아쉽게도 필동에 옛 골목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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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동이란 동 이름은 조선시대 남부의 부사무소(部事務所)가 이곳에 있어 부동(部洞)으로 부르다 와전되어 붓골로 바뀌었고, 이 붓골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지금 이름이 되었다.

인구 5천명을 조금 웃도는 이 작은 동네의 명물은 '한옥마을'이다. 1998년 4월 18일 문을 연 한옥마을엔 한옥가옥 다섯 동이 모여 있다. 순정효황후 윤씨 친가를 빼곤 모두 손을 대지 않은 곳이다. 조선시대 집 구조를 제대로 볼 수 있어 전통문화 관광지로 인기가 높다.

필동은 또한 한국영화의 메카였다. 한국영화가 한창 성장하던 1960년대 초 충무로3가 좁은 골목엔 영화사 80여개가 모여 있었다. 1990년대 들어 조금 누그러졌지만 영화사들이 대거 강남으로 옮기기 전까지 필동과 명동 일대 충무로에는 50여개에 이르는 영화제작업체가 몰려 있었다. 지금도 20여개 정도 되는 영화사와 영화 관련단체가 남아 충무로의 명성을 잇고 있다.

서울을 대표하는 문화거리 중 하나지만 필동의 과거는 그다지 아름답진 않다. 수도방위사령부·헌병사령부·합동참모본부 등 군 사령부가 있었던 곳으로 격변기마다 이곳에선 총성이 울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식민지 시절 일본인들 마을인 왜성대(倭城臺)가 있었고, 왜성대에선 조선총독부와 통감관사가 자리를 잡고 조선을 감시했다.

일제와 군사정부의 흔적을 지우고 문화거리로 거듭난 필동. 2007년 말과 2008년 초 몇 차례 걸쳐 그곳을 찾았다. 사진 촬영일은 2007년 12월 28일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이다.

남산에 올라가는 가장 한적한 길, 근처엔 값싼 식당골목도...

앞에 보이는 건물이 대한극장. 2004년 3월 4일 큰 눈이 내렸을 때 찍은 사진이다.
 앞에 보이는 건물이 대한극장. 2004년 3월 4일 큰 눈이 내렸을 때 찍은 사진이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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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살면서 필동은 즐겨 찾았던 곳 중 하나다. 남산에 올라갈 때 종종 이곳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마을버스를 타고 올라가는 동국대역 남산국립극장길,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 명동길과 달리 이곳을 통해 남산에 올라가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 한적한 분위기가 좋아서 필동길을 통해 자주 남산을 올랐다.

필동 구경을 충무로역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충무로역에서 필동 방향으로 나오면 극장이 보인다. 대한극장이다. 1956년 문을 연 이 극장은 2000년 6월 복합상영관으로 모습을 바꾸기까지 우리나라서 가장 큰 2000석짜리 초대형 극장이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벤허><바람과 함께 사라지다><타이타닉> 등 대작영화 전문 극장이기도 했다. 1992년 단일극장 가운데 유일하게 8년 연속 전국 최고 관람객 기록을 세우기도 했지만, 복합상영관이라는 시대 흐름을 결국 거스르진 못했다.

서울에 올라오기 전 '나중에 서울 가면 꼭 대한극장에서 영화를 볼 것‘이라고 다짐했지만 뜻을 이루진 못했다.

먹을거리골목에 있는 낙서. 그림은 개성이 있지만 골목 전체로 볼 때는 산만한 느낌이다.
 먹을거리골목에 있는 낙서. 그림은 개성이 있지만 골목 전체로 볼 때는 산만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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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역 옆 동국대 방향 골목엔 값싸고 오래된 식당이 몇 곳 모여 있다. 필동반점·동회루·평양만두집 등은 모두 역사가 30년 넘은 곳이다. 여기서 남산 쪽으로 걸어 올라가면 36년 역사를 자랑하는 필동해물이 나온다. 종종 찾았던 곳은 '골목'이란 이름이 들어간 한 식당. 김치찌개·부대찌개 등 찌개 종류가 3000원에 불과하고 반찬이 푸짐한 게 특징이다. 친구와 함께 밥을 먹고 막걸리 한 통을 비워도 채 만 원이 나오지 않아 즐겨 찾았다.

필동 근처 골목을 누비다 보면 이 동네엔 독특한 요리를 파는 곳이 곳곳에 박혀 있음을 알 수 있다. 붕어찜 전문집을 비롯 오소리감투(돼지 암컷의 생식기)를 파는 식당, 양배추물냉면을 파는 칼국수집 등을 보게 된다. 때가 되면 이 색다른 요리를 한 번쯤 맛 볼 생각이다.

충무로역 근처 식당 골목엔 누군가 그린 낙서그림이 있다. 자세히 보면 꽤 공들여 그린 그림이다. 단 듬성듬성 그려져 있어 아쉽다. 골목 전체에 이런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면 골목이 좀 더 생동감이 넘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필동은 또한 약사 출신 트로트 가수로 1980년대를 뜨겁게 달궜던 가수 주현미의 약국이 있었던 곳이다. 81년 강변가요제에 중앙대 약대 그룹 '인삼뿌리' 2기 단원으로 나왔던 주현미는 1984년 4월 약국을 개업했지만, 결국 끼를 이기지 못하고 가수의 길을 걷는다.

당시 12집까지 나온 '쌍쌍파티' 음반은 업계 추산 2천만장 정도 팔렸다고 하는 초대박 음반이었다. 그 시절 고등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턴테이블에 주현미 음반을 걸고 흥얼거렸던 생각이 난다.

옛 골목길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가끔씩 보이는 특이한 집 눈길

들어가는 문이 다른 두 집이 다리로 이어져 있다.
 들어가는 문이 다른 두 집이 다리로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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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동엔 골목길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남산 쪽은 대부분 빌라촌이나 고급주택으로 탈바꿈했다. 골목길이 그나마 남아 있는 곳은 동국대 쪽이다. 남산을 오르다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동국대 옆 동네로 들어서면 사람만 다닐 수 있는 골목길을 만날 수 있다. 이곳 집들은 대부분 3층짜리 주택으로 세를 놓은 곳이 많다.

어귀에선 특이한 집 두 채가 있다. 대문이 각각 다른 두 집인데, 다리로 이어져 있다. 우애가 좋은 형제나 오랜 우정을 약속한 두 친구가 집을 짓고 다리로 이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잠시 해봤다.

큰 바위를 밀지 않고 그대로 살려서 지은 집.
 큰 바위를 밀지 않고 그대로 살려서 지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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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함. 편지를 배달하는 아저씨도 이 우편함을 보면 빙긋 웃을 것 같다.
 우편함. 편지를 배달하는 아저씨도 이 우편함을 보면 빙긋 웃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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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특징 없는 골목 동네에서 '귀여운' 우편함을 보고 발길을 멈추었다. 종이로 만든 우편함은 여학생들이 손수 만든 것 같다. 식구 다섯 명 이름을 일일이 적은 옆에 여자아이 캐릭터 스티커를 붙여 놓았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깜찍한데, 우체부 집배원에게 인사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편지는 저에게… 우체부 아저씨 수고하세요."

필동 길은 남산을 향해 뻗어있지만 이어지지 않고 막다른 곳이 많다. 그런 곳엔 대부분 길이 막혔다는 표시를 해놓았다. '자동차 막다른 길' '길없음' '길 ×' 등 표시나 문구도 다양하다.

그런데 길이 없다고 하니 더 들어가고 싶다. 이런 길 중에선 자동차는 못 가도 사람이나 자전거는 갈 수 있는 곳이 있다.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돈다면 겁 내지 말고 들어가 볼 일이다. 설령 계단이 나온다 해도 자전거를 들쳐 메고 오르면 그만이다. 힘이 들겠지만 부족한 운동을 한다고 생각하면 좋지 않을까.

가난한 선비들이 살던 남산골, 한편으론 군사 주둔지

전통가옥 다섯 채가 있는 한옥마을
 전통가옥 다섯 채가 있는 한옥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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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등산길 입구까지 올라간 뒤 왼쪽 방향으로 내려오면 잘 가꿔진 동네가 나타난다. 이 동네엔 서울 정도 600년 기념 잘 가꾸어진 집도 있다. 첫눈에 보기에도 단정한 느낌이다. 길은 자동차가 쉽게 지나갈 수 있도록 충분히 넓다. 여기서 쭉 내려가면 한옥마을이 나온다.

필동은 가난한 선비들이 살던 곳이다. 계절이나 날씨에 상관없이 나막신을 신고 '딸깍딸깍' 다닌 고집스런 그 남산골 선비들을 일컬어 국어학자 이희승은 '딸깍발이'라 불렀다. 작가는 고려 왕조를 지키고자 한 포은 정몽주나 한말 나라가 넘어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목숨을 내던진 민영환, 세조 집권을 죽음으로 반대한 사육신 등을 딸깍발이의 전형으로 보았다. 한옥마을 안에 이희승 추모비가 있다.

필동은 또한 조선시대부터 대대로 군사 주둔지였다. 조선시대엔 서울을 수비하던 금위영 별영이었던 남별영이 있었다. 군사들이 무예를 훈련하던 훈련장도 있었다.

수도방위사령부는 1991년 5월 관악구 남현동으로 옮길 때까지 이곳에 있었다. 그러니 1980년 신군부 집권을 둘러싼 일촉즉발의 위기상황 때 필동에선 끊임없이 작전명령이 떨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한옥마을 옆엔 충정사라는 절이 덩그러니 있는데, 수도방위사령부가 있었던 시절 흔적이다. 충정사는 당시 부대 부속 사찰이었다.

남산 한옥마을에 있는 충정사. 수도방위사령부가 필동에 있던 시절 부대 부속 사찰이었다.
 남산 한옥마을에 있는 충정사. 수도방위사령부가 필동에 있던 시절 부대 부속 사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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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병사령부는 1972년 7월 용산으로 옮길 때까지 필동에 있었다. 안두희가 김구 암살 직후 연행된 곳이기도 하다. 1965년 월남 파병을 위한 주월 한국군사령부가 창설된 곳 또한 필동 합동참모본부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필동이 '한국영화의 메카'가 된 까닭이 바로 이곳이 주요 군사 주둔지였기 때문이다.

"국방부 영화촬영대가 전쟁 중에 남산골 한옥마을에 위치한 수도방위사령부 뒤편의 관사에다 부산에 있던 시설과 기재를 옮겨와 지하는 촬영장으로 사용하고 그 옆의 테니스장은 야외촬영장으로 활용하는 '필동촬영소 시대'를 열었다. 그러면서 한국영화는 1960년대 황금기와 70년대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연합뉴스 2005년 4월 8일

지금 한옥마을엔 순정효황후 윤씨친가, 해풍부원군 윤택영댁 재실, 부마도위 박영효 가옥, 오위장 김춘영 가옥, 도편수 이승엽 가옥 등 다섯 채가 있다. 원래부터 필동에 있던 집들은 아니다. 서울 전역에서 보존 상태가 좋은 집 다섯 채를 골랐기 때문이다.

오위장 김춘영의 집은 종로구 삼청동 125-1번지에 있었고, 해풍부원군 윤택영댁 재실은 동대문구 제기동 224번지에 있었다.

조선시대 집 구경을 위해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 중 이곳이 한 때 서울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 주둔지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렇게 역사는 다음 역사에 자리를 내주고 소리 없이 퇴장한다.

필동은 옛 골목길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길 맛은 그다지 없다. 하지만 한적한 기분을 느끼기엔 괜찮다. 가끔씩 한가롭게 산책을 하고 싶다면 지하철 충무로역에서 내린 뒤 필동 길로 해서 남산을 올라가 보길 권한다.


태그:#골목, #필동, #자전거, #미니벨로, #한옥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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