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당 2500위안(한화 약 31만원)을 쳐서 보상금 8만 위안(약 1000만원)을 던져주고 다른 곳에 집 사서 빨리 나가라는데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중국 충칭(重慶)시 위중(渝中)구 화롱차오(化龍橋) 화핑신촌에 사는 뤄인한(53)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뤄는 "요즘 늙은 어머니와 아내, 직장에 다니는 딸까지 네 식구가 살만한 방 세 칸짜리 집을 사려면 못해도 30만 위안(약 3750만원)은 있어야 한다"면서 "분양받아 집을 사더라도 입주하기 전 1년 이상 거주할 임대주택의 집세도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화롱차오는 내륙직할시 충칭에서도 유명한 공업구였다. 1960년대 말 마오쩌둥(毛澤東)은 미국과 소련의 핵공격에 대비해 연해지방에 위치한 중화학 산업을 내륙으로 옮기는 3선 건설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화롱차오에는 수많은 공장이 잇따라 들어섰다. 1980년대 초 화롱차오에는 2.41㎢ 면적에 80여 개 공장이 들어서 6만여 명의 주민이 사는 제법 큰 공업지구가 형성됐다.

 

끊임없이 번성할 것 같던 화롱차오에 암운이 깃든 것은 1990년대부터이다. 1992년 덩샤오핑(鄧小平)의 남순강화 이후 전방위적인 시장경제 개혁이 시행되면서, 화롱차오에서 조업하던 국영기업들은 하나둘씩 경쟁에 도태되어 문을 닫게 됐다. 금세기에 들어서 화롱차오는 충칭 도심에서도 가장 낙후하고 못사는 지역으로 전락했다.

 

충칭전기공장에서 일했던 뤄는 "1999년부터 같이 일하던 동료들이 수십 명씩 정리해고 되더니 1년도 못되어 나도 쫓겨나고 회사는 결국 문을 닫았다"고 회고했다. 뤄는 "처음 공장에 입사할 때만 해도 월급은 많지 않지만 안정되고 복리수준도 우수해 고향 친구들의 선망을 받았다"면서 "지금 남은 건 싼 가격에 매입한 32㎡ 회사 아파트뿐인데 이마저 시세에도 못 미치는 보상금을 주고 나가라니 울화통이 터진다"고 말했다.

 

도시 재개발에 길거리로 내몰리는 화롱차오 주민들

 

가난하지만 허름한 아파트에 살던 화롱차오 주민들의 운명이 송두리째 바뀐 것은 지난 2003년 8월. 충칭시는 개혁개방 이래 최대 투자로 일컬어지는 화롱차오 개발 프로젝트를 홍콩 루이안(瑞安)그룹과 체결했다. 화롱차오와 그 주변 약 130㎡에 100억 위안(약 1조2500억원)을 들여 높이 98층의 오피스 빌딩과 첨단 쇼핑몰, 고급 고층아파트 단지를 짓기로 한 것이다.

 

재개발 프로젝트에 따라 2004년 화롱차오 일대에 있던 크고 작은 200여 개의 사업체와 주민 1만2000가구에 대한 이주가 결정됐다. 2005년 6월 시작된 건물 및 주민에 대한 강제 철거와 이주는 순조로운 듯 보였다. 충칭시 정부는 화롱차오에서 조업했던 공장이나 상가 대부분이 국영인데다, 주민들도 지역 내 사업체에서 일을 했기에 자신감이 넘쳤다.

 

이러한 충칭시의 환상은 적지 않은 국영기업 공장에서 사후대책 없는 이전과 폐업에 반대한 노동자들의 농성이 일어나면서 깨졌다. 충칭담배회사 노동자들은 반 년 넘게 공장을 점거하고 시외로 이전한 새 공장으로의 고용 승계와 정부 차원의 체계적인 이주대책을 요구하며 투쟁했다. 대형 공장 노동자 뿐만 아니라, 그보다 불안감이 더욱 컸던 작은 사업체에서 일했던 주민들은 불만을 적극적인 행동으로 표출했다. 2005년 가을부터 2006년 내내 화롱차오에서는 한 달에 두세 차례씩 대규모 도로점거시위가 발생했다.

 

청젠궈(46)는 "큰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와 그 가족은 그나마 정부에서 이주 대책을 마련해 떠났지만 중소기업이나 상점에서 일하던 주민들은 아무런 대책 없이 너무나 막막했다"고 말했다. 청은 "1990년 중반 부동산 개혁 때 국가로부터 매입한 구형 아파트나 연립주택은 보통 30~40㎡에 방 두 개, 부엌, 화장실이 일반적이었다"면서 "이를 1㎡당 2000~2600위안대에서 보상해 주니 집값이 엄청나게 오른 지금 보상금으로 새 집을 산다는 것은 어림 반 푼어치 없는 일"이라고 울분을 토했다.

 

언제 강제철거 되어 쫓겨날지 모르는 불안한 생활의 연속

 

뤄와 청은 이구동성으로 "하루하루 살얼음판 위에서 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언제 철거반이 들이닥쳐 이주를 거부하고 남아있는 주민들을 끌어낼지 모르기 때문. 청은 "부동산 개발회사에서 정부 관리를 대동하고 수시로 찾아와 이주 동의서에 사인할 것을 강요한다"며 "2007년 12월까지 이주치 않으면 강제로 쫓아내겠다는 협박을 여러 차례 해왔다"고 밝혔다.

 

중국에서 도시 재개발로 인한 강제 철거로 심각한 후유증이 발생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005년 8월 충칭특수강에서 일했던 노동자와 그 가족들은 체불급여 및 퇴직금 지급, 이주비용 제공 등을 요구하며 3개월 동안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그 과정에서 최대 1만여 명까지 늘어났던 시위대는 무장경찰과 충돌하여 3명이 죽고 3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작년 6월 8일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 후허하오터(呼和浩特)에서는 강제철거에 반대하는 철도 노동자와 가족인 주민 5000여 명이 경찰의 과잉진압에 반발, 경찰차 3대를 전복하고 6시간 동안 중심가 도로를 점거했다. 같은 달 11일 저장(浙江)성 성저우(嵊州)시에서 18가구가 사는 4층 건물을 강제 철거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주민들을 폭행하자, 시민 3만 명이 몰려들어 규탄시위를 벌였다.

 

중국 공안부의 통계에 따르면, 2005년 공식적으로 추산된 집단시위는 8만7000건에 달했다. 2003년, 2004년에 비해 각각 50%와 6.6%가 증가한 것으로, 대부분 국영기업 개조작업과 부동산 재개발에 따라 거리로 나앉게 된 노동자·농민·도시빈민이 일으킨 시위였다. 지난 2, 3년 사이에는 베이징올림픽을 맞아 중앙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인 도시 개발 및 정화 작업을 벌였다. 이로 인해 무자비한 강제철거와 무단이주 조치가 취해지면서 중국인들의 강한 불만을 사왔다.

 

조사 없이 파괴되는 유물, 최소 생존권을 요구하는 사람들

 

대대적인 도시 재개발 과정에서 역사 유물이 잇따라 발굴되고 있지만 중장비 아래 깔려 파괴되고 있다. 작년 2월 6일 <뉴욕타임스>는 "재개발 공사 중 수많은 고대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고 있지만 대부분 전문적인 조사 한 번 받지 못한 채 불도저로 밀려 사라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는 "난징(南京)에서 10기의 귀족묘가 발견됐으나 학술 조사 없이 파괴됐다"면서 "뤄양(洛陽)의 문화재 담당 관리는 '당나라 유적 바로 위에서 거침없이 재개발 사업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탄했다"고 전했다.

 

화롱차오에서도 같은 사건이 발생했다. 2006년 11월 충칭시 문물고고연구소는 화롱차오의 한 암벽 밑에서 명나라 묘소군을 발견했으나 촉박한 개발계획에 밀려 면밀한 조사를 실시하지 못한 채 사라졌다. 화롱차오라는 지명을 낳은, 1932년에 지어진 충칭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도 이전 없이 폭파, 해체됐다. 부동산 개발업자에게 유적 발견은 귀찮은 장애거리일 뿐이다. 이들은 문화재 보호를 위해 관련 기관이나 학자들과 협의해야 하기에 사업 일정에 차질이 있을 것을 두려워한다.

 

불도저식 도시 재개발로 인한 부작용이 심각해지자, 중국정부도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작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통과된 물권법에서 부동산의 권리를 명확히 했다. 중국인들의 권리의식도 날로 높아져 가고 있다. 2004년 9월부터 부동산 개발업자의 헐값 보상에 항의하여 홀로 투쟁을 벌인 충칭 주룽포(九龍坡)구 양우·우핑 부부가 대표적이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주거권리 및 퇴거센터(COHRE)는 "중국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철거와 파괴는 정당한 절차를 밟지 않고 있다"며 "이에 항의하는 주민들을 억압하고 구속하는 중국정부의 기본방침이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청젠궈는 "아직까지 이주를 못한 화롱차오 300여 가구 주민들의 소원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정당한 보상을 해서 최소한의 거주공간을 마련해 달라는 것"이라며 "가난한 우리들에게도 마음 편히 살 허름한 내 집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하소연했다.

 


태그:#재개발, #강제철거, #유물 파괴, #베이징올림픽, #화롱차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