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진보가 위기인가?
진보가 위기다. 이는 분명 이번 대통령선거의 결과가 불러일으킨 위기다. 위기의 논거로는 크게 신보수주의 정권이 등장했다는 것과 민주노동당 권영길 대선후보의 지지율이 기대에 못 미쳤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 논거들은 근본적인 비판을 받고 있다. 바로 진짜 진보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진보는 '가짜'였다는 것이다. 첫째, 앞으로 들어설 이명박 정부는 신보수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그동안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진보 정부가 아니라는 판단에 근거한다. 한 마디로 '가짜 진보' 정부이었다는 것이다. 둘째, 원내 의원을 둔 대표적인 제도권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 안에 흔히 '자주파', '종북주의'라는 전혀 진보적이지 않은 ‘가짜 진보’세력이 있다는 지적이다. 이렇게 진보 논쟁이 한창인 가운데, 김규항의 텍스트를 다시 펼쳤다. 김규항은 지난 10년 동안 꾸준히 가짜 진보를 솎아내는 일에 집중해 온 글쟁이다. 진보를 옹호해오며 특히 그는 '지식인 비판'에 많은 양의 텍스트를 할애했다. 그건 아마도 진보적이라 불리는 한국의 지식인들이 실은 진보에 해악을 끼친다고 판단해서 일 테다. 한국의 '진보 지식인'이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진짜' 진보라고 분칠한 데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그의 글에서 읽을 수 있다. 가짜 진보의 옹호자들 "진보라 선전되는 신자유주의 개혁...신자유주의 개혁에 인민들의 삶이 거덜 난 건데 인민들은 진보 때문에 거덜 났다고 생각하는 것...책임은 인문들에게 신자유주의 개혁을 진보라 착각하게 만든 사람들...이른바 진보적이라는 지식인들과 미디어들...메이저 시민 운동 세력들, 창비니 민족문학작가회의니 민예총이니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니 하는 곳들...그들은 언제나 개혁과 진보를 뭉뚱그려 말했지요." <김규항 블로그(http://gyuhang.net) 2007.12.17> 그렇다. 그는 개혁과 진보를 "뭉뚱그려" 개혁의 실패를 진보의 실패라고 착각하게 한 지식인들과 미디어, 그리고 여러 시민사회 세력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비판은 이번 대선뿐만 아니라 그동안 10년 가까이 그가 해왔던 일이다. <B급 좌파>(이후 ‘B급’) <나는 왜 불온한가>(이후 ‘불온’) 그의 이름으로 나온 두 권의 책이다. 글 대부분은 <씨네 21>의 칼럼인 <유토피아 디스토피아>에 실린 것들이다. 그 외에도 <노동자의 힘> <작은책> <GQ> <보그>에 실린 글과 강연문, 그리고 그의 블로그에 있는 글들로 채워져 있다. '책으로 살아가는' 지식인을 혐오하다
“김규항의 글을 꿰뚫는 한 가지 중요한 정신은...바로 위선에 대한 강한 혐오다”라고 강준만이 ‘해부’했듯, 그는 글에서 혐오감을 드러내는 데 전혀 주저함이 없다. 특히 위선에 대해선 날카롭다 못해 살벌할 정도로 비판한다. 그 살벌함의 대상으로는 ‘지식인’이 으뜸으로 글의 ‘도마’ 위에 오른다. 그는 지식인이 가진 관념의 거드름을 혐오한다. 관념 안에 사는 지식인들은 진보를 얼룩지게 하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지식인은 여느 노동들처럼 몸을 움직여 분명한 결과물을 생산하는 노동이 아닌, 세상의 정신 부문을 담당하는, 세상을 분별하여 세상에 알리는, 매우 추상적인 노동을 하는 사람이다.(B급 p266)” 그 “추상성”은 지식인을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책을 살아가는 사람들...세상 속이 아니라 세상의 외관, 술집이나 세미나실에서 세상에 대한 관찰기를 교환하는 사람들(불온 p94)”로 만들었다. “한때 진보주의자였고, 이젠 진보를 회의하는 사람들...그들의 목표는 오늘 그들의 나른한 삶을 유지하면서도 양식 있는 사람으로 행세하는 것입니다.(불온 p91)”라고 말한다. “당대를 파악하는 지식인의 노동은 용접을 하는 용접공의 노동이나 물고기를 잡는 어부의 노동처럼 사회적으로 분담된 하나의 역할일 뿐”인데도 “서푼짜리 허영심의 냄새나는 퇴적물을 지성이니 교양이니 인문주의니 하는 이름으로 두른 채 당대 현실로부터 대중들로부터 자신들을 구별(B급 p123)”하는 그들을 혐오하는 것이다. 개혁이 진보라는 거짓부렁 “개념어를 마구 사용하는 방식으로 인민들에게서 그들의 지적 권위를 확보(불온 p21)”하며 “인민들이 진리를 얻는 일을 차단하려는 자본과 권력의 음험한 욕망과 결합하여 강고한 지적 권위주의를 형성(불온 p22)”하는 지식인!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테러도 나쁘지만 보복도 나쁘다’는 지당한 말이나 주고 받는(불온 p34)” 지식인의 가장 큰 폐해는 바로 개혁을 진보라 우기는 일이다. 김규항에게 개혁은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야만과 폭력성을 제거하여 합리화하는 운동(불온 p209)”일 뿐이다. 개혁은 단지 “진정한 변화와 변화를 막기 위한 변화”이고, 그가 “개혁을 경계하는 건 개혁이 갖는 현실적인 의미를 무시하려는 게 아니라 그 의미에 집착할수록 어느새 진정한 변화를 포기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변화의 포기야 말로 “개혁의 숨겨진 목표(불온 p280)”이기에 그는 개혁과 진보를 뭉뚱그리는 지식인을 혐오하는 것이다. 특히 한국에선 “90년대 이후 개혁적 우파가 민주화의 공을 독식하고 오늘의 진보를 자처하기 시작한 일”로서 “좌파에게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한다. 그리고 “오늘 한국에서 이념의 명찰은 한 칸씩 왼쪽으로 붙어 있다. 극우는 보수의 명찰을, 개혁적 우파는 천연덕스럽게 진보의 명찰을 붙이고 있다. 붙일 명찰이 없는 좌파는 그저 논외의 상태다(불온 p163)”. 김규항은 말한다. “지배계급의 이해를 지지한다면 보수고, 피지배계급의 이해를 지지한다면 진보인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시민이라는 중간계급의 이해를 기반으로 하는 개혁적 우파니 개량적 진보니 하는 다양한 이념들이 촘촘히 끼어 있다(불온 p162)”라고. 그런 ‘개혁적 우파, 개량적 진보’가 “진보를 거의 완전하게 대체하는 데는 참여연대에서 강준만과 노사모를 거쳐 네티즌 운동에 이르는 10여 년의 과정이 있었다.” 그리고 “그 10여 년 동안 개혁운동은 좌파운동을 ‘낡고 어리석으며 실현 가능성이 없는 미망에 빠진 무리들’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불온 p149)”라고. 그에게 진보는 “한 줌의 지배계급이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에 대한 혁명은 한 줌의 지배계급이 차지하던 것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남보다 잘 먹고 잘 사는 일 자체를 부끄러워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불온 p159).
김규항에게 오늘날 진보의 시작점은 국익이나 애국이 아니라 계급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세상은 나쁜 놈과 좋은 놈이라는 도덕적 차이로 구분되는 게 아니라, 어떤 계급인가 혹은 어떤 계급의 편에 서는가의 이념적 차이로 구분(불온 p62)”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보듯, “보수 정치의 기만성에 넌더리를 내며 진보 정치의 중요함을 내비치던 사람들도 막상 선거철이 되면 마법에라도 걸린 듯 보수 정치에 목을 맨다.” 아마도 그런 국민들에게 “진보란 대개 좋은 보수를 뜻(불온 p99)”하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선 뒤 민주노동당이 격고 있는 내분을 보면 진보에 더 실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내분은 “세상을 바꾸려 싸우는 사람들”의 “반목”이기도 하고,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그 “치열함이 그들의 크고 작은 차이들을 두루뭉술하게 넘길 수 없도록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계급이라는 체로 걸러지지 않는 민족주의는 또 다른 형태의 엘리트주의에 불과(불온 p114)"하기에, 이번 종북주의 문제는 분명 진보정당으로서 반드시 겪어야 할 논쟁으로 보인다. 국가주의 또한 세상을 계급으로 보는 데 걸림돌로 작용한다. 실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부”는 “삼성이나 SK 같은 자본들과 자신의 문제를 ‘애국심’으로 통합하려는 지배계급에게 사용되었”고, “그 대열을 이룬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전혀 사용되지 않(불온 p197)”았다. “국익을 위해서라면 노동자는 시키는 대로 일하고 주는 대로 받아야 하고 농민은 모두 배를 가르거나 몸을 불살라도 어쩔 수 없으며 청년들은 기꺼이 더러운 전쟁에 총알받이로 나가야(불온 p134)”하는가? “세상의 어떤 나라에도 나라의 (단일한) 이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라는 중층의 여러 계급들로 이루어진다. 계급들의 이익은 몹시 다르거나 심지어 적대적이다.” 사실은 “국익이란 실은 지배계급의 이익을 속여 이르는 말이다. 지배 계급은 언제나 자기들의 이익을 국익이라 주장한다(불온 p135).”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정직하게 땀 흘리며 살아가는 사람들끼리의 연대지 적대하는 계급끼리의 통합”이 아니다. “한국의 자본과 노동자가 애국의 이름으로 하나될 때 노동자에게 돌아올 건 죽음뿐입니다(불온 p95).” 희망의 증거들 그가 비판하는 모든 위선들은 죄다 거북살스러운 현실주의자들이다. 현실 순응자이고 미래 패배자들이다. "혁명가의 이력을 팔아 문화자본가로 행세하려는 싸구려 코미디언에서 현실적 절망감을 우주적 깨우침으로 초월하려는 얼치기 도사(불온 p60)"와 개혁을 진보라고 생떼 쓰는 지식인들, 시민운동 세력 그리고 제도 미디어 등등. 그러나 그의 글에선 우뚝한 ‘정신들’도 담겨져 있다. “몸이 늙는 건 숙명이지만 정신이 늙는건 선택(불온 p97)”이듯 "대개의 사람들이 조금씩 하루도 빠짐없이 신념과 용기와 꿈이 있던 자리를 호의와 비굴과 협잡으로 채워 갈 때, 그런 순수한 오염의 과정을 철이 들고 성숙해 가는 과정이라고 거대하게 담합할 때, 여전히 신념과 용기와 꿈을 쫓으며 살아가는 청년들(불온 p98)"이 있다. 그리고 “분노를 실어 나르는” 활동가들에 대한 애정도 글에 흥건히 묻어난다. 그 “철없는 비타협의 정신들이, 청년의 몸에 노인의 정신을 가진 수많은 우리가 망가뜨린 세상을 복구하는(불온 p98)"것이다. 또 “제 아비의 계급이나 지역 따위에 아직은 제 정신을 빼앗기지 않은 상태에(불온 p144)” 있는 아이들도 희망의 증거 가운데 하나이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제가 스스로 깨달은 것을 삶에 반영(불온 p144)”하기 때문이다. “아이라 불리는 인간들이 어른이라 불리는 인간들과 가장 다른 점은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혹은 ‘세상이 다 그런 거지’라는 말을 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불온 p144).” 진보주의로 살아가기
“사회주의는 이론이나 사상에서 태어난 게 아니라 ‘인간 영혼의 가장 고귀한 감정의 항거에서 태어난다. 사회주의는 비참함, 실업, 추위, 배고픔과 같은 견딜 수 없는 광경이 성실한 가슴에 타오르는 연민과 분노와 만나 태어난다. 한쪽엔 호화, 사치가 있는가 하면 다른 쪽엔 궁핍이, 또 한쪽엔 견딜 수 없는 노동이 있는가 하면 다른 쪽엔 거만한 게으름이 있는, 이 터무니없고도 서글픈 대비에서 사회주의는 태어났다.’(레옹 블룸) 연민은 자선을 낳고 분노는 싸움도 별 소용이 없다는 깨우침을 통해 과학적 사회주의가 된다. 말하자면 사회주의란 '정서를 재료로 한 과학'이다(B급 p161).” 사회주의가 정서의 과학이 듯 진보주의자도 그 신념의 밑바탕에는 약자에 대한 연민이 자라하고 있다. 입은 진보이고 몸뚱이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달려드는 천둥 벌거숭이 같은 ‘가짜’ 진보와 진보주의자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세상을 뜯어고치자는 의견을 갖는 사람이고 세상을 뜯어고치는 일이란 현재 세상에서 억압받는 사람들 편에 서는 일을 출발점(B급 p255)”으로 하는 진짜 진보주의자는 흔치않다. “그 출발점에 제 삶의 조건을 억압받는 사람들의 삶의 조건으로 제한하는 진보주의자의 숙명적인 도덕률(B급 p255)”을 지켜가기가 참으로 힘들기 때문일 테다. “좌파로 사는 일을 우파로 사는 일에 비할 수 없이 어려우며, 어느 시대나 좌파로 살 수 있는 인간적 소양을 가진 사람은 아주 적다.” 그것은 “우파는 자신의 양심을 건사하는 일만으로도 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B급 p203)”라는 그의 말처럼 말이다. 이러한 김규항의 이상주의는 외려 지독하게 정직한 현실인식에서 나온다. 사실 이상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이는 각종 ‘현실주의자’들의 현실주의는 현실이 아니라 ‘주의’가 따라다니는 일종의 상상된 머릿속 현실이다. 오히려 냉엄한 현실인식이 바탕이 된 숙성된 비관주의는 순응과 패배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의지를 준다. 자본이 조장하는 날것으로서의 욕망이 넘치는 이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시대를 살면서, 진보를 믿는 다는 건 허무맹랑한 짓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산을 넘고자 하는 열망이 유전자의 저장고에 축적되어 비로소 새가 날개를 진화의 선물로 얻었듯, 진보에 대한 열망 또한 같다고 생각한다. 작게 보면 한 사람의 단 한 평생의 소소한 열망처럼 보이지만, 공간의 지평과 시간의 흐름에서 넓고 또 꾸준히 열망한다면 그건 우리의 유전자처럼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이 현실이 되는 것이다. 새가 날개를 가졌듯 말이다. 덧붙이기 1. 김규항 글을 읽는 재미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소소한 일상사에 대한 묘사이다. 특히 <딸 키우기1,2> <우주> <그 여자와 함께한 10년> <딸에게 보내는 편지> 등 딸을 키우는 일상의 모습은 쏠쏠히 읽히면서도 한국에서 사는 여성와 교육문제를 곱씹게 한다. 2. 김규항 글의 중요한 등장 인물(?)은 예수이다. 2000년 전 예수를 끌어와 현실 속 위선을 드러내고, 정치적 긴장감이 살아있는 오늘의 예수로써 사회와 교회를 비판한다. 3. 날라리에 대한 애정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폭주족을 위한 변명> <날라리들 고고하다> 등이 재미있다. 4. 그리고 광주에 대한 얘기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광주단상> <광주의 정신, 민주주의 정신> 등도 빠뜨리지 말고 읽어 봐야 할 글들이다. 5. 김규항의 모든 글은 그의 블로그(http://gyuhang.net)에서 볼 수 있다. 블로그에 가면 그가 발행하는 어린이 잡지인<고래가 그랬어>(카페 http://cafe.naver.com/dreamwhale)에 대한 소식도 틈틈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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