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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눈이 흐리다. 초점이 잘 안 맞는 것 같다. 훈련 내내 눈이 따갑기에, 강사에게 물어보니 "여기 물이 염소가 많아 좀 독하다"고 했다. 그리 보면, 본래 다니던 센터 물은 정말 부드러운 편이다. 적어도 눈이 시리지는 않으니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좋아지겠지만, 글씨가 흐리멍텅해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그래도 여기서 무릎꿇을쏘냐. 자, 넷째날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17일 오전, 잠을 자다 갑자기 눈을 떴다. 순간, 뒷목이 싸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잽싸게 머리맡에 둔 휴대전화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이런.' 11시 2분이었다. 잠실까지 가는 데는 아직 시간이 충분하다. 여유를 부려도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는 '숙제'다. 전날 밤 '오늘은 일찍 자니 내일 일어나서 쓰면 되겠지' 하고 손도 대지 않았다. 자학할 시간도 없다. 급하다.

12시 30분까지 도착해야기에, 시간을 최대한 짜봐야 1시간 남짓이다. 책 두 권을 들고 잽싸게 책상에 앉았다. 다음은 그야말로 '일필휘지'(一筆揮之). 영어론 'dashing off with one stroke of a brush'. 잠시 학창 시절로 돌아가 보자. 중고등학교 때 죽도록 썼던 '깜지'를 기억하는가.

연습장을 볼펜으로 빼곡히 채우면 까만 종이처럼 보인다고 해 이름도 '깜지'다. 주로 제일 싼 모나미볼펜을 썼는데, 한창 깜지를 쓰다보면 야릇한 냄새가 솔솔 풍긴다. 볼펜 똥 타는 냄새다. 보통 한번 숙제에 2~3장은 기본으로 써야 했기에 잠을 조금 더 자려고 '미췬~듯이' 갈겨썼다. 보통 1장 반 정도가 넘어가면 어김없이 이 냄새가 났다.

그런데, 오늘 그 추억의 냄새를 맡았다. 그만큼 1분이 절박했다. 절실했다. 가는 시간을 붙잡을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는 마음까지 들 정도였다. 다행히 옛 실력은 녹슬지 않았다. 글씨는 바람만 불어도 훌훌 날아갈 것만 같지만, 일단 종이는 채웠다.

오전 11시 57분쯤, 겨우겨우 3장을 채웠다. 모두 6바닥. 1시간이 채 안 걸린 셈이다. '휴, 다행히 한 고비는 넘겼다.' 수영장으로 "고고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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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수영장. 항상 시작은 체조 후 몸풀기다. 여기 말로는 '워밍업'이라고 한다. 자유형, 배영, 평영, 횡영, 역가위차기, 기본 배영, 구조 영법 등을 골고루 섞어 수영장을 도는 것이다. 모두 합치면 1400m 정도 된다. 속도보다는 자세에 신경 쓰기에, 힘을 많이 들이지 않아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이날 워밍업은 말 그대로 '몸을 따뜻하게 뎁힐' 정도였다.

불행은 그 뒤에 찾아왔다.

어디선가 큰 소리가 들려왔다. "전원, 퇴수(退水)!" 영문을 몰라 두리번거리고 있던 찰나, 강사의 불호령은 계속됐다. "니들 이렇게 느슨하게 수영할래? 나아지는 게 있어야지, 왜 어제보다 못해? 이렇게 계속 할 겁니까?"

수강생 37명 모두, 물 밖으로 뛰쳐나왔다. "지금부턴 다리벌려들어가기로 입수, 헤드업 자유형으로 끝까지. 대시(dash)로 갑니다. 도착한 뒤에는 곧바로 뛰어와 줄에 섭니다. 만약 늦게 걸어와 줄이 끊어지면, 될 때까지 계속 돕니다. 알겠습니까?" 강사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졌다. 뭔가 마음에 안 든 모양이었다.

사실 언젠가는 한 번 이럴 줄 알았다. 일종의 '나사 조이기'. 그런데,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아침에 숙제 때문에 놀랐는데, 오후에 갑작스런 체력훈련까지. 안 좋은 일은 꼭 이렇게 항상 한꺼번에 일어난다. 오죽하면 '머피의 법칙'이란 말까지 생겨났을까.

그 뒤의 일은 기억하기도 싫다. 호루라기 소리가 나면, "전방에 익수자 발견!"을 목이 터져라 외친다. 소리가 작으면 다시. 물에 들어가면 바로 헤드업 자유형 대시. 속도가 조금 떨어지거나, 고개를 숙이면 멀리서 고성이 들렸다. "야~ 이리 나와. 다시!" 같은 방식으로 한 20번은 한 듯싶다.

정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출발선에선 수강생들의 헉헉대는 소리가 요란했다. "빨리 안 뛰어!" "그래~ 그렇게 계속 해봐라~ 누가 피곤한가" 강사의 호통은 그칠질 몰랐다. 눈앞이 점점 노래졌다. '아~ 이대로 죽는 걸까.'

경험이란 참 무시할 수 없었다. 숨이 목 끝까지 꽉 들어차 '툭' 건들면 터질 것 같은 그 순간, 훈련은 끝났다. 이 사람들,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만, 어떡하면 안 죽는 방법도 꿰뚫고 있다.

약 5분간 숨을 고른 뒤 곧바로 수업이 시작됐다. 전날에 이어 방어 기술인 '막기'다. 익수자(溺水者)가 돌연 두 팔을 크게 벌리고 확 덮치려고 할 때, 한 손으로 쇄골 바로 밑 부분을 손바닥으로 막아 밀어내는 것이다. 이때 손을 곧게 세워 막는 게 아니라, 우선 받치고만 있다가 물 속에서 밀어내는 게 핵심이다. 그 뒤에는 뭐? 도망쳐야 한다. 혹시나 다리라도 잡히면 큰 일, 죽자 사자 도망쳐야 한다. 그래도 시선은 어디? "익수자."

다음은 한 손을 잡혔을 때다. 이때는 본격적으로 저항한다. 잡힌 손을 몸 쪽으로 끌어당긴 뒤, 다른 한 손으로 마주보는 익수자의 어깨를 세차게 누른다. 자기 몸무게를 양껏 실어서 말이다. 그러면 익수자는 물 속에, 구조자는 물 위에 뜨게 된다. 그 사이 잡힌 손을 살짝 비틀어 공간을 만든 뒤, 잽싸게 빠져나간다. 도망칠 때는 '미췬듯이'.

양손으로 손을 잡혔을 때도 마찬가지다. 잡힌 손을 몸 쪽으로 잡아끌어, 다른 한 손으로 어깨를 누른다. 대신 이번엔 잡힌 손과 다른 한 손을 깍지를 낀 뒤 힘껏 뒤로 젖혀 빼야 한다. 다음은? 굳이 말 안 해도 알 테다.

실습이 끝날 무렵, 강사들이 한 쪽에 모여 수군대기 시작했다. 왠지 불안한 기운이 느껴졌다. 뭔가 터질 것 같았다. 예상은 적중했다. "자~ 다음은 그동안 배웠던 기술을 연습합니다. 대신 익수자는 강사들이 맡습니다. 제대로 못하면, 무슨 일을 할지 모릅니다." 악명 높은, '물 먹이기 실전 훈련' 시간이다. 순간 라이프가드를 딴 한 지인의 말이 떠올랐다. "다른 건 다 참을 만한데, 강사들이 물 먹일 땐 좀 조심해라. 장난 아니다."

으스스 몸이 떨렸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가 된 기분이 들었다. 친숙하던 물도 조금씩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이내 공포의 수업은 시작됐다. 방식은 이렇다. 실습 전 간단하게 할 구조법을 설명해준 뒤, 그대로 하면 된다. 예컨대, "이번엔 '수하(水下)접근'(전편 참조)입니다. 입수는 다리벌려들어가기, 접근은 헤드업 자유형"이라는 식이다.

두려운 마음에, 약간 뒤쪽에 줄을 섰다. "삑~"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선두가 출발했다. 서서히 접근하는 선두. 익수자와 거리를 좁힌 뒤 '빠른수면다이빙'으로 들어갔다. 아직은 평화롭다. 순간! 물결이 요동쳤다. "푸하~ 푸하 욱…악…퍼…어…사…으아…" 눈을 뜨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이거, 한두 곳이 아니다. 물을 마시고 켁켁거리는 이는 기본이요, 심지어 강사에게 4~5m 를 쫓기는 이도 있었다. 보는 이는 즐겁지만, 당하는 사람은 필사적이다. 살기 위해서. 2분여 뒤 돌아온 우리 선두. "왜 그랬냐"고 묻자 "골반에 손을 안 댔기 때문"이라고 했다. 가르쳐준 대로 하지 않으면 익수자가 물귀신으로 돌변한다는 얘기다. 선두그룹의 헌신적인 희생으로 다음부턴 쫓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행이 물도 먹지 않았다. '고맙다. 동기야.'

다음은 '잠영'(潛泳). 물 속으로 잠수를 해서 가는 영법이다. 라이프가드를 따려면 잠영 25m를 해야 한다. 라이프가드 강사는 50m다. 간단한 설명 뒤, 시범이 있었다. 멀리서 남자 강사 한 명이 크게 숨을 들이 마신 뒤 출발했다. 정말 돌고래가 따로 없었다. 세네 번의 손놀림으로 반대편까지 왔다. 25m를 왔을 때 멈출 줄 알았던 그가 곧바로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향했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50m 잠영을?' 설마가, 사람 잡았다. 숨이 차지도 않은 듯 그는 유유히 다시 출발점까지 갔다. "브라보~"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말로만 들었지, 50m 잠영을 실제로 보기론 처음이었다. 동네 체육 센터에서 하는 잠영과는 다르다. 5m 풀은 자칫 물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기에, 같은 50m라 해도 실제론 더 거리가 더 멀다. 5m 풀에 들어가 본 사람은 안다. 나도 모르게 서서히 바닥으로 추락하는 느낌을.

"모두 입수!" 잠영 실습이 끝나자, 외마디 고성이 적막을 깼다. 시계를 봤다. 오후 5시 32분. 입영 시간이다. 오늘도 어김없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필사적으로 발을 놀렸다. 그래도 첫 날보다는 훨씬 수월하다. 허벅지, 종아리에도 힘이 덜 들어가는 느낌이다. 한 손 들기, 양손 들기도 조금씩 적응이 됐다.

수강생들이 손을 든 채 입영 연습을 하고 있다. 가장 힘든 훈련
중 하나인 입영을 수십 분 이상 지속하다보면 물 몇 컵 분량은 기본
으로 먹는다.
 수강생들이 손을 든 채 입영 연습을 하고 있다. 가장 힘든 훈련 중 하나인 입영을 수십 분 이상 지속하다보면 물 몇 컵 분량은 기본 으로 먹는다.
ⓒ 안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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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입영은 나날이 새로워졌다. 오늘의 압권은 '손 말리기'. 양손을 물 밖으로 꺼낸 채 입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반대쪽에 있는 수강생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양 손을 휙휙 휘두르기도 했다.

속으로 '왜 그러지' 싶었지만, 강사가 시켰으려니 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여학생이 "다 말랐어요"라고 외치며 강사에게 손을 내 보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강사의 말. "퇴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생긋 웃는 얼굴로 밖으로 나가는 게 아니가.

내막은 이랬다. 먼저 나간 여학생에 따르면, 강사가 "손을 빨리 말린 사람은 물 밖으로 먼저 보내준다"고 말했다고 했다. 손을 몰래 집어넣는 이들을 걸러내기 위해 일종의 '꼼수'였다. 하지만 바로 옆에서 싱크로나이즈 선수들이 훈련하는 탓에 강사의 말을 못 들었던 것이다.

발악이 시작됐다. 발이 조금씩 저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박수도 쳐보고, 손을 세차게 흔들고, 입김을 불어 손을 말리기도 했다. "으악~ 강사님, 저 손 다 말랐어요~!!" 3분 여 뒤, 난 지옥에서 탈출했다.

마지막 조회시간. 숙제 바구니가 앞에 놓여 있었다. 날림으로 한 숙제였기에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신은 나를 버리지 않았다. "제가 오늘 채점해보니까 대강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숙제 성실히 안 하면 안 돼요" 귀여운 여자 강사가 말했다. 채점도 어제와는 다른 사람이 했다는 것. 떨리는 마음으로 노트를 펼쳤다. 'B-' 예상밖의 높은 점수였다. 물론 따끔한 한 마디는 있었다. "글씨 좀 예쁘게 쓰세요. 알아볼 수 있도록."

뭐야, 근데 아직까지 눈이 흐리다. 혹시 이상이 있는 건가.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블로그(goster.egloo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수상인명구조원, #라이프가드, #도전 이기자, #입영, #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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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내가 밉습니다. 화가 나도 속으로만 삭여야 하는 내가 너무나 바보 같습니다. 돈이, 백이, 직장이 뭔데, 사람을 이리 비참하게 만드는 지 정말 화가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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