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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가장 싫어하는 말은 'NO'다. 무슨 일을 추진할 때 제도적인 한계나 현실성을 들어 '무조건 안된다'고 말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서울시장 재직 시절, 청계천 사업이 대표적이다. 건설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탓이다. '결과로 말하고 결과로 따지는' 전문경영인(CEO)의 행동양식이 그대로 배어난다.

 

그런 그가 요즘 가장 많이 듣는 말이 'NO'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들어앉아 있는 서울 삼청동 금융연수원 정문 앞은 하루에도 3-4차례씩 집회와 기자회견, 성명서 발표를 하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일찌감치 자리를 잡은 '1인 시위'는 하루도 빠지지 않는다. 지난 16일 인수위가 발표한 정부조직개편안 때문이다. 한결같이 '… 결사 반대', '… 철회하라' 등의 구호와 피켓이 춤을 춘다.

 

인수위 앞에서만 그러는 것도 아니다. 가깝게는 인수위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청와대에서부터 멀리는 제주도까지 예외가 없다. 심지어 바다건너 미국 뉴욕에 있는 유엔(UN)에서조차 '우려'의 목소리를 담은 편지가 날아왔다. 향후 5년의 국정운영 밑그림을 짜는 중요한 시기라고 이해되기에는 그 출발이 너무 요란하다. '이명박호'의 항로에 안개가 드리워진 이유다.

 

성명서, 기자회견, 집회... '항의' 봇물

 

지난 22일 매일경제와 베인&컴퍼니가 주최한 '대한강국 국민보고대회'에 참석한 이명박 당선인은 작심한 듯 13분 동안의 강연 시간 중 절반을 할애해 공직사회를 강하게 비판했다. "공직자들이 이 시대에 약간의 걸림돌이 될 정도로 위험수위에 온 것 같다"는 것이다. 최근 인수위가 내놓은 정부조직개편안과 대대적인 규제완화에 대한 공직사회의 조직적 반발을 겨냥한 것이다.

 

이 당선인의 말 한마디로 전남 대불공단 전봇대 2개가 3일만에 뽑혀나가면서 공직자들의 대표적인 탁상행정의 사례가 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이명박식 정부조직개편과 규제완화에 대한 반발은 공직사회 밖에서 더 뜨겁다. 목소리의 주체도 시민사회단체, 교육계, 학계, 여성계, 과학계 등 다양하다.

 

23일 하루만 해도 곳곳에서 수차례의 집회와 기자회견이 잇달아 열렸다. 이날 민주주의법학연구회 소속 법학과 교수 147명과 인권운동사랑방 등 47개 인권단체들은 국가인권위의 독립성 보장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런 반발 기류는 이미 유엔 고등판무관, 국제앰네스티 등 국제인권기구가 인수위에 우려를 표명하는 서한을 보내면서 국제적인 이슈로까지 부상했다.

 

이날 경제개발협력기구(OECD)도 과학기술부 해체를 골자로 한 정부조직개편안에 대해 "문제가 있다"며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 국내 과학기술 단체들도 과기부 폐지반대 500만 서명운동에 돌입했고, 기초과학 및 공학분야 8개 학회는 과기부 해체를 반대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지난 22일에는 해수부 폐지에 반대하는 국회의원과 전국 해양수산단체 대표 등 300여명이 국회의사당 본관 앞에서 '해수부 존속 국민대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관련 단체 대표 2명은 삭발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정부 조직개편에서 역할 축소가 우려되는 금융감독원 직원들도 집단 반발 움직임을 보였다.

 

정부 부처에서 떠나 정부출연 연구기관으로 바뀌도록 돼 있는 농업진흥청도 논란이 뜨겁다. 전국 농업관련 학계와 단체에서 비난 성명 42개를 쏟아내는가 하면 전국 50여개 농민관련 단체들이 반대 시위에 나섰다. 남북공동선언제주실천연대와 제주통일청년회 등 제주도내 사회단체들은 인수위가 국회에 제출한 4.3위원회 폐지 법률안 철회를 촉구했다.

 

교육계의 반발을 수용해 '인적과학부'를 '교육과학부'로 고쳤지만, 22일 내놓은 '대입 3단계 자율화 방안'은 더 큰 혼란과 불만을 불러왔다. 여성가족부가 보건복지부로 통합되는 문제를 놓고는 여성계가 초강경 대응에 나섰다.

 

인수위의 '방송통신위원회의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안'에 대해서는 전국언론노동조합과 한국방송인총연합회가 잇달아 성명을 발표하며 반대 입장을 밝혔다. 통일부 폐지 및 외교통상부와의 통폐합에 대해서는 이를 비판하는 시민사회단체가 토론회를 통해 공론화에 나서고 있다.

 

 

"전면 재검토"에 '거부권' 시사까지...장관없이 국장들만 데리고 시작?

 

정부조직개편안의 국회 통과에 열쇠를 쥐고 있는 대통합민주신당을 비롯한 '예비' 야당들의 반대 목소리도 시간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한나라당은 23일부터 행자위 등에서 정부조직법 개정안과 관련 법률을 심의한 뒤, 28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키겠다는 계획이다. 2월 25일 이명박 정부의 출범에 맞추려면 시간이 별로 없다. 


그러나 대통합신당측은 법안에 대한 공청회 등을 거쳐야 하는 만큼 빨라도 2월 초나 돼야 국회 본회의를 열 수 있다는 입장이다. 국회 행자위원장인 유인태 대통합신당 의원은 "28일 국회 본회의 통과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며 2월 초에나 처리될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원내 제1당인 대통합신당은 '통일부 폐지만 저지하고 나머지는 협의해 보겠다'던 당초 입장에서 선회해 전면 재검토를 요구하고 있다. 민주노동당, 민주당도 같은 상황이다. 반면 한나라당은 '원안 통과'를 고수하고 있어 양측의 정면 충돌이 불가피해 보인다.

 

심지어 퇴진을 앞둔 현 청와대에서조차 정부조직개편안을 강도높게 비판하고 나섰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22일 국무회의에서 "내용에 문제가 많아 심각한 부작용이 예상되고 절차가 매우 비정상적"이라면서 "대통령의 철학·소신과 충돌하는 개편안에 서명·수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한발 더 나아가 인수위가 졸속으로 마련한 개편안을 국회가 그대로 처리한다면 이에 대해 협조하기 어렵다며 '거부권 행사'를 시사했다.

 

이명박 정부로서는 정부조직개편안이 처리되지 않을 경우 조각명단을 발표할 수 없고 경우에 따라선 장관없는 대통령 취임식이 이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명박 당선인은 최근 당 지도부를 만난 자리에서 "조직개편안이 잘 처리되게 해달라. 안되면 장관없이 국장들만 데리고 (시작)하는 상황이 벌어진다"고 우려를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방향 정하고 밀고가는 게 공무원 닮았다"

 

이미 인수위 출범 초기부터 대대적인 정부조직개편안을 두고 '과욕의 사례'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었다.

 

한때 인수위원장으로까지 거론됐던 윤여준 전 환경부장관은 지난달 희망제작소가 주최한 '대통령직 인수 심포지엄'에서 "노무현 정부가 방만하게 운영한 정부를 축소해야 한다는 공감대는 형성돼 있었다"면서도 "그러나 인수위가 정부조직을 개편하겠다는 것은 자칫 과욕의 사례로 남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윤 전 장관은 이어 "대부분 3공화국에서 변형된 지금의 정부조직을 새로운 시대의 정부형태로 바꾸기 위해서는 충분한 토론과 국민적 공감대가 있어야 한다"며 "인수위에서 정부조직을 개편한다면 국민 공감이 부족할 뿐 아니라, 과연 국회를 통과할 수 있겠느냐"고 우려했다. 결국 윤 전 장관의 우려가 현실화된 것이다.

 

김광웅 서울대 명예교수는 정부조직개편안이 각계의 비판에 부닥친 이유에 대해 "논리적인 설명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김광웅 교수는 "정부가 바뀌면 정부조직이 당연히 바뀐다고 생각하고, 역대 정부도 그렇게 해왔다"면서 "그러나 이번 개편안은 본말이 전도됐다.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고 하면서 줄이는 기관을 왜 없애는지에 대한 정당한 설명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또 "미래를 지향한다고 하면서 미래에 대한 장기적인 플랜도 보여주지 않았고, 조직개편 방식도 전혀 새롭지 않다"며 "그냥 몇 사람들 모여서 방향 설정해 밀고가는 게 꼭 공무원들이 하는 행태와 같다"고 질타했다.

 

'공직자=걸림돌'이라는 비판이 '부메랑'으로 되돌아온 셈이다. 공개적인 토론을 생략한 채 단기간에 '밀실'에서 태어난 정부조직개편안도 문제지만, '이명박식 독선과 과욕'으로 추진하면서 초래된 혼선과 갈등이 결국 새 정부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지적이다.


태그:#이명박 인수위, #정부조직개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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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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