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이 글은 민경진 기자의 "영어도 커뮤니케이션 도구일 뿐이다"라는 기사에 대한 반론으로 쓰여졌다. 그러나 기사화하기 위해 퇴고하는 과정에서 예전에 적어놓은 영어교육에 대한 단상을 덧붙여 의견을 드러내고자 한다. 민경진 기자에 대한 반론은 편지글 형식으로, 그 외의 부분은 일반적인 평서문 형식으로 서술했다. [기자 주]민경진 기자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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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도 커뮤니케이션 도구일 뿐이다"라는 기사에서 제시한 인도나 동남아의 사례는 적절하지 못합니다. 그 나라들은 다언어 국가이기 때문에 특정한 공용어의 사용 없이는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식민지 경험 탓에 영어가 공용어가 되었을 뿐이지 영어의 효용성으로 인해 영어를 '채택'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나라에서 정책홍보를 위한 책자는 영어를 모르는, 그러나 다른 공용어를 사용하는 이들을 위해 서너 가지의 언어로 출간되고 있습니다.
이에 수반되는 행정적 불편함을 넉넉히 짐작하실 수 있겠지요? 아무리 영어 교육을 해도 일상적인 소통의 언어로는 한국어가 사용될 수밖에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우리는 간과하고 있습니다.
또한, 일본의 예 역시 적절치 못합니다. 일본인들이 영어를 못한다고 경제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후진국입니까? 오히려 영어권 국가들이 일본에 잘 보이기 위해 안달이고 일본어가 교역의 주요언어로 자리 잡았으며 어디를 가도 쉽게 일본어 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제공하려고 하는 현실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를 들어 하와이의 어느 지역을 가더라도 일본어는 제2의 언어 대접을 받고 있고 일본인 관광객은 아무런 불편 없이 오히려 자랑스럽게 일본어를 구사하면서 손님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그 점은 왜라고 생각하십니까?
영어를 '운영체제'라고 표현한 것이 적절한 비유라는 데에는 공감합니다. 그러나 윈도 독점체제에서 한국의 인터넷 시장이 아무런 저항 못하고 마이크로소프트사의 횡포에 휘둘리는 점은 간과하신 것 같습니다. 똑같은 이치입니다. 영어를 쓰는 것은 단순한 인프라 구축이나 운영체제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영역에서 영어권 나라들에게 우선권을 양보해야 하는, 자국문화 말살의 첫걸음입니다. 영어가 필요한 사람들만 필요한 수준에 맞게 영어를 잘하면 됩니다. 앞서 언급한 일본처럼 말입니다.
영어라는 언어가 얼마나 치열하게 언어에 기반을 둔 문화를 축적해왔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뒤에 좀 더 상세히 이야기하겠지만 영어는 적어도 사오백 년간 동일한 언어로 사유하고 축적해온 언어문화체계입니다. 기자님께서 주장하듯 단순히 그냥 받아들여서 쓰면 되는 운영체계 인프라 차원이라고 생각할만한 수준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어는 이제 제대로 자리 잡은 지가 사십 년 남짓입니다. 한국 문화가 세계적 문화유산의 일원으로 필요하다면, 한국어로 한국 문화와 세계 문화를 사오백년 이상 사유해 다듬어 무형의 정신적 언어문화를 축적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영어가 공용화되면 발생할 불편함과 비효용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마이뉴스>의 수많은 시민기자도 영어로 기사를 쓰다가는 몇 문장 못쓰고 빈약한 표현에 머릴 쥐어뜯으며 절필하게 될 것입니다. 영어 사이트 따로, 한국어 사이트 따로 라는 식은 결국 지금의 방식과 같으니 굳이 영어 조기교육을 해야 하거나 공용화를 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기자님께서 쓰신 기사는 얼마 만에 작성하셨습니까? 그다지 퇴고를 거치지 않고도 유려하게 쓰신 기사를 지금 당장 영어로 쓰시려면 얼마만의 공력과 노력이 필요한지, 그리고 그것의 어법적 정확성과 유려함까지 고려한다면 또 얼마나 노력을 들여야 하는지 고려해보시기 바랍니다(기자님에 대한 인신공격의 차원이 아닌, 언어 구사의 효용에 대한 예로 읽히길 바랍니다).
보통 사람들이 기본적인 의사전달조차 그렇게 힘들게 해야 할 이유, 그런 운영체제 인프라를 갖추어 시간과 정력을 낭비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어려서부터 외국어 조기교육을 하면 한국어와 영어 두 가지 모두 제대로 갖추지 못한 '언어 미아'가 양산될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에게는 언어 말고도 다양한 재능이 있습니다. 영어 조기 교육은 영어를 기준으로 부와 재화를 계층화, 계급화하려는 논리일 뿐입니다. 영어가 재미있고 재능이 있어 그 언어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펼치고자 하는 분들에게는 의무적 조기교육 자체가 필요 없습니다.
다른 재능을 가진 사람이 언어에 대한 무능이라는 열등함을 느끼며 고통받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이유가 무엇인지 저는 알지 못할 따름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찬 드림
외국어로 사유하기에 대하여다른 나라의 언어로 사유하고 글을 쓴다는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사실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자신의 모어 - 태어나서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되어 공기처럼 물처럼 편한 언어 - 를 잠시 접어두고 스무 살이 넘어 배운 언어로 학문적인 언어를 구사하려고 덤비는 것은 거의 미친 짓에 가깝다.
가만히 생각해보라. 지구촌 어느 구석의 작은 나라 - 아프리카도 좋고 유럽의 어느 나라도 좋은 - 에서 온 젊은이가 한국문학이나 역사를 공부해서 한국어로 학술논문을 쓰고 한국어로 학술토론을 하고자 할 때 한국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한국문화와 언어를 익힌 한국의 학자와 견주어 이루 상상하기 힘든 고통을 겪으며 몇 배의 시간을 허비하면서도 뛰어난 업적을 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현재 한국에 불고 있는 영어 세계화의 바람이 이와 같이 매우 쉬운 비교적 시각조차 결여한 채 이루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안타까울 뿐이다. 문학과 철학, 역사를 담당하는 선생들조차 조목조목 반박하는 글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다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외면하는 탓인지, 아니면 찬성 논의를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권력에 미운털이 박히기를 두려워하는 보신의 처세에서 비롯된 것인 지 모르겠다.
한나라의 문화와 역사가 오롯이 제나라의 언어로 기록되고 전승되지 않는 이상 그 나라 다운 문화적 특질과 정신을 계승하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현재 대학에서 요구하는 영어강의나 영어 세계화는 우리의 모든 문화적 사유를 영어로 하기를 바라는 잠재의식이 내재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염려가 앞선다.
신라 이래 한반도 내에서 이루어진 과거의 거의 모든 학술적 기록이 한문이어서 그 소중한 전승들을 지금 우리가 우리의 것으로 체화하는데 아직도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잘 안다. 70년대까지도 어느 문중의 묘비에는 한문으로만 쓸 것을 요구했다 하니 한문으로 쓰인 글이 무슨 마법을 부리는 것도 아닐진대 읽지도 못할 글을 써서 자랑하는 것은 헛된 권위의식 밖에 무엇이라 해석할 수 있을까.
더욱이 그 오랜 기간 한문으로 학술활동을 영위해왔으면서도 우리네가 이렇듯 우리의 편한 글과 말을 지켜왔고 한문이나 중국의 현대문장을 모어처럼 구사하지 못한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세계화라는 미명하에 영어의 체득을 강조해 수천년이 지난다 해도 영어가 토착화 과정을 거쳐 한국어의 일부로 접붙여 질뿐 우리네 언어가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지금도 수많은 한자 개념어를 섞어 사용하듯 말이다.
예를 들어 영어를 몇백 년 쓸 경우 "난 투데이에 북을 리드해야 해"라거나 "코리아의 아이텐티티가 잉글리쉬를 유즈하다보니 크라이시스야"로 바뀔 뿐이다. 이는 한국어에 일가견이 있는 고종석씨의 견해를 빌어 온 것이다. 난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언어는 그렇게 지평을 넓히고 혼혈되어 자가발전을 거듭할 것이다.
그렇다고 한국인의 자의식을 담을 수 있는 우리 글을 가꾸고 다듬어 나가고자 하는 노력 자체를 접어두자는 말은 아니다. 하나의 언어로 사유의 깊이를 지속적으로 발전, 확대 심화하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문화적 힘을 발휘하는 지는 그렇게 체화하고자 하는 영어만 봐도 알 수 있다.
1611년에 나온 킹제임스버전의 성경은 지금도 읽는데 그다지 어려움이 없다. 셰익스피어의 글도 대학에서 문학적 교양을 쌓은 이라면 그다지 힘들지 않다고 한다. 그네들은 적어도 한 가지의 언어로 400~500년을 지속적으로 사유하고 생각해왔다는 소리다. 그것이야말로 현재 영미권이 엄청난 문화적 역량을 발휘하고 있는 저력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지금 우리가 영어로 따라잡겠다고? 셰익스피어가 자다가 웃을 일이 아닐까 싶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세종이 희대의 폭군이어서 한글창제 이후 모든 문자 활동에 한글본을 의무적으로 만들라고 강제했더라면 우리의 문자 생활이 그리고 우리의 정신세계가 어떠했을까 상상해본다. 고등학교 국어 과목에서 세종시대의 글을 배운 이라면 막힘없이 술술 읽고 한글의 어휘가 풍성해졌을 것이라는 상상 말이다.
수천 년 한문으로 학술활동을 하고 제대로 된 한글세대라는 자긍과 자의식을 가졌던 평론가 김현 세대로부터 지금까지를 다 헤아린다해도 30∼40년이 될까 말까 한다. 그런데 다시 고등교육을 한다는 대학에서 영어로 학문활동을 채우자고 한다. 다시 수천 년을 영어로 학술활동 해야 하는 운명인 것인가?
미국에 오랫동안 살면서 학문활동을 하신 선생님들조차 영어는 여전히 불편한 그 무엇이다. 예를 들어 미세한 머리카락을 집어 만지작거려야 하는 작업에 두꺼운 벙어리 장갑을 끼고 있는 답답함이랄까?
지금 이만큼의 내용을 영어로 쓰려면 한나절은 족히 걸릴 터이요, 문법적인 실수도 여러 번 고쳐야하는 번거로움이 있겠지만 한국어로야 앉은 자리의 소일거리다. 외국에 살면서도 인터넷을 통해 한국어로 고국과 소통하려는 수많은 네티즌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한국어가 그리 만만하게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덧붙이는 글 | 이찬 기자는 하와이 대학교의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