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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 다리 오면, 괜히 가슴이 시리다. 뚜-우 울리는 뱃고동 소리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 왜 이곳에 오면 마음이 아플까? 부산과 아무 인연이 없이 살아온 사람도, 부산 영도 다리 밑에 오면 배멀미를 하는 사람처럼 가슴이 울렁거릴 수밖에 없다.
 
눈물의 이산가족 상봉 자리, 6·25 전쟁의 피난민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는 영도다리. 그 영도 다리 밑의 낡은 적산가옥의 '영도점집' 돌계단에 앉아서 푸른 바다의 남항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아무리 6·25 전쟁과는 무관한 젊은 세대라도, 배달민족의 자손이라면, 여기 와서는 가슴이 시릴 수밖에 없으리라.

 

 

영도다리 밑을 기웃거리자니, 아주 어릴 적 이웃 아줌마들이 울보라고 날 놀리며 하던 말이 불현듯 생각난다. "너는 영도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라서 울보인 모양이다"라고 해서, 나는 정말 영도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일까? 생각하다 보니 울음을 뚝 끊치곤 했던 것이다. 나중에 한참 커서야, 이 말의 유래를 알게 되었다.

 

6·25 당시 영도 다리 밑에는 많은 전쟁 고아들이 피난 내려오다가 잃어버린 부모를 찾아서 울며 헤매는 모습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우는 아이를 달래느라 '영도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우스개 말이 상당간 전래되어 내려왔지만, 요즘 엄마들도 유달리 잘 우는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걸 본다. 이 우스개 말 속에는 통곡하고 울어도 시원치 않을, 우리 민족의 상잔의 비극을 은유하고 있다 하겠다. 

 

 

세태를 나타내는 풍문은 곱씹을수록 의미심장하다. "부산 사람들, 목소리 아무리 커도 부산의 주인은 따로 있다"는 말이 있다. 수년전, 부산시민 단체와 부산 제2 롯데 월드 (465m, 107층)의 시공건설 회사 측과 영도다리를 놓고 줄당기는 싸움을 해 왔다.

 

영도 다리는 1931년 일제 때 착공되어 1934년 개통된 도개식 다리다. 하루에 두 번 하늘을 향해 들어 올려졌던 다리. 시민 단체의 노력으로, 사라질 뻔한 영도 다리가 곧 옛날처럼 하늘을 향해 다리를 들어 올리게 된다고 한다. 세계 10대 마천루 프로젝트에 포함될, '롯데 월드' 건설 중인 자리는, 옛부산 시청'이 있었다.

 

 

곧 사라질 영도다리 밑 영도 점집 지나다가 보자기에 싸여 있는 대머리 부처 보았다 어디서 다리까지 다쳤을까, 골절상 입은 채아픔을 꾹 참고 쓰레기더미에 던져져 있었다. 녹등을 단 오징어채낚기선은 막 울릉도로 떠나는 중인지, 깜박깜박 붉은 등을 반짝이며 저녁바다를 가르고 있다. 간간이 검은 파도가 점집 계단까지 밀려오고 새점 콩점 실점 써붙인 민짜 유리창 안에는 늙은  여자가 콩점을 치고 있다 까만콩 흰콩을 요술부리듯 지구본처럼 굴리다가 까맣게 멈춘 콩 하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혀를 쯧쯧 차는 점집 여자, 이제사 영도다리의 운명을 알아 맞히기라도 한 것일까 콧등에 걸린 돋보기를 올렸다 내렸다 하며, 영도다리를 한참동안 들여다 본다 갖가지 과일과 색색의 초들이 꽂힌 제단앞에는 색의를 입은 늙은 무녀 몇몇 화투패라도 벌인양 왁자왁자한데, 떠나는 배 들어오는 배 환히 보이는 다다미방에는 라면박스에 담겨진 늙수그레한 부처 하나 초조한 얼굴로 깡소주를 마시며, 눈먼 여복을 올려다 보고 있다

- 자작시 '영도 점집 지나며'

 

 
1980년대까지도 영도 다리 밑에는 '점집'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지금은 점집 가게 숫자가 얼마 되지 않는다. 이렇게 영도 다리 밑에 영도 점집이 많이 생성된 것은, 6·25 전쟁통의 피난민들이, 생사를 알 길이 막연해진, 가족 형제를 찾으려는 막막한 심정을 지푸라기 잡듯이 의지하는 데서 번창했다고 한다. 낡은 슬레이트 지붕의 민짜 유리 가게 안에 점집 할머니가 마침 앉아 계셔서 할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할머니, 점 한번 보는 데 얼마에요?"
점집 할머니의 연세는 족히 팔십 가까워 보이셨다. 할머니는 점을 보러 온 사람인 줄 알고, 신발 벗고 얼른 들어오라고 반기셨다.
"할머니, 여기서 점집 차린 지 오래 되셨나요?"
"그럼 오래 되고 말고지. 그런데 그건 왜 물어? 점은 안 봐?"
"다음에 시간 내 가지고 와서 볼게요. 영도 다리 공사 시작하면 점집은 어떻게 되죠?"
이 질문은 물으나 마나인데, 묻지 않을 수 없다.
"100층 건물이 들어선다는데, 이사를 가야지. 그냥 놔 두겠어? 오늘은 정말 손님도 없으니 싸게 해 줄테니 올해 신수 한 번 보고 가."
점집 할매의 싸게 해 주신다는 말씀에 공연히 마음이 흔들려, 볼까 말까 망설이다가, 다음에 꼭 오겠다고 돌아섰다.
 
  
 
울었네 소리쳤네 몸부림 쳤네 안개 낀 부산 항구
옛 추억만 새롭구나 몰아치는 바람결에
발길이 가로막혀 영도다리 난간 잡고 나는 울었네
울었네 소리쳤네 몸부림 쳤네 차디찬 부산 항구
조각달이 기우는데 누굴찾아 헤매이나
어디로 가야하나 영도다리 난간 잡고 나는 울었네
- 윤일로 <추억의 영도다리> 중
 
 
점을 치는 사람들은 주로 어떤 사람들일까. 6·25 전쟁 당시 잃어버린 가족 형제를 찾아야 하는 일처럼…. 다급하고 힘든 절박한 현실이, 미신인줄 알면서도 찾게 하는 것은 아닐까…. 끼룩끼룩 울어대는 부산 영도 갈매기 울음소리 뱃고동 소리보다 슬프다.
 
사람의 운명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을 여복의 할머니. '영도 점집'의 철거의 운명도 미리 아셨을까. 생각보다 매우 담담하시다. 색색의 무녀 옷들이 뒹구는 점방 안은 1인용 전기장판 한장 깔려 있으나, 차디찬 냉방이라, 가슴이 시렸다.
 
부산의 민중과 오랜 세월을 함께 호흡해 온 '영도 점집 집성촌'을 단지 미신이라고만 치부하기는 어렵다. 일제시대 때는 숱한 조선인이 일제의 압박에 못이겨 영도 다리 위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시도했다는 영도 다리. 피난 내려오면서 부모 형제를 잃고 울며 헤매는 고아들의 은신처이기도 했던, 영도다리의 영도 점집의 돌계단에 앉아서, 많은 피난민들이, 파도소리와 같은 점괘가 나오길 기다리며 이에 위안과 꿈을 가지지 않았을까.
 
보이지 않는 세계를 잘 믿지 않는 세상. 그러나 과학으로 다 알아낼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힘에 의해 이 복잡한 세상은 사실 움직인다. 가물거리는 등대빛처럼 영도 점집은 문명화에 밀려 사라져도,  흐르는 역사의 한 부분과 함께 영원히 흘러갈 것이다.

태그:#영도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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