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기러기 아빠 퇴출'을 최종 목표로 한다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영어 교육 강화방안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특히 2010년부터 모든 고교에서 영어수업을 영어로 진행하겠다는 방안과 '영어 몰입 교육'이 논란의 중심이다. 이명박 차기정부의 영어 교육 정책을 보며 '영어 몰입 교육'을 현장에서 경험한 대학생의 이야기를 들려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정치외교학과 사회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다. 우리 학교 신입생은 1년 동안 '실용영어'라는 원어민 영어 강의를 '필수'로 들어야 한다.

 

영어 잘하는 학생들은 유학이나 어학연수 경험자

 

대학교 졸업반인 지금도 당시 '실용영어' 수업 시간을 생각하면 가슴이 벌렁벌렁하다. 일주일에 세 번, 한시간 정도 진행되는 말 그대로 '실용적인' 영어를 배우는 수업이었다.

 

나는 영어 듣기 실력이 모자라는 탓에 원어민 교수가 하는 말의 절반 정도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수업시간 내내 혹시나 나에게 질문이 올까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교수의 농담에 '영문도 모른 채' 다른 학생들을 따라 웃던 씁쓸한 기억이 난다.

 

물론 나와 다르게 영어 강의를 잘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버벅대는 학생들부터 프리토킹을 완벽하게 구사하는 학생들까지 한 반에 속한 학생들의 실력은 천차만별이었다. 당시 영어를 잘하는 학생들을 보며 절실히 부러워했던 생각이 난다.

 

영어를 잘하는 학생들 대부분은 유학이나 어학연수를 다녀온 경험이 있거나 혹은 영어 사교육의 수혜자들이었다. 따라서 영어로 진행되는 고교 영어수업을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 학생들이 초등학교 중학교때부터 영어 사교육을 받고, 어학연수를 떠날 것은 눈에 보이듯 뻔한 일이다.

 

획기적인 영어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해서 학부모의 사교육비 부담을 줄이고, 기러기 아빠를 퇴출시킨다는 이명박 당선인의 말은 소가 웃을 일이다. '실용영어' 수업을 들으며 어렸을 때 어학연수를 가지 않았던 과거를 '원망'했던 나의 모습은 이제 곧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의 모습이 될 것이다.

 

또한 영어수업에 대한 학생들의 수용능력도 고려해야 한다. 고등학교때까지 영어과목에 자신 있었던 내가 100%를 소화하기 힘들었다면 현재 대다수의 고등학생들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상위권 대학 안에서도 학생들의 영어 강의 수용능력의 차이가 크다면, 일반 고교에서 이 차이는 더욱 클 것이다. 이명박 차기정부의 섣부른 영어정책은 영어수업시간에 자칫 다수의 학생들을 '바보' 혹은 '벙어리'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교수도 괴롭고 학생도 괴롭다

 

우리 학교는 '실용영어' 외에도 3과목 이상 영어강의를 들어야만 졸업을 할 수 있다. 1학년 때 '실용영어' 시간의 악몽을 떠올리며 3과목의 영어강의 수강은 어학연수 후로 미루어 놓았다. '실용영어'가 영어수업을 영어로 진행하는 것이라면, 영어로 진행되는 전공수업은 '영어 교육 몰입'과 같다.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갔다온 후에는 영어강의를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영어로 진행되는 전공수업에는 여러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영어 몰입 교육'은 일반 교과 수업을 영어로 진행해 학습자가 교과내용과 영어를 동시에 습득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다. 즉 두 마리 토끼를 한번에 잡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학전공 영어 강의를 들어본 결과, 두 마리 토끼를 잡기는커녕 한 마리 토끼마저 놓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대학 전공 공부는 심도 있는 사고와 논의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영어로 진행되는 강의는 모국어인 한국어로 진행되는 강의에 비해 전달력과 깊이가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교수의 영어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한국말로 강의하는 것과 같을 수는 없다.

 

하물며 학교의 강요에 떠밀려 억지로 영어강의를 맡은 교수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교수도 괴롭고, 비싼 등록금 내고 제대로 된 전공 교육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도 답답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영어 몰입 교육'으로 자연스럽게 영어실력이 향상되는 것도 아니다.

 

"고교졸업을해도 생활영어를 거침없이 할 정도로 교육하겠다"는 이명박 당선인의 말에서 보이듯, 차기 정부 영어교육의 핵심은 말하기와 듣기 실력의 향상이다. 하지만 한국 교수가 한국 발음으로 진행하는 전공 영어 강의는 영어 듣기 실력 향상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또한 한 학급당 인원수가 많은 현실에서 학생들이 '영어 몰입 교육'을 통해 영어 말하기 실력을 향상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다만 원서로 수업하는 경우 독해실력은 늘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 고등학생의 독해실력은 말하기와 듣기 실력에 비해 월등하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영어 교육 강화방안은 영어 강의를 확대하고 있는 일부 상위권 대학들의 모습과 궤를 같이한다. 따라서 이명박 차기 정부의 영어 정책이 어떤 정책을 가져올지 그려보기 위해 현재 그러한 대학에 재학중인 학생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는 것은 어떨까.


태그:#영어 몰입 교육, #영어강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