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송회' 사건과 이광웅 시인 이광웅 시인을 기억하는 이 몇이나 될까. 목숨을 걸고 억압의 시대와 온몸으로 맞섰던 이광웅 시인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광웅 시인은 1940년 전북 이리(익산)에서 태어났다. 원광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197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내가 아는 한, 그는 참으로 선량한 인간이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일지라도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게 해줄 만큼 눈빛이 사슴처럼 순하고 고왔다. 1982년에 있었던 조작된 공안사건인 이른바 '오송회' 사건만 없었더라면 한평생 교사와 시인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을 사람이었다. '오송회' 사건이란 1982년 겨울, 전북 군산 제일고등학교에 재직 중이던 이광웅을 비롯한 여덟 명의 교사와 그 학교 교사를 거쳐 KBS 남원방송국에 근무하던 조성용 등 아홉 명의 교사가 전북도경 대공분실에 불법 연행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교사간첩단'으로 둔갑했던 사건이다. 월북 시인 오장환의 <병든 서울>이라는 시집을 돌려본 게 빌미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광웅 시인은 '오송회' 사건의 주범으로 몰려 간첩 죄목을 뒤집어쓴 채 긴 세월 동안 옥고를 치르고 1987년에야 석방됐다. 그러나 긴 감옥생활에서 병을 얻은 그는 1992년, 53세라는 나이에 일찍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이광웅 시인과의 만남과 시 '대밭'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76년 5월이었다. 군대 갈 날을 기다리며 빈둥거리던 때였다. 마침 한국전력 군산지사에 다니던 이원철 시인에게서 차나 한 잔 하자는 연락이 와서 나갔는데 그 자리에 마침 이광웅 시인이 함께 앉아 있었던 것이다. 당시 군산에서 가장 큰 빵집 가운데 하나인 조화당에서였다. 이원철 시인의 소개로 수인사를 나누고 나서 빵과 커피를 시킨 다음 두어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 보니, '세상에 이렇게 순둥이같이 생긴 사람도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순해 빠진 얼굴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하도 오래 전 일이라서 잘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도 이광웅 시인이 이태 전 <현대문학>에 실렸던 그의 등단작 '대밭'을 보여주고, 그 시를 화두 삼아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다. 그날 내가 '대밭'이란 시에서 받은 느낌은 길고 산만하다는 느낌뿐이었던 같다. 대밭에 관한 이광웅 시인의 정서를 이해하기엔 둘 사이엔 약간의 세대 차가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제대하고 나서 얼마 안 있어, 그가 '오송회' 사건이라는 간첩 사건으로 구속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접하는 순간, 의심할 바 없이 그 사건이 용공조작이라는 걸 직감했다. 그 순하고 선한 얼굴 어디에 그토록 엄청난 이데올로기 따위를 숨기고 있을 구석이 있겠는가 말이다. 얼토당토 않은 죄목을 둘러쓴 그가 겪어야 할 고초가 사뭇 안타까웠다. 그가 아직 감옥에 있던 1985년 풀빛 출판사에서 처녀시집인 <대밭>이 나왔다. 그제야 차분하게 '대밭'이란 시를 읽을 수 있었다. 대밭에 살가지 쪽제비 시글시글 대가지를 분질러놓으면 댓잎사귀 짓이겨놓으며 바스락 소리 밤새 끊어지지 않는 밤이 깊었다. 새암 두덕에 두룸박 소리 긁히고 부딪히고 쌀 씻는 소리랑 큰동세 작은 동세 주고 받는 목소리 뒤세뒤세할 때까지 한쪽 귀퉁이 이불귀를 끌어 잡아댕겨가며 대밭을 떠내밀며 잠을 설쳤다.
사랑채에서 울려오는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무섭고 선보러 오는 사람네의 수다스런 언변 뒤에 감추어 둔 비밀스런 험상들이 무서워서 얼굴에 껌정을 칠하고 대밭을 빠져나가 북산으로 달아나간 큰고모의 안부가 걱정돼서 할머니는 새벽부터 물레질이 잦았다. 새떼가 지나며는 실자새의 윙윙 소리는 퍼지고 퍼져서는 장지문을 다 흔든 후에 벽장문을 다 흔든후에 부엌에까지 들어가서 새로 회삼물한 부뚜막을 흔들었다.
용수를 박고 막 떠온 전내기를 좋아하는 만주 아저씨가 오는 날은 우리 동네에는 있지도 않은 유태인 무서운 이야기는 끊는 라디오의 군부대신 연설처럼 열기가 올라오고 멀고 먼 옛날 절의사진(絶意仕進)에 잠적불출(潛跡不出)하셨다는 할아버지네 할아버지네 지하수처럼 흘러간 애사에 가슴 아파하는 날은 밀밥을 먹을면서 타국 가서 왼 식구가 세한에도 이불 없이 웅숭거리고 뼈 마디마디 곱았다는 사랑방에 들어 어느새 괭이처럼 코를 고는 오직 아저씨를 위하여서 어머니는 나를 불러 대밭에 가서 술국 끓일 명아주 잎을 따게 했다. 지는 햇빛 속에 바람 소리 속에 섞여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는 대밭은 나의 상아탑이었다.
해방 직후 팔봉 지서장을 살은 육촌 재종형이 인공 때 대밭을 빠져나가 남쪽 어딘가로 도망치던 구름 낀 밤이 있었고 해방되기 전부터 공산당을 해온 오상리 아저씨가 수복때 대밭을 빠져나가 북쪽 어딘가로 도망치던 추적추적 비 내리던 밤, 다음날이면 언제 그랬냐고 말짱허니 갠 하늘이 되어 눈부시게 해가 빛났다. 땅거미 진 저녁이 내리면 어느새 이 대밭에 자러 들온 참새 떼가 짹재그르 짹재그르 떨어지는 햇빛 받고 시냇물 흐르듯이 끝없이 울어대고 까막까치가 또 끝없이 짖어대고 볼먹은 부엉이의 울음소리도 보태어 자동차의 이 소란은 극한 대낮의 홍수만큼 시끄러운 것이었다. 지금은 없는 그 새나라의 대밭이 그립다.
- 이광웅 시 '대밭' 전문 * 회삼물(灰三物) - 석회, 황토, 가는 모래의 세 가지를 한데 섞어 반죽한 물질. 집을 짓거나 관(棺)의 언저리를 메우는 데에 많이 쓴다. * 전내기 - 물을 조금도 타지 아니한 순수한 술 * 살가지 - '살쾡이'의 전라도 방언 * 북산(鼓山) - 강경에서 가까운 익산시 망성면에 있는 산 이름. * 팔봉- 익산시 동쪽 변두리에 있는 동네 이름. 익산시에 편입되어 팔봉동이라 불리며 익산공설운동장이 있다. * 오상리 - 1983년. 팔봉면 전 지역이 이리시에 편입됨으로써 이리시가 되었으며 현재의 법정동명은 임상동이다. * 절의사진 - 사진이란 벼슬아치가 규정된 시간에 근무지로 출근하는 것을 말한다. 절의사진이란 출퇴근 외엔 아무데도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보인다. * 밀밥 - 밀로 짓거나 밀을 많이 넣어 지은 밥 - 시의 원만한 이해를 위해 본인이 작성한 것임. - 어린 시절의 기억을 환기시키는 시 '대밭'의 풍경
백석의 시 '여우난골族'이나 '가즈랑집'을 연상시키는 이야기 시다. 군데군데 지명과 생소한 지명이 등장하고 흐름이 약간 자연스럽지 못한 부분이 없지 않지만, 차분히 읽어내려가노라면 그리 어려운 대목은 없을 것이다. 시의 무대가 되는 곳은 시인의 고향 마을이다. 시인의 연보에 그저 익산군이라고 나와 있어 세세한 고향 마을을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익산시 망성면 어름, 북산이 멀지 않은 곳이 아닌가 추측한다. 짐작건대, 명아주 잎으로 끓이는 술국이나 밀밥을 먹기도 하는 걸 보면 마을은 부촌(富村)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의 어린 시절도 가난하긴 마찬가지였지만 명아주 잎으로 술국을 끓여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명아주는 어린 순은 나물로 먹기도 하고 다 자란 줄기로는 지팡이를 만들기도 하는 한해살이풀이다. 시 '대밭' 속에는 구체적인 인물 몇 사람이 등장한다. 선보러 오는 사람네를 피해 북산으로 달아난 큰고모와 큰고모의 안부를 걱정하며 부지런히 물레를 돌리는 할머니, 전내기를 좋아하는 만주 아저씨, 절의사진(絶意仕進)에 잠적불출(潛跡不出)하셨다는 할아버지네, 사랑방에 들면 괭이처럼 코를 골며 자는 오직 아저씨 등. 해방 직후 팔봉 지서장을 지낸 탓에 인공 때 대밭을 빠져나가 도망간 육촌 재종형, 해방되기 전부터 공산당을 해오다 수복 때 대밭을 빠져나가 북쪽 어딘가로 도망친 오상리 아저씨 등도 나온다. 앞의 사람들이 이념 없이 그럭저럭 세상을 살아가던 사람들이라면 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이념 때문에 삶의 우여곡절을 겪게 되는 사람들이다. 대밭은 이런 모든 사람들을 뭉뚱그려 품어주던 곳이었다. 세상은 선악을 먼저 따지지만, 대밭은 온갖 시비를 초월한 곳이다. "땅거미 진 저녁이 내리면 어느새 이 대밭에 자러 들온 참새 떼가 짹재그르 짹재그르 떨어지는 햇빛 받고 시냇물 흐르듯이 끝없이 울어대고 까막까치가 또 끝없이 짖어대"는 아름다운 곳이다. 시 '대밭'을 읽노라면 저절로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 우리 집 뒤꼍에도 우거진 대밭이 있었다. 어린 내게 대밭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소꿉놀이의 '보루'였다. 전쟁놀이에 쓰일 활과 칼을 그곳에서 생산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겨울엔 통이 큰 대나무를 베어 책보를 싣고 달려갈 도롱태 자루를 만들던 곳이기도 했다. 때로는 한쪽 면이 납작한 암대를 잘라서 피리를 만들어 불면서 공기와의 소통을 꿈꾸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 나를 먼발치서 바라보던 세상이야 늘어지게 하품을 했을 테지만, 그 시절의 난 무작정 대밭이 좋았다. 겨울밤이면 칼바람이 대밭을 쏴르르르 훑고 지나가는 소리가 어린 나의 귀를 쫑긋 세우게 했다. 아직 어렸으니 가슴에 맺힌 것이 있을 리 만무했지만, 대숲을 지나는 바람 소리를 들으면 막힌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해서 좋았다.
큰집 뒤꼍의 대밭은 우리 집 대밭보다 더 넓고 컸다. 그곳엔 6·25 때 팠다는 방공호가 있었다. 반쯤 허물어진 그 굴 속엔 박쥐가 살고 있었다. 굴 속으로 들어가면 극장에서 상영하는 애국가의 마지막 장면처럼 사방으로 박쥐들이 흩어졌다. 또 대밭 속엔 쌀가지(살쾡이의 전라도 방언)가 살고 있었다. 하얗게 눈 내린 밤에 먹을 것을 찾아 동네를 떠돌다가 닭장 속 닭을 물어간 쌀가지의 발자욱을 가만가만 따라가면 대밭이었다. 그렇게 어린 날의 대밭은 내게 비밀스러운 삶의 이야기를 수두룩하게 간직한 별천지였던 것이다. 백석의 뒤를 잇는 서정시인으로 살 수도 있었으련만
이광웅 시인 연보 | 1940년 전북 이리 출생 원광대학교 국문과 졸업 1974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 1982년 군산제일고 국어교사로 재직중 이른바 ‘오송회’ 사건에 연루, 5년동안 옥중생활 1985년 첫시집 <대밭> 출간 1987년 군산 서흥중에 복직 1989년 전교조 가입으로 해직 두번째 시집 「목숨을 걸고」 출간 1992년 초대 교육문예창작회장 세번째 시집 <수선화> 출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1992년 12월 22일 오후 4시 45분 지병인 위암으로 투병중 별세. |
내가 출옥한 이광웅 시인을 다시 만난 것은 1987년 가을이었다. 군산의 사회과학서점인 녹두서점에서였다. 부인 김문자 여사와 함께 들린 그와 담담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섣불리 "고생하셨다"라는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다. 한쪽 어깨가 심하게 기울어진 그를 바라보는 내 마음이 너무 무거웠기 때문이다. 1992년 12월 22일, 이광웅 시인은 지병인 위암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시 '대밭' 속에서 이광웅 시인은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는 대밭은 나의 상아탑이었다"라고 회고한다. 대밭은 단지 그에게 추억만을 안겨준 곳이 아니었다. 정신적 자양분을 공급하기도 했던 장소였다. 어쩌면 시 '대밭'은 그의 정신을 축약한 시가 아닌가 싶다. 만일 억압의 시대가 그를 투사로 만들지 않았다면, 식민지 시대의 시인 백석보다 더 아름답고 가슴에 와 닿는 이야기 시를 쓰는 시인으로 살다가 갔을는지 그 누가 알겠는가. 도종환 시인은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시집 속에서 이광웅 시인에 대해 이렇게 노래한다. 그대는 이땅의 맑은 풀잎이었다가 허리에 도끼날이 박힌 상처받은 소나무이었다가 그대는 별자리에서 쫓겨난 착한 별이었다가 견결한 향기로 시드는 가을들판 마른 쏙잎으로 앉아 있다가 그대는 진흙도 물벌레도 다 와서 살게 하는 고운 호수였다가 천둥번개도 눈보라도 다 품어주는 저녁하늘이었다가 그대는 지금 갈기갈기 소나기로 내리는 슬픔 쏟아지며 쏟아지며 온 세상을 다 적시는 눈물의 빗줄기. - 도종환 시 '이광웅' 전문 공허한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대바람 소리를 듣고 싶을 때가 있다. 마음의 티끌을 휩쓸고 지나가는 그런 노래가 그리울 때가 있다. 그런 겨울밤엔 이광웅 시인의 시 '대밭'을 꺼내 읽곤 한다. "지금은 없는 그 새나라의 대밭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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