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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사나이가 "기자가 되겠다" 는 야심찬 꿈을 품고 서울에 온 지 일주일이 넘었다. 구경이라곤 <오마이뉴스>사무실이 있는 상암동을 왔다 갔다 하며 본 것이 전부다. 갑갑한 마음에 '바람을 좀 쐬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로서는 첫 '서울 나들이'인 셈이다.

 

크리스마스만 되면 TV에는 연인들이 눈 내리는 명동거리를 아름답게 걷는 장면이 나왔다. 광화문 사거리에 웅장하게 서 있는 ‘이순신 동상’, 2002년 전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상암 월드컵구장’ 등 평소 TV에서만 보던 곳을 직접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곳들을 마다하고 내가 선택한 첫 외출지는 가장 잘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강남의 판자촌 '구룡 마을'이다.

 

 고층건물과 판자촌이 대비된다.
고층건물과 판자촌이 대비된다. ⓒ 구자민


"아파트 입주권 노리고 들어온 사람들 수두룩해"

 

'구룡마을'도 제법 TV에서 자주 봐왔던 곳이다. 고층 빌딩과 판자촌, 양극화 현상이 시각적으로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이라, 다큐멘터리나 뉴스보도 등에서 자주 다뤘던 곳으로 알고 있다. '세계화의 빛과 그림자',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곳 판자촌에 사는 주민들은 추운 겨울을 어떻게 나고 있는지, 다가오는 설을 준비하는 모습은 어떠할까 궁금했다. 사람 냄새가 진하게 묻어나오는 기사 한 꼭지를 써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초행길인 탓에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수소문 끝에 포이동 행 마을버스를 탔고, 포이 4거리에 내려 걷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내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이 새삼 실감이 났다. 아무리 둘러봐도 고층 건물들밖에는 눈에 띄지 않았다. 1시간을 이러 저리 헤매고 나서야 끝내 포기하고 택시를 타기로 마음먹었다.


"아저씨, 포이동에 판자촌 있죠? 못 사는 동네가 있다고 하던데, 거기로 가주세요."

"판자촌 말인가? 거긴 포이동이 아니고, 구룡마을이라고 하는 데야, 근데 그곳엔 왜?"

 

"가서 사람 사는 이야기 좀 들어보려고요. 어려운 분들이 많이 사시잖아요."

"뭣?…허허 거기 사람들 생각만큼 못 살지 않아. 자네 여기서 헤매다 택시 타는 것도 그렇고, 사투리도 그렇고, 멀리서 온 모양인데, 거기 사람들 아파트 입주권 노리고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사람들 수두룩해. 참나. 정작 못 사는 사람들은 얼마 안 된다는 거지."


조금 불쾌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조금 있을지언정 판자촌에 사는 주민들 모두를 돈을 노리고 버티는 사람들인 양 일반화 시키는 택시기사 아저씨가 못마땅했다.
 

"아저씨는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저씨는 어디 사시는데요?"

"난 강북이지, 내가 직업 특성상 서울 사정 속속들이 아는데, 구룡마을 주민들 대다수가  그렇다는 건 여러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는 이야기야. 물론 어려운 사람들이 없다는 건 아니야."


믿기 힘들었다. 그건 못 사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등 돌리기 위해, 비교적 많이 가진 자들이 만들어낸 핑계라고 생각했다. 억지로 합리화시키기 위한 장치라고.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순 없었다. 사람이 사람을 그런 식으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주자장엔 외제차, 주변엔 오리고기집? 

 

구룡마을은 8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산 중턱, 척박해 보이는 땅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TV나 영화에서 보았던 어둡고 냄새나는 빈민촌, 바로 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구룡마을 입구에는 안내문이 설치돼 있었다.

 

이 지역은 영농형 비닐하우스가 주거지역으로 집단 변조되어 발생한 무허가… 최근 언론보도에 의해 불법 건물 매매 전세가 성행

 

택시기사가 했던 그 말이 떠올랐다. 정말 그런 일이 있긴 한 걸까? 마을 입구에는 커다란 주차장이 있었는데 마을에 들어오는 차량을 검문하는 역할도 한다고 적혀 있었다. 간혹 주차돼 있는 외제차들이 눈에 띄었다.

 

 쓰러질 듯한 '집'들이 안타까워 보인다. 곳곳엔 아직 눈이 그대로 남아있다.
쓰러질 듯한 '집'들이 안타까워 보인다. 곳곳엔 아직 눈이 그대로 남아있다. ⓒ 구자민


먼저 마을을 쭉 둘러보기로 했다. 벌써부터 스산한 기운이 감돈다. 며칠 전 내린 눈이 아직도 녹지 않을 정도로 추운 날씨였는데, 거기에 더해서 땅 밑에서부터 뭔가 차가운 기운이 올라오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런 싸늘함을 단숨에 녹일 수 있는, 시골마을에서 느낄 수 있는 넉넉한 인심과 훈훈한 정은 여기도 분명 존재할 것이라 믿었다.

 

'초대 받지 못한 자'라는 생각 때문일까? 주차장을 지키던 아저씨도, 힘겹게 오르막길을 오르던 허리 굽은 할머니도, 폐지를 모으던 아저씨도 경계의 눈으로 카메라를 든 이 젊은 이방인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느껴졌다. 어차피 친절이나 환대는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내가 살던 김해는 서울에 비하면 '촌동네'라는 표현이 맞다. 주위에는 김해평야도 있고, 부산의 위성도시 격이기 때문에 화훼농원이 발달해 도시 주변에 인접해 있어 시골마을이 보이기도 한다. 구룡마을은 보통의 그런 시골마을과는 조금 틀린 것 같았다. 간혹 폐지를 모으시는 아저씨들을 제외하고는 지나가는 주민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다.

 

겨울이라 농사짓는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딱히 마을주민들 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하고 계신 분들은 아니었다. 마을 한쪽에는 오리고기를 파는 식당들이 일렬로 쭉 늘어서 있었는데, 식당 안에는 거나하게 술이 오른 등산객들로 가득 차 있어 역설적으로 보였다.

 

'판자촌과 오리고기집이라….'

 

주민들의 따뜻한 삶은 찾을 길 없고, 발에 상처만...

 

판자촌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집'보다 '상자'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듯 보였다. 나무 판때기로 지은 건물들은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었다. 어디까지가 한 가구인지도 파악하기 힘들었고, 기껏해야 현관문으로 보이는 판때기 옆에 붙어 있는 주민들의 이름표로 누구의 집인지 알아챌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난데 없이 길을 잃고 말았다. 사진 찍는데 정신 팔려 그만 너무 깊숙히 와버린 것이다. 길을 더듬으며 찾고 있다가 나무판때기 하나를 실수로 건드렸는데, 일순간 온 마을 개들이 사납게 짖기 시작했다. “왈! 왈!!” 당황스러웠다. 어둡고 낯설고, 인적도 드문 이곳에서 개들에게까지 쫒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사람이라곤 어디에도 없고, 사나운 개들만이 나를 향해 말을 걸고 있었다. '어서 여기서 나가라고…….'
 

나는 길을 찾아 이리저리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눈이 내려 있는 논두렁을 발견하고는 거기로 곧장 뛰어나갔다. "왈! 왈!!" 사나운 개들은 여전히 나를 향해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앞만 보고 뒤뚱뒤뚱 발을 옮겼다. 어서 개들이 없는 곳으로 벗어나고 싶었다. 사람이 그리웠다. 그런데 그 순간,


"으악!"


날카로운 뭔가가 신발을 뚫고 왼쪽 발바닥 안으로 쑥 들어왔다. 아팠다. 어떻게 그게 신발을 뚫고 들어와 발을 찌를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발을 보호해 주지 못한 신발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픔을 참고 절뚝거리며 걸어 나갔다.

 

발 안으로 들어온 물체가 뭔지 확인할 틈도 없이 그곳을 벗어나야 했다. 마을 전체가 나를 향해 짖어대는 개 소리로 시끄러웠지만, 내다보는 이는 없었다. 소란의 주인공이라 몰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다행스럽기도 했지만, 잔뜩 질려있는 내 발을 보니 못내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조용한 곳으로 나와 양말을 벗어 보니 피가 흥건히 묻어 나왔다. 그때 지나가는 젊은 여성을 발견했다. 이곳 주민인 듯 했다.


"저기, 이곳 주민이 시죠? 죄송한데 약국이 어디 있을까요? "  
"없어요."
 

20대로 보이는 그 여성은 그렇게 지나쳐 버렸다. 난 허름한 슈퍼가 근처에 있는 것을 보았다. 과연 안에 사람이 있을까? 그것조차 확실치 않았지만, 용감하게 문을 열었다. 몇 가지 식료품들이 보이고, 안쪽에서는 어른 몇 분이서 고스톱 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주인아주머니도 있었다. 나는 궁색하게 초콜릿 하나를 사면서 부탁했다.
 

"아주머니, 혹시 소독약 없어요? 제가 발을 다쳐서요. 못 같은 것에 찔린 것 같아요."   
"진짜야? 우짠디야. 소독약은 안 파는디. 잠깐만."


아주머니는 전라도 분이셨다. 나를 가엾게 보셨는지 처음에는 없다던 소독약을 힘겹게 찾아서 꺼내 오셨다. 정말 고마웠다.


"어디 보자, 양말 벗어보랑께. 이그~ 우짠디야~ 소독약 바르고 피를 꾹 짜보랑께~ 그라고, '마이신' 한 개 먹어야 쓰겄네~."

 

'마이신'이 뭔지 몰랐지만 귀가 솔깃했다. 사실 발을 다친 순간 영화 <살인의 추억>이 생각났더랬다. 파상풍으로 다리를 절단했던 형사의 에피소드가 나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서둘러 어떤 약이든 먹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럼 주세요. 아주머니."

"한 알에 천원이야."

 

결국 '마이신' 한 알을 천원에 샀다. 나중에야 이 거래가 바가지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여기서 신발을 벗은 김에 마을에 관해 물어보기로 했다. 아주머니는 전라도에서 온 지 7년 정도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마을주민들의 직업은 의외로 다양하다고 했다. 주민들 살림살이는 어떠냐고 물어보았을 때는 고개를 절래 흔들면서,

 

"저기 혼자 사는 할머니들도 다 먹고 살기는 괜찮아~ 집이 안 좋고, 보기에나 그렇지 다들 먹고 살만하당께…."


설은 어떻게 보낼 계획이냐는 내 질문에는 "아무 데도 안 간다”며 딱 잘라 이야기 했다. 이후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나눠 봤지만, 내가 듣길 원했던 '사람 냄새 나는 이야기'는 발견할 수 없었다. 더 있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 고맙다는 인사를 드린 후 가게 문을 열고 나왔다.

 

겨우 찾은 마을 주민 그러나 그들도...


주위 사진을 찍으며 돌아다니다가 행인을 만나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물어봤다. 어느새 해가 서산으로 기울었다. 혼자서 외롭게 집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시는 할머니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올해로 87세라는 이 할머니는 독거노인이셨다. 비로소 어려운 분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구룡마을에 대한 지나간 옛 이야기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되겠거니 생각했다.
 

"할머니, 여기서 지내시면서 힘드신 건 없으세요? 춥지는 않으시고요?"
"아니야. 괜찮아. 연탄 때면 하나도 안 추워."
 

"다행이네요. 근데, 할머니는 언제부터 여기서 사셨어요?"
"난 한 3년 됐지."


의외였다. 연세로 보아 적어도 10년은 사셨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할머니, 생계는 어떻게 해결하시죠? 보조금 같은 게 나오긴 하나요?"

"보조금은 안 나오고, 이름 모를 '잘사는 사람들'이 도와줘서 사는 거지 뭐."
 

이름 모를 '잘사는 사람들'. 어떻게 이 말을 이해해야 할까. 평범한 기부자들이라 생각하기에는 절차도 명분도 딱히 없어 보였다. 그렇지만, 이 할머니가 타인의 ‘도움’에 의해서 걱정 없이 살고 계신다는 생각에 잘 됐다는 생각을 했다. 할머니는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내 요청을 거부했다. 사진 찍는 것도 거부하셨다. 

 

내가 가져온 카메라는 어느새 건전지가 떨어져 있었다. 어느새 해가 완전히 꺼지고, 마을 전체는 금세 어두워졌다. 몇 안 되는 가로등불이 하나 둘씩 켜지기 시작했다. 근처 슈퍼에 들러 건전지를 구입하고 마을의 야경을 몇 장 더 찍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처음 들렀던 슈퍼보다 규모가 조금 더 큰 가게에 들렀는데, 거기나 여기나 허름하긴 마찬가지였다. 슈퍼에 들러 주인아주머니에게 건전지 값을 드리고, 궁금한 점이 있어 여쭈어 봤다. 
 

"아주머니 여기 오신 지 얼마나 되셨어요?"

 

구룡마을이 생긴 해는 1983년이라고 알고 있는데, 적어도 내가 지금까지 구룡마을에서 만난 분들 중에 10년 이상 거주하고 계신 분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주머니는 내 말은 들은 체 만 체, 연신 가게 문 밖의 상황만 주시하고 계셨다.
 

“오래 됐어.”
 

잠시 가게 안에 머물러, 지금까지 찍은 사진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때 어느 중년의 아저씨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담배를 사러 오신 듯했다. 그러데 아저씨는 나를 보고 난데없이 고래고래 소리치기 시작했다.
 

"너 뭐야 임마! 네가 뭔데 여길 와! 여긴 이 아주머니 사업장이야! 네가 할 일은 따로 있는 거야! 어서 못 나가! 카메라 들고 여기서 뭐하는 거야!"

 

'어찌하여 이곳 사람들은 나를 이토록 경계하는 것일까' 무서운 얼굴로 손가락질을 하면서, 고래고래 소리치는 그 중년의 아저씨에게 도대체 나에게 면박 주는 이유가 뭐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도저히 대화가 통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마치 물에 빠진 생쥐마냥 비참한 모습으로 가게를 빠져나와야 했다. 나는 굴하지 않고 구룡마을의 야경을 찍기 위해 좀 더 돌아다녔다.

 

 구룡마을의 야경이다. 우측에는 오리고기집들이 있다.
구룡마을의 야경이다. 우측에는 오리고기집들이 있다. ⓒ 구자민

 

내가 세상을 너무 몰랐던 것일까?

 

주황색 가로등 불이 가냘프게 흔들리고 있었다. 울적했다. 낯선 이방인이기 때문에 당했던 설움에 몸도 마음도 다쳤다. 분명 그것이 구룡마을 전체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고작해야 하루도 못 있었고, 많은 사람을 만나보지도 않았다. 그건 어렵게 삶을 일구고 계시는 구룡마을 주민 전체를 모욕하는 행위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기자에게서 '선입견'이란 쥐약이다. 좋은 기자는 '사실(fact)'이 아닌 말에 흔들리지 않는다. 구룡마을에 도착하기도 전에 택시기사에게서 들은 '근거 없는 소문' 때문에, 나도 모르게 색안경을 끼게 되지는 않았는지 스스로 자책했다.

 

귀를 뜯어 갈 듯 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발에 난 상처는 더욱 아려왔다. 순진했던 마음은 울적해졌다가 다시 차갑게 돌아섰다. 내가 세상을 너무 몰랐던 것일까? 아니면 기자라는 직업을 너무 가볍게만 생각했던 것일까. 세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막막했다. 희망을 찾는 것이 내 일이라 생각했는데, 그건 오만일까? 아니면 무지일까.

 

나는 이방인이다. 내가 느낀 혼란은 어쩌면, 단지 이방인이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일지도 모른다. 다음번에 구룡마을을 찾았을 때는 길도 잃지 않고 발도 다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좀 더 진솔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시도할 것이다. 돌아가는 내내 오늘 겪었던 일들 때문에 마음이 복잡했다.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갑자기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살던 곳, 사람이 있는 곳으로.


#구룡마을#포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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