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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킬. 자신들의 생의 터에서 폭주 문명의 희생양이 된 동물들의 참혹한 사체를 보노라면 속이 역겨워지다 못해 내장이 뒤집어질 정도로 비위 상하기 일쑤다. 그래도 작은 동물들의 사체는 괜찮지만 몸집이 있는 동물들의 썩은 체취는 오래도록 몸에 달라붙어 후각을 괴롭게 한다. 도로를 달리다 아주아주 크게 부릅뜨고 있는 눈과 마주쳤다. 소였다. 길 가에 버려진 채 죽어 있는 소의 몸뚱이 반 정도는 이미 뜯겨나가고 없었다. 이어 그 몸뚱이에 머리를 밀어넣고 아주 정신을 내다 놓고 고기맛을 즐기는 코요테 2마리와 시선이 마주쳤다.

 

 

'깜짝이야!'

 

이건 확실히 나도 그렇고 녀석들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사막 풀숲에 나와 먹이 앞에서 서성대는 코요테와 눈이 마주치자 당황한 나머지 잠시 안장의 균형이 흐트러졌다. 녀석들도 놀라긴 마찬가지. 사진 찍을 겨를도 없이 아직 다 씹지 못한 고기를 입에 문 채 종종걸음으로 풀숲으로 다시 들어가버렸다. 우린 서로가 동시에 교감하고 있었던 것 같다. 마주쳐봐야 피차 득될 게 없다는 걸.

 

일반 개보다 쫑긋한 귀와 꼬리, 날카로운 눈매와 어슬렁거리는 야생의 몸짓. 그들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보던 그 코요테보다도 덩치가 작아 보였다. 만약 그들과 맞서는 상황이 생겨도 최소한 물려 죽지는 않겠구나 할 정도로 몸체가 크지 않았다. 생경스런 코요테를 본다는 게 무섭기보다는 오히려 호기심이 일 정도다.

 

까보르까(caborca)로 향하는 길. 준비된 자에게 다가오는 모든 순간은 기대지만 준비되지 않은 순간에 다가오는 일련의 일들은 악몽이 될 수 있다. 충분한 음식과 물을 준비하고 야영을 하자고 마음먹고 있었기에 지난번과 같은 난감한 일을 겪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일찌감치 도로에서 약간 떨어진 공터에 자리를 잡고 텐트를 쳤다. 그리고 여유 있게 어둠을 맞이하고, 또 뭇 별들을 기다렸다. 과일과 빵으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텐트 주위에 혹시 있을지 모를 동물들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두 번이나 분뇨를 배설했다.

 

'여긴 오늘 내 자리니까 얼씬거리지도 마.'

 

야생에선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의 영역 표시다. 그런데 이 새로운 냄새에 되레 반응을 보이는 잡다한 동물들이 더 모여들면 어쩌지? 간단히 양치만 하고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를 건조한 오늘의 일기를 쓴 다음 여유롭게 노트북에 저장된 소설 한 편 읽고서는 잠을 청한다. 오늘 밤에도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청각을 후벼파고 텐트 위의 2026개의 별들이 바람에 스치운다. 저 별들은 이미 수만년 아니 그 이상 오래되고 죽은 빛이 이제야 내 눈으로 떨어지는 거겠지.

 

"아우~ 에헤헤헤오오우~."

 

아침은 상큼하게 수탉 대신 코요테가 깨워준다. 영화에서처럼 바위산에서 넘어가는 붉은 태양을 등진 채 멋지게 포효하는 소리가 아닌 강아지들 울음소리와도 흡사 비슷한 것 같다. 한 녀석이 울면 멀리 떨어진 다른 곳에서 연쇄적으로 우는 것이다. '어이, 간밤에 잠은 잘 잤는가?' 같은 안부메시지인지 아님 혹시 자기네들끼리 내 얘기를 주고받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영화 속 코요테 울음소리는 너무 미화됐다는 것. 그다지 박력이나 위엄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지난 밤 텐트 주위에 킁킁거리는 소리와 함께 심상찮은 기척이 감지되었는데 별 일 없이 넘어갔다. 역시 배설영역의 효과가 컸던 것일까. 잠시 조우한 코요테들과 내가 서로의 평온을 찾을 수 있게 일찌감치 짐을 꾸리고 까보르까로의 남은 거리를 재촉했다.

 

 

오후에 까보르까에 도착했다. 타운은 80년대 중소도시를 보는 듯했다. 동네 어귀에서 공놀이를 하던 아이들은 낯선 방문자가 신기한지 적극적으로 반가움을 표시한다. 골목에서마다 축구를 하고 있는 걸 보니 점차 멕시코 내륙으로 들어가고 있음을 실감했다.

 

국경쪽은 오히려 미국의 영향 때문인지 야구하는 아이들이 많았었다. 그런데 가난할 것 같은 이 애들도 다 핸드폰을 가지고 있었다. 가난한 그림자가 얼굴에 드리워져 있는 이곳에도 문명의 이기가 이리 깊숙이 들어와 있다니 새삼 놀랍기만 하다.

 

잠시 아이들과 간단히 교제를 나눈 후 타운 아래 쪽으로 내려갔다. 그 곳에는 과달로빠나(Guadalopana) 성당이 있다. 월요일이라 미사가 열리긴 하지만 미사 참석 목적보다는 바로 이 성당 게스트 룸에서 손님을 무료로 재워주는 역할을 한다는 황금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멕시코는 여행자들이 놀랄만큼 의외로 복지시설이 잘 되어 있다. 보통 게스트 룸을 무료로 운영(여행자 전용 아님)하는 성당이나 DIF(Desarrollo Integral de la Familia, 국립가정환경운동) 등에서 유숙할 수 있다.

 

정보를 잘 찾아보면 이런 곳에서 안전하고 유용하게 하룻밤을 지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여행자는 거의 없고, 홈리스나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들, 미혼모, 여타 이유로 임시로 기거하는 사람들을 위해 운영되긴 하지만 여행자에게도 개방은 되어 있다. 이럴 때면 단 하룻 밤의 보살핌으로도 가톨릭의 나라에서의 진한 형제애가 느껴진다.

 

성당에 들어서서 마음을 정화시킨 뒤 신부님을 찾았다.

 

"어서 와요, 형제."

 

루이스 M. 발렌시아(Luis M. Valencia) 신부님께서는 처음 보는 낯선 청년을 환대하며 게스트 룸을 소개시켜 주셨다. 숙소 편의뿐만 아니라 심상찮은 몰골을 보고서는 저녁으로 피자까지 대접해 주시는 것이다.

 

신부님은 남루한 여행자를 보자마자 엘리야를 대접한 사르밧 과부처럼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성서의 말씀을 유감없이 행하고 계셨다.

 

오래도록 경건한 삶을 살아온 인상이 풍기는 선한 눈매, 여든 셋이란 나이에 걸맞게 적당히 고풍스러워 보이는 곱게 빗어 넘긴 흰머리, 그리고 인자함이 물씬 풍겨나는 말투.

 

신부님은 노구를 이끌고 여전히 왕성하게 미사를 인도하고 계셨다. 비록 말투나 걸음걸이, 모든 것이 느렸지만 당신이 신 앞에 나아오는 길과 이웃을 향한 섬김은 그 어느 누구보다 빠르리라.

 

"그래, 코요테를 만났다고?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군. 거긴 코요테뿐만 아니라 퓨마도 산다네. 그리고 요즘 독이 한창 오른 뱀과 독전갈도 있으니 각별히 조심해야 돼."

 

길을 지나오며 내내 쉽지 않다 생각은 했지만 그 정도로 심각한 상황인 줄은 몰랐다. 이래서 모르는 게 약인가. 조금 더 몸을 사릴 필요가 있는 신뢰할 만한 조언이다.

 

"혼자세요?"

 

휴게실에 마주앉아 신부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문득 스친 의문이었다. 아무래도 신부라는 특성상 주와 함께하는 경건한 삶을 위해 평생 혼자 살기로 서원했을 테니까.

 

"그렇지. 난 가족이 없지."

 

가족이 없다는 예상된 그의 대답에 여든 셋의 신부님은 엄마 잃은 아기새 마냥 잠시 외로운 노인으로 내 눈에 비쳐졌다. 투명한 글래스 속에 잔잔히 일렁거리는 물을 입 안으로 한 모금 털어낸 신부님은 탁자 위에 컵을 사뿐히 내려놓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1952년이니까 벌써 50년이 넘었네, 신부가 된 지. 에르모시요에서 학업을 마친 뒤로는 평생 이곳을 지키며 살아왔다네. 솔직히 외롭지, 왜 안 그렇겠나, 허허. 그 때마다 정열적으로 살려고 노력했어.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고민을 상담해주기도 하고, 이젠 늙어서 운동을 잘 못하거든. 그러니까 틈틈이 청소를 통해 좀 더 바쁘게 몸을 움직이려고 노력도 하지."

 

생을 정리해야 할 시기에 여전히 성직자로서 더욱 정진하며 살아가는 그. 신의 일에 헌신하기 위해서 자신의 것을 포기한 그의 삶을 통해 마치 명도대비처럼 여전히 어줍잖은 욕심으로 얼룩진 나의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꼭 신의 일이라서가 아니라 그 어떤 대의를 위해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한다는 것, 그리고 그 가치가 내가 아닌 상대방에 초점이 맞춰진 상태로 일이 진행된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또 위대한 일인가를 나는 잘 알고 있다. 통탄스럽게도 머리로만 말이다.

 

 

"내일은 오랜 친구를 만나러 애리조나 투산으로 넘어갈 예정이야. 가족이 없는 대신 친구가 있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몰라. 친구를 만나는 날, 그런 날이 내게는 특별한 날이지."

 

친구를 만난다는 생각에 마냥 행복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루이스 신부님은 결코 권위 있어 보이지 않았다. 만약 길에서 마주쳤다면 평범한 동네 할아버지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그만 타운에서 한 평생 조용히 수도의 길을 걷는 삶에 서린 그의 자비로운 인상과 세심한 배려는 굳이 수단(soutane)이나 로만칼라 없이도 그가 왜 신부일까 하는 의혹을 들지 않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신의 종이 되기로 서원한 자가 스스로 권위를 높인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리라.

 

표백되지 않은 신부님의 순수한 인격체를 앞에 두고 마음이 푸근해져 온다. 내일 일정을 준비해야 하는 신부님과 오늘의 일정으로 피곤에 찌든 나이기에 피자 한 판을 먹는 동안에만 대화가 진행되었다. 마지막 피자를 오물오물 거리며 생각해 보니 이렇게 고결하신 분이 하찮은 청년과 식탁을 마주하며 기꺼이 대화한다는 작은 것에서 참 고마움을 느꼈다.

 

여든 셋 신부님이 아름다웠던 건 다만 그가 나에게 보여준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액션이라서가 아니다. 그것은 어둔 밤 파도가 치는 해변에 우뚝 솟은 외로운 등대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결코 쉽지 않았을 그 자리를 오직 신앙심으로 지켜가며 누군가에게 밝은 빛이 된 한 편의 서정시와 같은 인생.

 

이것은 감각과 무질서로 혼돈된 네온사인의 현대인들과 뚜렷이 대비되는 숭고한 별빛 같은 이야기인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느지막이 신부님께 감사의 편지를 써 식탁 위에 놓아두고서는 한결 가뿐해진 마음으로 다시 자전거 위에 올랐다. 성당 첨탑 십자가에 걸쳐진 햇빛이 유난스레 하얗게 보이는 것이 꼭 어젯밤 신부님의 온화한 미소 같기만 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 성경, 마태복음 25장 40절

 

늘 사물의 본질에 접근하기 전까지는 편견에 치우치지 말자고 다짐하면서도 어떤 때는 겉모습만 보고 쉽게 결론을 매조지 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꼬질꼬질한 누군가의 모습을 보면 이 사람을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이것은 그가 가진 것이 없기에 당연히 불행할거라는 내 식대로의 그른 잣대가 있는 것이다.

 

불편한 것에서 불행이 창조되는 것도 아니거니와 오히려 불편함과 부족함 속에서 감사가 나오는 이치를 나는 이 자전거 비전트립을 통해 알아가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여행하면서 자존심을 세울 때와 버릴 때, 사건을 깊게 들여보아야 할 때와 동시에 시야를 넓게 바라보야 할 때, 나와 남의 간극 사이에서 가장 이상적인 행복 퀄리티를 창출하는 거리조절, 이러한 것들을 배워나간다.

 

그리고 끊임없이 난관에 부딪히고 기억력 3초 금붕어처럼 실수와 잘못을 무한반복하는 한계를 절감하면서도 내가 부족하다는 건 그만큼 채울 수 있는 발전 가능성이 무궁하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독여 나간다.

 

하지만 가능성을 미완으로만 남겨두는 건 전적으로 젊음에 대한 직무유기다. 부딪치고 깨져보고 다시 도전해서 내 것으로 만드는 가능성의 현실화만이 꿈을 이뤄가는 멋진 무대가 되지 않겠는가?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이 남은 동시에 해야 할 것 역시 산더미다. 그리고 젊음은 순간이다. 촘촘히 이어진 생의 숭고한 최선들이 나중에 튼실한 인격과 지혜의 동아줄이 될 것이다.

 

익숙한 환경과 습관적인 만남 사이에서는 예측 가능한 일들로 매너리즘에 빠지지만 여행은 그것이 하나의 새로운 풍경과의 만남에 대한 창의적 접근이기에 너무나 매력적인 인생 공부가 된다. 자, 그럼 이제부터 루이스 신부님이 그러했듯 나 역시 혼신을 다한 게으름에서 탈피해 한 걸음 더 움직여보자. 아직 세상은 나에게 보여줄게 너무 많이 남았을 테니까. 세상은 넓고, 갈 곳은 많다!

덧붙이는 글 | 관련 사진을 강도당한 관계로 잃어버려 부득이하게 다른 사진들을 올렸습니다.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 입니다.


#세계일주#비전노마드#문종성#멕시코#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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