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부끄러웠다. 무엇이? 마더 테레사의 이러한 모습이? 물론 지독한 신심과 개방적 성찰성을 동시에 갖춘 사람이라면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자비를 팔다>(The Missionary Position)에서 제시하는 테레사 수녀의 행적들에 사뭇 충격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만한 신심이 없다.
나는 무엇보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마더 테레사'에 대해서 이러한 의심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이는 그녀가 '의문의 대상'으로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사회구성원의 일부였다는 것을 내 자신이, 더 나아가 우리 모두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망각했다는 것이다. 어떤 대상에 대한 검증이 배제되는 것은 '추종'일 뿐이다. 그녀가 성인일지는 모르지만 결코 '신(神)'은 아니지 않은가? 이 당연한 것을 너무 당연히 잊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개인의 문제일까? 나는 왜 이러한 의심을 '당연히' 할 수 없었단 말인가? 이는 검증을 원천적으로 차단한 가톨릭의 거시적 권력작용 시스템에 지난 30년간 체화된 나의 또 다른 모습이다. 가톨릭은 나의 모태신앙이고, 나는 무려 12년간 주일학교를 다녔고 교리교사를 6년 동안 하였다. 학부전공은 신학이고 대학원 석·박사 과정 동안 종교사회학에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그 어떤 이도 히친스처럼 '테레사 수녀'같은 거물을 바탕으로 특정관점을 제시하지 않았다. 미국에서 13년 전에 출간된 이 책을 언급한 이는 단연코 없었다.
<자비를 팔다>, 사실과 히친스의 관점 함께 이해해야특정범주에 관심을 가지지 못하면 그 세부자료들은 눈에 보일 수 없다. 가톨릭의 논쟁시스템은 특정범주에 대한 관심 자체를 무마시킨다. 일종의 신심시스템이다. 여러 토론회에서 나의 결론은 "왜 이렇게 종교권력자들은 세속적으로 타락했는가? 테레사 수녀 좀 본 받아라"라는 식이 태반이었다. 내가 왜 그러한 행동을 보였는지 구체적으로는 증명되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원래 비판자는 '가난'을 전면에 내세운 대상에게는 한없이 동정심을 가질 뿐이다. 그만큼 테레사 수녀는 가난 중에서도 '극빈'의 상징이었다. 아무리 버릇없는 종교비판가라 할지라도 그녀를 비판할 배짱을 지니기는 웬만해서는 어렵다.
이 책이 만약에 가톨릭 안에서 반향을 일으킬 수 있다면 두 가지 점에서 긍정적인 논쟁구도로 다루어져야 한다. 만약 이것이 없이 히친스 마니아 vs. 히친스 안티의 구도로 흘러간다면 교회는 절대로 발전할 수 없다. 흔히 무신론의 선두주자로 리차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의 저자)와 히친스를 언급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신은 없다!'라기보다 '신을 믿는 자들이여! 너희들 도대체 왜 그러냐!'라는 식이다. 즉 그들의 주장은 '한 번 잘 살아보자'라는 것이지, '나와 너'의 계파를 형성하고자 함이 아니라는 것이다(물론 자연과학적 이론을 전면으로 내세우는 도킨스의 경우 신의 존재 자체를 강력히 부정하는 것도 사실이다).
모든 책이 그러하듯 이 책 역시 히친스가 주장하는 사건(Fact)과 이를 해석의 지형으로 확장하는 그의 관점(Perspective)을 함께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팩트를 오인하고 특정 관점을 주장하는 것과, 관점에 매몰되어 팩트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지 않는 자세다. 전자의 경우, 팩트를 제대로 이해할 경우 관점을 철회하면 별 문제가 없다. 말 그대로 '잘못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 특히 이것이 지속적으로 주장이 될 때, 이를 반대하는 입장과 긍정적인 논쟁구도를 형성할 수 없다. 무엇을 말하든 '관점'을 위배시키는 저급한 행동으로 손쉽게 규정해 버리기 때문이다.
가톨릭, 히친스 주장에 어떤 논쟁구도 형성할까그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1월19일자)에서 주장한 것처럼 히친스의 팩트에는 어떤 이도 토를 달지 못했다. 마더 테레사와 아이티 독재자 뒤발리에의 부적절한 관계, 테레사가 미국의 금융사기꾼 찰스 키팅으로부터 후원금을 받고 추후 그에게 법적인 관용을 베풀어달라는 편지를 판사에게 보낸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제 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다. 히친스는 공공연한 팩트에 근거하여 관점을 제시한다. 그는 책에서 "그녀의 세계여행은 순례자의 방랑이 아니고 권력의 필요에 부응한 캠페인"이라고 말한다. 물론 테레사 수녀가 그렇게 간사한 입장을 실제로 가졌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의 유무는 사실 큰 이슈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팩트에 근거하여 관점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제시될 수 있느냐는 문제다. 이러한 점에서 히친스는 독자들에게 '논리적 향연'을 충분히 만족시켜 준다.
기대되는 것은 가톨릭교회가 히친스의 주장에 어떤 논쟁구도를 형성하는가다. 물론 관심자체를 배제할 수도 있겠지만, 가톨릭이 신심투철한 일부의 종교가 아닌 가톨릭(Catholic)이라는 어원에서 나타나는 '보편적'이라는 차원에서의 설득적 종교를 희망한다면 뭔가 지식적 논쟁자로써 사회에 등장하는 것 역시 나쁘지 않을 것이다.
<다빈치 코드> 때의 민감한 반응 답습해선 안돼히친스보다 훨씬 예의바른 다른 논쟁에서 필요 이상의 주도면밀함을 과시하였던 가톨릭 교회는 분명 뭔가의 반응을 보일 것이다. 다만 팩트와 관점의 상관관계에서 가장 자유로워야 했던 픽션소설 <다빈치 코드>에 대한 교회의 민감한 반응을 답습해서는 안 될 것이다. 대중들이 원하는 것은 논쟁을 통해 사고의 확장을 얻는 것이지 특정범주를 더 추종하거나 더 미워하게 되는 소모전이 아니다.
히친스는 "논쟁이 있다는 것 자체가 계몽의 증거"라고 하였다. 히친스가 던지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가톨릭교회는 가난에 대한 독선적인 집착으로 이성이 간섭해야 할 곳을 완전 차단하고 있지는 않는가? 가난과 함께하는 것이 어찌 면죄부가 이유가 될 수 있는가?
물론 이러한 메시지가 악마의 소리라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테레사 수녀가 '실제로' 극빈자에게 '최상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았다는 것은(많은 기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목격자들의 입에서 나온 내용이다. 히친스의 상기 주장은 이러한 팩트에 바탕하여 진행됐음을 반드시 유의하길 바란다. 독자들은 그러한 커다란 축의 '다툼'이 인류의 사고를 더욱 확장시킬 수 있다는 믿음에 또 다시 흥분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