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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위대하지 않다>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 김승욱 옮김 / 알마, 2008 / 438쪽 / 2만5000원
<신은 위대하지 않다>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 김승욱 옮김 / 알마, 2008 / 438쪽 / 2만5000원 ⓒ 알마
신중심의 사고가 인간중심의 사고로 전환되면서 신의 존재와 종교의 의미에 대한 논쟁은 점점 더 발전하고 있다. 르네상스로부터 계몽주의 사회로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점차적으로 “신은 없다. 신은 죽었다. 신은 떠나갔다”는 선언과 함께 인본주의 사회를 구축해왔다.

이제 그 논의의 진보과정에서 <신은 위대하지 않다>(알마 펴냄)는 다소 완화된 듯하지만 매우 신랄한 종교비판서가 크리스토퍼 히친스라는 기독교 무신론(스스로 그렇게 표현함)자로부터 또 나왔다.

21세기가 시작되면서 종교, 혹은 기독교에 대한 비평의 물결이 다시 거세지고 있는 느낌이다. 이는 지난 20세기의 중반에 버틀란트 러셀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던 논쟁의 연장이자 새로운 국면으로 평가된다.

러셀의 논쟁은 니체를 시작으로 그의 실존주의적 인식론의 적자들은 사르트르나 카뮈의 철학적 체계의 결정판으로 볼 수 있다. 아울러 니체의 실존주의적 비평은 볼테르의 계몽주의적 가르침의 결론이기도 하다. 인류의 사상사를 이렇게 거꾸로 거슬러가 보면 종교비판의 역사적 흐름이 파악된다.

종교와 과학에 대한 오해

그 기본 정신이야 인본주의를 주창한 르네상스로부터 시작되겠지만 구체적인 방법론은 과학적 방법론을 제기한 베이컨과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다. 인식론의 우상을 지적한 베이컨은 귀납적 방법론을 제기했고, 회의주의 철학을 창출한 데카르트는 연역적 방법론을 제기함으로써 지성에 의지한 회의적이며 과학적 방법론이 시작된다.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의심해야 한다는 저 고상한(?) 법칙은 바야흐로 종교에 대한 회의주의의 씨앗이 된다.

회의의 판단 근거를 경험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이 바로 데이비드 흄이다. 흄이야 말로 근대 회의주의의 사상을 확립한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에 따르면 종교적인 신념이나 고백들은 인간의 이성적 경험을 벗어나는 것들이기 때문이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종교에 대한 체계적인 비판이 흄에게서부터 시작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히친스 역시 그의 책에서 흄을 자주 언급한다.

그러나 데이비드 흄의 경험론적 회의주의에 기초해서 초월적 신 존재와 종교의 가능성을 순수이성의 한계와 더불어 제시한 임마누엘 칸트에 대한 이해까지 발전하지는 않은 것 같다. 만일에 칸트를 이해했다면 적어도 흄의 입장에서 그저 단순히 종교를 회의적으로 비평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히친스가 보여준 많은 사상적 한계와 틈 가운데서 한 부분일 뿐이다.

암튼 근대 과학적 방법론 이후 발전하기 시작한 합리론과 경험론의 틀 속에서 현대과학은 귀납적 결론에만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체계로 발전해왔다. 따라서 연속된 실험과 경험을 통해 일관된 결론을 도출해낼 수 없는 가정은 과학적 진리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지난 수백 년간의 과학적 업적은 어느 정도 과학이 자연의 진리를 설명해주는 훌륭한 방법론이 되어온 것은 사실이다. 이것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해서 히친스는 종교를 비평한다. 물론 지금까지 그리스도교를 비평한 모든 사상가들이 다 과학적 합리주의에 기초해 자신들의 이론들을 전개해왔다.

그러나 과학이 절대적이지는 않다는 것 또한 현대사상에서 입증되었다. 20세기 중반에 토마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과학적 패러다임의 전이를 통해 과학이 절대적이지 않고 변화된다는 사실을 설명해주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는 과학적 결론이 바뀌는 것을 자주 목격하였다. 이런 변화는 21세기에도 계속될 것이다. 결국 히친스의 믿음의 기초인 과학도 사실상 절대진리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그런데 그의 책에서 히친스는 과학적 몇몇 개념을 근거로 신앙의 논리를 신랄하게 비평한다.

그의 눈에 비친 기독교가 근본주의적이라면 과학에 대한 그의 인식론적 태도 역시 근본주의일 수밖에 없다. 과학적인 것이 모두 절대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학문적 자세에서 논의의 여지는 언제나 열려 있는 것이다. 지난 세기 버틀란트 러셀과 코플스턴 신부와의 논의에서 우린 과학과 종교의 대화의 가능성을 충분히 볼 수 있었다. 물론 이 사실을 부인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적어도 역사를 객관적으로 분석코자 한다면 그런 중용의 의미를 설명하기는 어렵지 않다.

히친스가 말하는 것처럼 종교는 굳이 그 자체를 과학적이라고 증명할 필요가 없다. 일부 종교인들 가운데 지적설계와 같은 현대과학적 방법론으로 신앙의 체계를 세우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교 안에서 나타난 다양한 진리 체계 구축 방법의 하나일 뿐이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로부터 이성에 의한 신 존재 증명, 즉 이신론적 사유가 발전해온 것을 사실이지만 그것은 기독교 신학의 한 지류이지 모든 것이 아니다.

보편적인 신학에서 신학자들은 종교를 과학으로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과학이 하나의 방법론으로써 완벽한 진리를 다 설명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임마누엘 칸트가 설명하는 것처럼 종교는 순수이성의 한계 밖의 영역이므로 이성적 증명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칸트는 이성의 증명을 넘어서는 마음속의 도덕률과 하늘의 별의 존재를 통해 초월적 존재의 가능성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종교를 이해했다.

21세기에는 하늘의 별이 칸트의 시대에서처럼 완벽하게 이성의 영역을 벗어났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요소들이 있다. 생각해보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단지 물리적 요소만으로 채워져 있는가? 많은 심리학자들이 설명하고자 하는 것처럼 우리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영역까지도 모두 물리적으로 설명이 될 수 있겠는가? 일부 환원론적 과학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관념론적 사상가들은 그렇게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결국 히친스가 아무리 환원론적 관점에서 모든 진리 체계와 인식 체계를 경험 속에 국한시키려한다고 해서 모든 진리가 분명해질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런데 저자는 그런 복잡한 체계를 무시한 채 단순화된 설명으로 종교 혹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비판한다. 그러나 이 점은 비판의 영역이 될 수 없다. 사실 이런 종류의 비판은 히친스에게서보다는 도킨스나 해리스, 데닛 등에게서 훨씬 더 많이 나타났다.

히친스는 과학자가 아니라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자 저널리스트로 활동했기 때문에 그의 기독교 비판은 과학과 종교에 관한 논쟁보다는 사회학적 의미에 더 치중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과학적 사고에 입각해 종교 비평의 칼을 들고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분명히 말하건대, 종교는 과학적일 필요가 없다. 과학이 모든 진리를 다 설명해줄 수 없는데 어째서 종교를 과학적이라고 말해야 한단 말인가? 종교는 기본적으로 영혼과 관계한다. 인간의 영혼과 관련된 모든 현상이나 사실을 과학이 어찌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심리학과 같은 정신과학으로 그 부분이 다 설명되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이다. 프로이트 이래로 칼 융이나 자크 라캉 등의 정신분석적 이론들과 아들러 이래로 스키너, 로저스, 펄스, 에릭슨 등 20세기 심리학자들이 밝혀낸 정신현상에 대한 이론들은 고작 작은 범주의 가정들에 대한 부분적인 입증에 불과하다.

사실상 심리학의 발달이란 게 이전 이론에 대한 반론을 찾아내는 과정의 연속일 뿐이다. 이것은 결국 다양한 정신 현상들을 하나의 이론 체계로 설명해낼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히친스는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우를 범했다. 그래서 그의 주장은 다소 신랄하고 대범하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할수록 자기모순에서 벗어날 수 없음 또한 자명한 사실이다.

역사에 대한 오해

히친스의 책을 읽는 독자들은 그의 사상이 20세기에 머물러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현대사상의 잣대로 과거의 모든 것들을 비평한다. 예를 들어 고대 사회는 신화의 시대였기 때문에 신화적 방식으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는 역사적 사실 같은 것을 완전히 무시해버린다. 그저 현대사상의 잣대로 그 시대의 몽매를 지적할 뿐이다. 그러나 불트만이 그렇게 했듯이 신화의 시대에는 신화의 방식으로 어떤 진리 체계를 설명하고자 했기 때문에 그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진리의 본질을 우리 시대에 재해석해 내어야 한다는 준엄한 미션에 대해서는 아무런 인식이 없다.

이것은 역사에 대한 히친스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정말로 역사가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리스도교 성경을 포함해 고대의 종교 경전들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 특별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고대 사회의 진리 체계를 담지하고 있다. 그것이 고대의 신화적 방식으로 기록되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에도 여전히 권위의 경전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그 기록에서 오늘날의 인식 체계에 따른 진리의 재구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20세기에 기록되어졌다면 그 건 분명히 20세기의 사유적 방식으로 기록되어졌을 것이다. 모든 경전은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종교의 경전을 분석하는 방식은 그런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문맥들을 고려해서 해야 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구약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 아니다. 그건 전승사 내지는 구원사라고 하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종교문화사적인 기록인 것이다. 이 기본적인 사실을 염두에 두고 성경을 이해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히친스는 그러한 기본을 무시한 채 오로지 현대적 관점에서 과거의 기록들을 평가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히친스의 역사에 대한 또 하나의 오해는 사상사의 흐름과 발전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이모니데스, 토마스 아퀴나스 등을 일방적인 비판으로 매도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일방적으로 비판하는 대신 그 사상의 흐름을 수용해 그 시대에 납득할 수 있는 진리 체계들을 세워갔듯이, 적어도 현대사상가들은 고대로부터 면면히 이어져오는 사상의 흐름들을 토대로 사상의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과거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의 사상체계들은 절대로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오늘이 있게 한 기초들이다. 히친스의 역사적 태도는 자신의 출생의 뿌리를 무시한 채 독단적인 주체를 강조하는 어리석은 사람과도 같다.

역사 문제와 관련해서 히친스의 식견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요소는 역사적 디테일의 부족에 있다. ‘신은 위대하지 않다’에 기록된 내용들에는 역사적 디테일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오해들이 있다. 그가 모든 부분에 있어서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오해들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렇지만 그런 오해를 기초로 한 그의 비평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히친스는 예수가 시리아의 총독 퀴리니우스 때 탄생했다면 그건 AD6년에나 가능하다는 설명을 한다. 그러면서 예수가 AD4년에 탄생했을 거라고 기록했다(95페이지). 일단 이것은 4BC를 잘못 기록했거나 아니면 번역상의 실수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퀴리니우스와 관련된 부분은 분명히 그가 역사적 지식이 부족한 것을 드러내준다. 퀴리니우스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던 때는 서기 6~7년 이외에도 기원전 7~4년경에도 있음을 역사적 자료들은 보여준다.

실제로 역사가들은 이런 역사 해석학상의 문제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퀴리니우스의 문제를 가지고 기독교의 모순점을 지적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제기하는 히친스의 의도는 무엇인가? 역사적 디테일을 무시하고 자신의 주장만을 제기하려는 의도이거나 아니면 역사적 지식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3장에서 음식과 관련된 제한에 대한 그의 신랄한 비평도 도가 좀 지나친다. 유대인들이 레위기에 음식의 규례를 세운 것은 단지 깨끗하고 더러움의 내용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그가 신학적 해석과 역사에 대한 이해의 부족을 드러내는 것이다. 학자들은 이 문제가 단지 깨끗함과 부정함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인 성과 속의 문제임을 설명하고 있다. 즉 그것은 종교적인 언약과 신념의 규례이다. 특별히 유대인들이 짐승들을 성과 속으로 나눌 때 그 기준은 현상학적인 기준에서의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눈 것이다.

예를 들어 돼지는 굽은 갈라졌는데 되새김질은 하지 않기 때문에 비정상으로 여겨졌고 그래서 부정한 짐승에 속하게 된 것이다. 이런 현상학적 구분에 의해 유대인들은 종교적 규례를 만든 것이다. 히친스는 신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디테일을 다 섭렵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 일반적인 비평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비평은 이미 많은 비평가들에 의해 제기된 일반적인 내용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으로 종교나 그리스도교가 모두 비평되어질 수는 없다.

1844년 미국에서 종말 운동을 펼친 사람은 조지 밀러가 아니라 윌리엄 밀러였다. 히친스는 몇 번에 걸쳐서 그의 책에서 그를 조지 밀러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런 점도 역사적 디테일의 문제로 지적할 수 있다. 그만큼 역사의 디테일이 조심스럽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런 디테일의 오류보다 더 심각한 것은 그의 역사관에 있다. 루터 시대에서의 루터의 행위, 윌리엄 오캄의 이론에 대한 자기중심적 전용, 나그함마디 문서와 신약정경의 역사, 구약과 신약의 이해 등은 역사의 해석에 많은 오해를 보여준다.

역사가 역사가의 해석의 산물임에는 틀림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임의의 해석만으로 다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콜링우드는 역사란 역사가의 양심이라고까지 말했다. 역사를 해석할 때는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한 역사해석자의 양심이 들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히친스는 이런 양심을 의식하지 않고 종교를 비평하기 위해서 역사를 임의로 재구성하고 있다. 많은 부분에서 그의 역사 인식은 역사가나 학자의 인식이라기보다는 저널리스트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실재(reality)에 대한 오해

히친스의 종교비평은 종교의 본질에 대한 비평이라기보다는 종교의 현상에 대한 비평이다. 그는 ‘종교는 생명을 죽인다’라는 제목 하에서 인류 사회에서 등장한 많은 종교의 부정적 현상들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평한다. 그건 이미 볼테르가 <관용론>에서 제기했던 그런 류의 그리스도교 비판과 동일한 것이다. 문제는 종교를 비평하는 많은 비평가들이 일반적으로 제시하는 많은 내용들이 사실은 종교의 본질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현상의 문제라는 데 있다.

종교가 인간의 삶과 사회 속에서 구현되기 때문에 본질이 왜곡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 사실 히친스가 언급한 세르비아나 아일랜드, 이라크, 이스라엘 등에서 발생하는 수 많은 종교전쟁들은 종교를 내세운 왜곡된 현상이지 종교의 본질 그 자체는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 정신이 저들을 그런 생명파괴의 길로 내 몰았다는 식의 결론은 지나친 감이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 수천 년의 인류 역사에서 종교가 남긴 긍정적인 삶의 요소들을 완전히 무시할 만큼 종교는 철저하게 부정적인 요소로 가득 찬 것이 사실일까? 히친스의 논의 가운데는 “종교가 사람을 착하게 만드는가?”와 같은 도덕적 부분도 들어 있다.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도덕과 윤리가 결코 종교의 영역이 아님을 역설하였고, 그 후의 현대 사상가들이 윤리를 사회적 산물 정도로 여기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에서 종교의 순기능과 역할을 주장하는 건 매우 근본주의적 논리처럼 들릴지 모른다. 사실 그런 사상적 염려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도덕(moral)의 실재에 대한 논의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키고 환원시킨 결과일 뿐이다.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의 순수이성이 알 수 없는 요소 중의 하나로 마음속의 ‘도덕률’을 들었다. 이 ‘모럴’이 본질적인 것이냐 아니면 사회 발전에 따른 정신적 진보의 산물이냐에 대한 관점에 따라 선에 대한 이해는 달라진다. 문제는 절대윤리나 도덕에 대한 강조가 도전되어질 수 있는 것이 사실인 반면 절대윤리의 본질을 거부하는 것 또한 도전의 대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소위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의 ‘모럴’의 본질이 무엇인지 사상적으로 합의된 바도 없고 합의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모럴’에 대한 실재의 논쟁은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논리에 함몰될 수 없는 요소가 아니겠는가? 히친스는 이런 점에서 진지하지 않았다.

사실상 히친스의 종교 비판은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존재론적 인식에서부터 출발한다. 결국 그는 실재란 플라톤의 이데아가 아니라 현상이자 유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물론적 실재론과 유신론적 실재론 가운데 어떤 것이 더 인류에게 희망이 될 것인가? 히친스는 유신론적 실재론을 비평하고 있지만 정작 유물론적 실재론은 훨씬 더 많은 비평의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신의 존재는 종교인들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만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그런 현상을 넘어서도 여전히 신의 존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의 지평은 풍부하다. 신의 실재가 그만큼 보편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재론적 관점에서 신의 존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태양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비교해 볼 수 있다.

히친스는 우리의 육안이나 망원경으로 관찰되어지는 태양을 태양의 실재라고 생각하고 그런 실재론에서부터 태양의 의미를 논한다. 즉 그가 주로 주목하는 태양은 태양의 흑점이나 홍염, 플레어, 태양의 탄생과 파괴 등과 같은 지극히 현상적인 측면인 것이다. 태양은 이런 것이며, 따라서 태양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모두 이런 현상 속에서 구축되어질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태양의 실재인가?

사실 태양은 우리의 눈으로 하여금 사물의 빛과 색을 관찰할 수 있게 해주며, 과일들을 달콤하게 만들어주고, 지구의 생명체가 유지될 수 있도록 각종 물리적인 조건을 제공해 준다. 따라서 태양은 무지개이며, 색깔이고, 달콤함이며, 생명이다. 태양의 실재는 흑점이나 홍염, 플레어를 넘어서 색이고, 맛이고, 생명이다. 실재는 그런 것이다. 신의 실재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교나 가톨릭, 이슬람, 그 외의 수많은 종교가 있고, 그 종교에 귀의한 종교인들이 있다. 그런 대상들에 의해 나타나는 신의 이미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이미지들만으로 신의 실재를 한정할 수는 없다.

신은 인류사회에 수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무수한 영향들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이 생명의 근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히친스는 종교는 생명을 죽인다고 말했는데 그가 소위 다큐멘터리식, 저널리즘식으로 규정하는 한 그 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생명을 살린다. 그의 생명살림의 정신을 구현하는 것이 바른 종교의 모습이기도 하다. 히친스는 신의 실재에 대한 인식론적 오해를 가짐으로써 결국 신에 대해 오해했고, 종교에 대해서 오해했다. 이 점을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새로운 계몽이 필요

히친스는 책의 결론에서 새로운 계몽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인간을 무지몽매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계몽이다. 계몽은 빛, 즉 진리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근대사회에서 계몽은 이성에 대한 자각이었다. 그것으로 합리적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를 꿈꾸어보고자 했다. 그러나 19세기 이런 계몽주의의 이상은 산산이 부서졌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인류는 미증유의 인재(人災)를 겪었다. 그래서 20세기 중반에 사상가들은 ‘계몽변증법’, ‘부정변증법’ 등을 통해 계몽주의의 계몽을 주장하였다.

히친스가 말하는 새로운 계몽이란 게 무엇인가? 우리의 담론에서 종교적인 없애버리고 더 철저한 인본주의적 문명의 진보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그의 결론은 근대주의적 계몽이 왜 실패했는지, 그 역사적 의미를 알지 못한데서 온 오해이다. 우리에게 새로운 계몽이 필요하다면 그건 지금까지 인본주의의 업보를 되돌아보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히친스는 종교적 폐해를 걷어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우린 지금 니체와 마르크스와 싸르트르와 구조주의, 후기 구조주의 사상가들의 문제점들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그런 정신과 사상으로 세뇌된 현대사회의 폐해를 걷어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계몽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히친스의 한 극단이 우리로 하여금 이런 다른 극단을 강조하게 한다.

그러나 그런 극단으로는 지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서로가 통합해야 할 필요는 있다. 그런 의미에서 히친스의 신랄한 종교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하고 받아들일 여지가 있다. 진정한 새로운 계몽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히친스의 비판을 채찍으로 인류는 다시 한번 진정한 생명력과 인간성의 미래로 나아갈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뉴스앤조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신은 위대하지 않다 - 개정판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승욱 옮김, 알마(2011)


#히친스#신은위대하지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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