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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2일(일)

 

새벽 4시. 밤하늘에 별들만 총총하고 다들 깊이 잠들어 있을 시각. 주섬주섬 배낭을 챙기고 슬그머니 방을 빠져나오려는데, 돌체 방에서 찌르릉… 찌르릉… 알람 초창기 소리가 적막을 예리하게 자르더니, 잠시 후 돌체가 나타났다. 술이 덜 깼는지 헝크러진 머리가 고슴도치 같다. 어둔 골목 앞에 서성이며 택시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너무 고마웠어요!”

“마날리에 도착하고 다음 델리행 버스를 타는 시간 텀이 그리 넉넉하지 않아 좀 걱정이 돼요. 혹시, 문제가 생기면 이리로 연락해요. 알았죠?” 그는 자신의 명함을 건네준다.   

 

여전히 어둔 공영버스터미널. 짙은 어둠 아래서 여행자들 무리가 음침한 침입자들 같다. 그 무리에 섞이고 싶지 않아 저만치 거리를 두었다.

 

버스는 어둠을 안고 달리기 시작한다. 깨어 있는 것은 버스뿐. 무덤처럼 잠에 흠뻑 빠져 있는 승객들의 숨소리가 고르게 낮은음자리표 어딘가에 걸려 있다. 차가 간간이 흔들릴 때마다 푸우~ 날숨이 긴 쉼표처럼 이어지면서. 깜깜한 길 위를 슬쩍슬쩍 비추는 헤트라이트 불빛이 가물가물하고, 꼬꾸라질 듯 거꾸로 내려가는 길은 아스라하기만 하다. 어디선가 쿨럭쿨럭 물살이 바윗돌에 부딪치는 소리. 아마도 저 아래에 물길이 열려 있고 밤새 히말라야 줄기를 타고 흘러 내려온 부지런한 놈들이 힘차게 물살을 일으키고 있을 것이다. 

 

 

다시 되돌아가며...

 

차창으로 아침 햇살이 눈자위에 내려앉자마자 널뛰기 하듯 흔들리고 있다. 저 멀리 히말라야 꼭대기에서부터 빛이 닿기 시작하면 붉은 빛은 산등선을 잠식하듯 타고 내려와 불이 옮겨 붙듯 옆 산마루로 이어, 삽시간에 골골마다 깊숙이 퍼져 들어간다.

 

갑자기 버스가 쿵덩쿵 내려앉으며 허리를 꺾을 때 꼬리처럼 따라 오던 긴 그림자가 낭떠러지 아래로 끝없이 추락했다. 현기증이 무겁게 머리를 짓누른다. 다시 그림자가 허우적거리며 벼랑을 기어올라 겨우 따라 붙었고 난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손잡이를 꽉 붙들고 있는 손바닥에 어느새 식은땀이 배었다. 속이 메스꺼워온다. 

 

'오던 길을 똑같이 다시 내려가는 구나.' 그러나 어느 쪽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길은 사뭇 달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여섯 살이었을까. 엄마와 손잡고 신나게 걷고 있었는데, 손이 허전하고 엄마는 보이질 않았다. 순간 멈칫하면서 불안했지만, 아직 길을 잃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더는 앞으로 갈 순 없었다.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똑같은 길이니 엄마를 곧 만날 거야. 차라리 멈추고 기다리는 편이 나았으련만 그럴 순 없었다.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까이 돌아가야  한다는 절박함도 있었지만, 그냥 서있는 것 자체가 두려웠다.

 

그렇게 발길을 돌렸었다. 그리고 서둘러 걸었다. 길을 잃은 사람이 길을 서두른다고. 그런데 이상하다. 걸을수록 그 길이 그 길 같지가 않았다. 또 다시 돌아가려 뒤돌아보니 뒤따라오던 길 역시 전혀 낯선 공간이 되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이제 어디로도 갈 수 없었다. 그 때 내가 길을 잃었다는 것을 확연히 깨달았었다. 어느 쪽으로도 더는 갈 길이 없어질 때, 길을 잃었다는 감각이 찾아온다는 걸 그 때 처음 알았다. 왔던 길과 그 길로 되돌아가는 길은 때론 이렇게 달랐다.

 

처음 이 길을 오르던 날을 생각한다. 끝을 알 수없었던 구불구불한 길과 뒤따르던 고통. 얼마나 징그럽게 무서웠던지. 그러나 이 길은 주변의 바위와 흙, 바람, 하늘에 섞여 한통속으로 어울리고 있고, 어우러지는 만큼 고집스럽지 않아 힘들지 않다. 버스가 잠시 출렁이듯 덜커덩거릴 때,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들렸다.

 

“이 버스! 작은 노아의 방주 같다는 생각 안 들어?”

“이곳 히말라야가 옛날에 물속이었다니까 말이야.”

 

이곳이 생명의 물로 가득 차 있었을 때, 수많은 생명들의 꿈같고 비단 요람 같은 에덴의 낙원이었을 테지. 그렇게 평화와 행복으로만 생이 이어질 줄 알았을 거야. 언제였을까? 갑자기 세상이 아수라장으로 흔들리고 무너지듯 충돌하기 시작한 건. 빛과 어둠이 혼재되고, 생명인 것과 생명 아닌 것의 구분이 사라진 날은. 하늘을 받쳐 들 수도 땅에 의지할 수도 없게 된 것은. 그걸 보면서, 살아 낙원이었던 히말라야는 하늘의 저주에 핏발이 솟았을까?

 

그리고 나서 거짓말같이 하늘이 파랗게 개이고, 시간이 지나자 혼돈조차도 그대로 굳어 버렸다. 헌데, 그 많던 생명들은 어찌 되었을까? 휩쓸리듯 생명의 바다에서 죽음의 땅으로 올라온 것들은 결국 히말라야에서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다. 그리고 흙이 되고 모래가 되고 먼지가 되었을 것이다. 저기 보이는 히말라야의 모래와 돌, 바위들은 그 때를 기억하고 있을 것만 같다. 그런 생각으로 히말라야를 세 눈을 뜨고 바라보니 이젠 그 오랜 세월의 흔적이 예사롭지 않다. 그리고 보니, 내 앞에 놓여 있는 시간은 얼마나 장구한가? 그에 비하면 아주 짧은 시간 살다 가는 우리들 그리고 우리의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들은 또 얼마나 짧고 덧없을까?

 

천막 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 간단다. 탈진한 한국인 여행자 두 명이 누워 있고 걱정스러운 듯 한 사람이 이들을 지켜보고 있다. 뜨거운 짜이를 마시며 그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참, 대책이 없네요.”

“네, 하지만, 한 사람이라도 아프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일행은 낙오자 없이 갈 수 있더라구요. 가능한 물을 많이 마시게 하고, 몸을 따뜻하게 하고….”

 

돌아보니, 이 길을 오르던 그 날처럼, 여행 시작하고 그 때만큼 두고 온 것들, 사람들이 사무치게 그리웠던 적이 없었다. 왜 사서 고생을 하는 걸까? 가슴을 쳤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상황에서 우연하고 일시적인 것이었을지라도 위로받고 위로할 수 있는 대상은 항상 우리 곁에 있음을 알고 얼마나 감사했던가. 이 세상 천지에 뭔가 나누지 못할 대상은 없었다.  이 풀 한 포기 허락지 않을 것만 같은 황량한 히말라야도 실은 이 지구를 받쳐 드는 단단한 멍석으로 보였다. 또한, 이곳에서도 엄연히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고, 저마다 자신의 이름으로 그 자리에서 서로 화합하고 나누며 삶을 이어가고 있다.

 

잃어버린 버스표

 

승객들의 모습이 보인다. 눈들이 깨어 있었다. 응시하는 곳이 곧 파헤쳐질 듯 쏘아보는 강렬한 시선의 인도사람들이 간간이 보이고, 가볍지 않을 짐 보따리가 삶의 무게인 듯 라다크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들 속에 이질적인 존재들이 고루 섞여 앉았다.

 

레게머리에 여행 떠나온 지 오래 되었던지 꺼뭇꺼뭇한 수염 덕에 그나마 좀 나이가 들어 보이는 세 명의 이스라엘 젊은이들. 이들의 수다소리가 소리로 치면 유일하게 도드라진다. 꽁지머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꺼운 돋보기안경을 썼는데 뭔가 경계하는 듯 시선이 불안해 보이는 일본남자. 운전석 바로 뒤 자리에 버스 앞창만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적당히 마른 다부진 몸매의 독일인 남자는 이상하게도 탐정 내지 형사 같은 느낌이 든다. 버스 안의 승객들을 가끔씩 뒤돌아보며 뭔가 살피는 듯하다.

 

내 좌석의 통로 건너편에는 스페인 젊은 커플이 있고 커플 옆자리 창가에는 홀로 여행인 호주 여성이 앉았다. 그녀는 노트에 뭔가 열심히 쓰고, 그리더니 그도 무료했던지 자신의 금발머리를 풀었다 묶었다 반복한다. 아마도 그녀에게는 대화의 상대가 더 절실해 보였다. 그녀가 대화 상대를 구할 수 있는 기회는 중간 중간 휴게소에서이다. 이곳에서 어슬렁 휴식시간을 보내는 동안 서로를 은근슬쩍 탐색한다. 그리곤 적당한 대화 상대를 찾으면 바로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휴식시간이 끝나 버스에 오를 때 즈음이면 자연스레 대화의 상대에 따라 자리가 바뀌기도 한다. 이것이 지루한 긴 버스여행을 견뎌내는 방식이기도 했다.

 

표 검사가 시작되었다. 무뚝뚝해 보이는 차장이 제법 근엄하게 지날 때마다 승객들은 긴장하는 표정. 뭔가 잘못되었다가는 이 허허벌판 사막 같은 히말라야로 내쳐진다면 그만한 낭패가 없을 터였다. 헌데, 갑자기 뒤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무슨 일인가 돌아보았더니, 일본인이 무임승차임이 드러난 것이다. 그는 자신은 버스표를 구입했으나 잃어버린 것이기 때문에 다시 또 버스표 값을 내는 것은 당치 않은 것이며 그럴 돈도 없다고 고집을 피우고 있었다. 차장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으니 낼 수 없다면 다음 휴게소에서 버스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호통을 쳤다. 그런 난리법석으로 버스는 정지했다.

 

“나 원 참, 이것이 내 여권이오. 난, 불법 체류자가 아니란 말이오. 오히려 잃어버린 표를 찾아줄 생각은 하지 않고, 무조건 다짜고짜 내리라니 이게 세상인심이오? 정말 실망이오. 그리고, 이렇게 된 마당에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을 절도범으로 몰아서 경찰서에 갈 수도 있소.”

“무슨 소리를 하시오? 설사 당신의 말을 믿는다 해도 본인의 실수로 표를 잃어버린 걸 누구에게 행패를 부린단 말이요? 눈에 보이는 대로 난 처리할 수밖에 없오. 어서 내리시오. 당신은 어찌되었던 표가 없는 건 분명하고, 세상일이 당신의 뜻대로 풀리지만은 않는다는 걸 이번 기회에 깨닫도록 하시오.”

 

다들 누구 편도 들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때 일본인 옆자리에 앉았던 인도사람이 일어나 뭐라고 큰 소리로 말을 한다. 내용인 즉, 자신이 도둑으로 오인 받는 건 아무래도 불쾌하며, 외국 관광객들이 들어오면서, 인도 어디서나 점차 분위기가 나빠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상황은 더욱 복잡해지고 있었다. 이해 당사자가 두 명에서 세 명으로 늘어난 셈이었다. 그러자, 이스라엘 젊은이가 말을 낚아채듯이 끼어들며 소리쳤다.

 

“지금 뭐라 했오? 이런 일이 여행자들 탓이란 말이오? 무슨 말 같지 않은….”

 

그때, 독일인 남자가 침착하게 일어서 모두를 둘러보며 말을 시작했다.

 

“문제는 일본분의 말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있지 않소. 어느 쪽도 증명할 수 없으니 말이오. 만일, 버스 출발 전에 버스표 검사를 했다면 이런 일은 처음부터 없었을 것이오. 그러니, 더욱도 더 이상 그것을 따질 수 없을 것이오. 문제는, 잃어버린 버스표값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인 것 같오. 일단 출발한 후에 이 버스는 승객과 승객의 물품의 안전에 대한 책임이 있을 것이오. 그러니, 일본분과 반반씩 책임지고, 대신 일본분은 승객들을 도둑으로 몬 것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를 하시오. 아니면, 언제까지나 이렇게 버스를 세워둘 작정이오?” 

 

한 둘 박수소리로 시작하여, 점점 호응하는 박수소리는 커져갔다. 정말, 통쾌한 명재판이었다. 라다크 사람들도 웅성거리며 그의 말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의 주름을 폈다. 결국 반반씩 버스표 값을 내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는데 지켜만 보고 있던 버스운전사가 “됐으니 그만하지!”하는 제스처 덕분이었다. 

 

작은 용기

 

점심나절이 되어 피곤하고 지친 표정들이다. 버스가 덜컹하더니 이어 쿵하는 둔탁한 소리! 버스가 멈추고 문이 열린다. 누군가 후다닥 뛰쳐나간다. 무슨 일일까? 창 밖으로 고개를 내민 사람들, 그리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무심히 팔짱끼고 앉아 있는 사람들. 버스 위에 실려 있던 배낭 중 하나가 떨어진 것이다. 급히 뛰쳐나간 것은 배낭주인이었고, 무슨 일이야? 걱정반, 호기심 반 창 밖으로 고개를 내민 사람들은 그 친구들과 외국인 여행자들, 마냥 대수롭지 않은 듯 앉아 있는 사람들은 인도인과 라다크 사람들이다.

 

버스 위에 배낭을 실을 때 10루피 내지 15루피를 추가로 더 지불해야 하는데 인도인이나 라다크 사람들은 대부분 짐을 안고 탄다. 이들은 이런 히말라야를 지나는 버스에서 느슨하게 묶은 배낭이 떨어지기 쉽다는 것쯤은 이미 도통한 듯 알고 있는 눈치였다. 배낭을 되찾아 매고 들어온 이스라엘 젊은이는 기분이 몹시 상한 듯 표정이 구겨져 있었다. 잠시 후 MP3에 휴대용 스피커를 연결하여 세 명이 함께 빠른 랩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소음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뭐라 말하지 못하고 멀뚱히 바라만 본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나서보기로 했다.

 

“이보세요… 저, 음악, 이어폰으로 들을 수 없을까요?”

“%$$%&…….”

“부탁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소리를 줄이는 걸로 잘못 이해했나보다. 볼륨을 낮추는 시늉만 한다.

 

“그것이 아니구요. 이어폰으로 듣고, 스피커는 꺼주셨으면 해요.”

 

이그머니나! 저 눈빛! 그 때 호주여성이 끼어들었다.

 

“이 좁은 버스 안에서 여러 사람들이 함께 가야 하는데요…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는 어느 정도 제한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제서 스티커를 거둬들였다. 다시 평온하게 버스가 달린다. 나른한 졸음으로 눈꺼풀이 무거워져온다. 어느 틈엔가 잠이 들었을 것이다.

 

저무는 히말라야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자, 히말라야의 볼이 빨갛게 부풀어 오른다. 가을녘 붉은 단풍처럼 풍만하게 농익을 대로 익은 자연의 완숙한 아름다움을 연상케 한다. 황량한 히말라야도 이 때만큼은 거의 완벽한 색채미를 자랑한다.

 

땅거미마저 휘청이는 버스 창 밖으로 멀리멀리 히말라야 속살에 그어진 선 위로 까뭇까뭇 버스들과 짚차 대형트럭들이 작은 점들 같다. 마치 질긴 껌 딱지가 히말라야에 딱 붙어 있는 거 같다.  하루 종일 통행하는 차량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밤 그늘 지는 어둔 히말라야가 잠들 새가 없다. 둔탁한 트럭들의 굉음도 익숙해지고, 관광버스, 짚과 택시들이 끝도 없이 오르내리고 있다. 세계의 지붕이라는 히말라야도 더 이상 오지랄 수 없는 아주 바쁜 길이 되어버렸다. 비록 아직은 흙길일지언정 길이 동맥처럼 히말라야 구석구석을 누비며 뻗쳐 있다.

 

길도 생명이 있는 것 같다. 누군가가 첫 걸음을 내딛던 순간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세월에 따라 길을 끼고 사는 사람들이 변하고 마을이 변함에 따라 길 역시도 그 모습이 바뀌어간다. 그래서 길도 긴 한살이를 하고 역사를 갖는다. 길도 길들여지는지 자주 다니던 샛길은 그래서 정답다. 세월이 한참 지난 다음 우연히 찾았을 때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맞이해 주는 길은 그래서 고맙다.

 

변하는 것이 어찌 늘 좋으랴. 이 길도 한 때는 산짐승이나 걸어서 산을 넘던 짐꾼들, 목동들만 지나는 것을 허용했으리라. 먼 훗날 히말라야를 다시 찾을 때 이곳은 또 어떻게 변해있을까? 변하지 않은 것은 없으니. 그 때쯤 되면 해가 져도 가로등 불빛 하나 없고, 모랫바람만 더욱 세차게 풀풀 날리는 휑하니 황량하던 이 길을 그리워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킬롱에 도착

 

킬롱에 도착했다. 지난 번엔 이곳에서 얼마나 추운 불면의 밤을 보냈던가. 그 때 버스에서 긴 밤을 함께 보냈던 동행자들은 지금 어디를 여행하고 있을까?

 

도착하자마자 바로 창고형 숙소? (문없는 도미토리를 상상하시라)로 직행, 쉽게 잠자리를 50루피에 빌릴 수 있었다. 그런데 이불에서 정체불명의 고약한 냄새가 났다. 코를 감싸쥐며 냄새가 장난이 아니라고 했더니, 아저씨가 살짝 이리와 보라며 옆 칸으로 데려가 벽면 쪽 구석의 침대를 쓰라고 했다. 새 커버에다 뽀송뽀송하고 깨끗한 이불이 깔려 있었다. 아! 고마워라.

 

 

저녁끼니를 때우기 위해 약간의 밥과 짜파티와 달을 시켰다. 먹는 동안 아저씨는 삶은 감자의 껍질을 벗기고 계셨다. 나는 주부이기 때문에 이런 것쯤 솜씨 좋게 잘 한다고 했더니, 웃으며 그럼 한번 까보란다. 이제 아예 아저씨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야기가 오고 갔다. 이런 분위기가 너무 좋다. 푹 삶아진 감자는 껍질 입술이 두툼히 벌어져 있어 식은 죽 먹기. 아저씨는 짜이를 한 잔 주시고, 감자를 권하며 먹어보란다. 약간의 노란빛 도는 앙증맞은 감자알이 한 입에 쏙 들어가 부드럽게 씹히고 맛도 고소했다. 하나 둘 신나게 먹었더니, 더 먹어보란다. 그런다고 눈치 없이 넙죽넙죽 받아먹다간 아저씨 장사 다 망칠 거 같아, 이러면 장사 어떻게 하실 거냐고 했더니 웃으시며 괜찮다고 하신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또 하나의 감자가 입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여행 중에는 늘 감동을 받는다. 지나는 길손에게조차 인정을 베풀어주는 이들 삶의 모습에 늘 감동한다. 그런데, 감동인 채로 끝나면 오죽이나 좋으랴. 경우에 맞는 처세를 견지하면서, 사람들과 적당한 간격을 그어놓고 그 너머로만 주고받는 것을 안전하게 여겨온 그동안의 얄팍한 내 자신을 떠올려야 하다니. 여행날짜가 하루 이틀 늘어남에 따라 그런 삶의 계산법이 점차 귀찮게 느껴진다.

 

오가는 나그네를 하루 밤을 재워주는 이곳에도 깊은 밤이 찾아왔다. 대부분의 침대가 여행자들로 점령되고 불이 꺼지고 주위가 조용해지면서 다들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태그:#인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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