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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하와 저는 1년 365일 가운데 100여 일을 집 밖에서 잡니다. 한 달에 평균 일주일에서 열 흘 정도 집을 비웁니다. 양가 모두 첫번째 손녀인 쿠하가 태어난 뒤로 집안 행사가 있을 때마다 적게는 3-4일, 많게는 7-10일씩 시댁이나 친정에 머무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2008 설 연휴는 지난 주 금요일(1월 22일)부터 일찌감치 시작됐습니다. 집이 있는 춘천에서 서울에 있는 친정집에 들러 일주일을 보내고, 어제 시댁이 있는 광주로 내려왔습니다. 어제부터 공식적인 설 연휴가 끝나는 다음주 일요일까지 이곳에서 보내게 됩니다.

 

이동거리도 만만치 않습니다. 춘천 소양강 처녀상 앞에서부터 친정집까지 약 100킬로미터. 친정에서 시댁까지 약 300킬로미터, 게다가 연휴 중에 다녀오는 전라도 고흥 할머니댁까지 광주에서 약 130킬로미터니까, 다시 집이 있는 춘천까지 도착하는 데는 무려 1000킬로미터가 넘는 셈입니다. 왕복 1000킬로미터를 이동해야 하니 1년에 두 번씩 '명절 국토종단'을 하는 기분입니다. 

 

남편과 같이 움직이지 않고 아이를 데리고 저 혼자 다니니까 가급적 아기 옷짐과 기저귀 등은 며칠 전에 택배로 미리 부쳐둡니다. 다닐 때는 배낭 하나 메고 꼭 필요한 것만 들고 다니는 게 습관이 됐습니다. 옆에서 보면 아기와 둘이 여행가는 한가로운 엄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저는 유난스레 손녀를 찾는 양쪽 할머니 할아버지를 위해 보름짜리 명절을 쇠러 가는 길입니다.

 

결혼 전, 제사나 차례를 지내지 않는 친정에서는 배워둔 명절 음식이 없어 시댁에서는 조금 어이없어 하셨지요. 나이 서른이 꽉 차도록 상에 올릴 생선 한 마리 구울 줄 모르는 무능한 며느리를 보신 시어머니는 기름장 양념까지 다 만들어주시면서 "그럼 앉아서 굽기만 해라"하고 제일 쉬운 일을 맡기셨습니다.

 

갈치나 삼치를 구울 때는 먹기 좋은 정도로 금세 구워내면 됐지만, 차례상에 올릴 생선들은 '치'자 들어가는 얇은 생선이 아니라 살이 두툼하게 오른 병어 덕자(시어머니는 큰 병어를 덕자라고 부르더군요)나 민어, 조기 등 큰 생선을 굽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껍질은 시커멓게 타고, 속은 잘 익지 않아 꼼짝없이 두 시간을 오븐 앞에 쭈그리고 앉아 들췄다 엎었다 난리법석을 떨어야 했지요.

 

제가 몇 년째 생선과 씨름하고 있을 동안 남편은 K-1이나 프라이드를 보거나 컴퓨터에서 다운 받은 미국드라마를 연속 몇 편씩 보면서 한가로운 휴가를 즐기곤 합니다. 평소 춘천 집에서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4층에서 음식쓰레기와 재활용 쓰레기를 군말없이 다 버려주는 좋은 남편이고, 친정에 가면 인터넷으로 본 파인애플 볶음밥이나 양파 연꽃 튀김 같은 특별식도 만들어주는 가정적인 큰사위로 칭찬 받는 사람입니다. 헌데 전라도 땅에만 입성하면 여지없이 왕자병이 도져서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사정없이 누립니다. 광주에서는 숟가락 하나 놓는 것을 볼 수가 없으니까요.

 

그런 남편을 처음에는 차마 두고 볼 수가 없어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잠깐 산책을 하자고 꼬셔내 막 따졌습니다. 2박 3일씩 밥하고 설거지만 하는 게 안쓰럽지도 않느냐고요. 남편의 핑계는 참 간단하고 명확합니다. 아버지는 물도 안 떠 마시고 옆에서 다 해주시는 분이라, 자기가 부엌에 가는 게 어른들 눈에 좋게 보일 리가 없다나요. 

 

종종 친정아버지가 온 가족이 있는데도 맛있게 먹었다며 설거지는 당신이 하시겠다고 굳이 나서서 하시는 친정집 분위기와 180도로 다른 시댁에서, 저와 남편은 며칠이니까 그냥 시댁 분위기대로 따르되 다른 곳에서는 평소대로 잘 도와주기로 약속하고 협상을 끝냈습니다.

 

어쩌다 남편이 회사 일로 제사에 못 내려오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면 저는 출장비를 청구합니다.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제사를 지내러 아이랑 단 둘이 400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달려와 일주일씩 쿠하 재롱과 함께 장손 며느리 노릇하고 가는데 아무런 선물이나 보상이 없으면 저도 기운 빠져서 억지로 하게 되니까 하루에 7만원씩 계산해서 제사 당일과 전후일, 3일치를 달라고 합니다.

 

부부사이엔 그 돈이 그 돈이지만 그래도 보너스 받는 기분이라 20만 원 정도를 요구합니다. 그 돈은 결국 쿠하 그림책을 사주거나 문화센터 수강료로 쓰지만 말입니다. 이런 저를 두고 친정어머니는 너무 계산적으로 그러면 정 떨어지니까 적당히 하라고 하시지만, 구체적인 감사 표시가 있어야 일할 맛이 나는 게 인지상정이니까요.

 

명절 전 일주일을 친정에서 보내는 것은 꽉 막힌 도로를 뚫고 서울과 광주를 왔다갔다 하는 것은 너무 피곤하기 때문입니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서울, 광주, 고흥을 다 다녀오기 어려우니까 서울에 미리 가서 사돈 댁에 보낼 명절 선물 고민하는 친정어머니께 얇은 봉투지만 명절비를 먼저 드리고 내려옵니다. 명절이 끝난 후에 가도 되지만, 기왕이면 명절 전에 가서 뵙고 오는 게 마음이 더 좋습니다.

 

홈그라운드에 '생 까는' 남편 때문에 장손 며느리들인 시어머니와 저는 좀 고단합니다. 큰 상이 차고 넘치게 차려내는데 음식 준비는 거의 어머니가 도맡아 하십니다. 나물이나 식혜 같이 손품이 많이 가는 음식을 저한테 맡기시지도 않지만 맡기신다 해도 저는 아직 멀었지요.

 

분주하게 움직이는 어머니께 저는 '브레이크 타임'을 제안하곤 합니다. 음식 준비가 다 끝난 저녁에는 온 가족이 찜질방에 가자고 하고, 연휴 마지막 날에는 가까운 근교로 매화 바람을 쐬러 가자고 조릅니다. 그런 며느리가 철없어 보이시겠지만, 철없는 며느리 덕에 연휴 내내 부엌에서 기름 냄새에 찌든 몸을 쉬게 하고 가족들과 산책을 할 수도 있어 이제는 어머니가 먼저 가자고 하실 때도 있습니다. 한번은 상에 올릴 생선 장을 본다는 핑계 삼아 멀리 장흥 바닷가까지 간 적도 있으니까요.   

 

제가 부엌일에 스트레스 받을 때, 남편은 조카들, 어린 사촌동생들 세뱃돈과 양가에 드릴 명절비 때문에 고민합니다. 두둑하게 드리고 싶지만 빤한 월급으로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올해는 둘째가 태어날 예정이라 지난해보다 명절비도 조금 덜 넣고, 세뱃돈도 색깔을 바꿔야 합니다.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성의 표시만 하자고 마음 먹지만, 그래도 선뜻 내밀기 민망한 얇은 봉투가 죄송스럽기만 합니다. 

 

바깥 일을 하지 않는 '백수 아낙'인 관계로 저는 양가 어른들께 두툼한 봉투 대신 '쿠하 보여드리기'로 때우고 있습니다. 사촌 형님들이 어떻게 하시든 다른 사람은 신경쓰지 않고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것만, 지금처럼 제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할 생각입니다. 열흘도 넘게 남편이 저와 아이 얼굴을 못보고 외롭게 혼자 자겠지만, 쿠하와 저의 '보름짜리 명절 휴가'가 쿠하를 포함한 양가 전체 가족 11명이 모두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덧붙이는 글 | ‘<명절, 남편들도 두렵다구요> 응모글'


태그:#명절증후군, #쿠하, #명절, #설날, #세뱃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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