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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읽었던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라는 책이 떠 오른다. 그 책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해방 직후에 신생 독립국의 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한 운동이 문화예술분야에서도 거센 바람을 불러 일으키는데 단연코 주제는 민족저항 정신을 이어서 진정한 해방독립을 이루자는 것이었다고 한다.

 

일제 식민치하에서 신음하던 인민들이 친일 악질 지주에 저항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연극을 만들어 순회공연을 하게 된 저자(백기완 선생)는 어느날 무대 위에서 관중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다.

 

친일지주 역을 맡았는데 어찌나 연기가 실제상황과 같았던지 공연에 몰입된 관객들의 완전독립국에 대한 열의가 무대를 점거하고 지주역의 배우를 때려 버리는 불상사를 일으킨 것이다. 백기완 선생은 그때 얻어 맞던 순간을 흐뭇하게 회상한다.

 

말이 독립이고 해방이지 여전히 부일세력들이 준동하고 미국 군사정부가 이들을 발탁하여 군정청 고위 간부로 등용하는 등 새로운 식민지배자로 군림하는 현실에 대한 저항의식이 이렇게 분출된 것이리라.

 

요리책 얘기 한다면서 웬 저항운동? 할지 모르나 내가 이 책을 떠올린 것은 잘된 연극이란 바로 위와 같은 것이라고 할 때, 잘 만들어진 책이란 여기에 비유할 수 있겠다 싶어서이다.

 

사실 나는 요리 이야기를 하기에는 턱 없이 부족하다. 요리의 달인, 부엌의 마술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잘 알고 있다. 당장 내 주변에도 우리 집에 와서 음식 솜씨를 발휘해 주신 분들이 있다. 그 분들의 손끝을 보면 마냥 신비스러울 뿐이었다.

 

그런 내가 이 요리책을 읽으면서 바로 부엌으로 달려 갔으며 그때 그때 책에 연필로 표시도 하고 책장을 접어 놓기도 한 것은 물론 이 책을 만든 곳에 연락을 하여 책을 두 권 더 신청하였다. 한 권은 이미 선물을 하였다.

 

뿐만 아니다. 이 책을 만든 단체가 어찌나 고맙던지 바로 회원으로 가입하여 매월 1만원씩 회비를 내기로 했다. 이 정도의 책이라면 궁금하지 않은가?

 

시중에 범람하는 요리책들은 말 그대로 요리, 또는 조리책이다. 자연상태의 음식을 안타까울 정도로 비틀고 조이고 으깨고 한다. 음식 본래의 가치와 의미를 양념으로 왜곡시켜 몸과 혓바닥을 끊임없이 타락시킨다는 게 내 평소 지론이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깨닫게 되었는데 요리와 부엌 살림은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구하는 첫 관문이다. 기존의 요리책들은 이런 판단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요리책이라고만 할 수 없다. 음식에 대한 철학서이다. 음식과 생명이 어떻게 직결되는지 말하고 있다. 부엌에서의 내 요리 행위가 내 식탁만 가꾸는 일에 그칠 수 없고 그것이 왜 필연적으로 사회적 행위인가를 역설한다. 생태자연환경에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부엌 밖 세상도 같이 볼 수 있게 해 주는 책이다.

 

이렇게 애기하면 무슨 생태주의자의 먹을거리 교양서이려니 할지 모른다. 그렇지 않다. 아주 충실한 요리책이다.

 

우선 흑백으로 된 유일한 요리책이라 여겨진다. 나는 총천연색으로 된 요리책들을 보면서 눈을 현혹한다고 여겨 왔었다. 음식 고유의 깊은 맛을 화려한 천연색이 빼앗아 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 책은 흑백으로 되어 있음으로 해서 도리어 독자가 음식 본래의 맛에 바싹 다가가게 만들고 있다고 여겨진다.

 

더구나 요리책을 재생용지로 만들었다고 하면 이건 책 안 팔아 먹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생명의 밥상을 차리기 위한 요리책이라면 이래야 한다고 본다. 내 밥상이 세상을 더럽히는 일을 한다면 어찌 그 밥을 먹고 하루를 사는 내가 나를 살리고 이웃을 살리겠는가 말이다.

 

중요한 또 하나는 편집이 단순하여 시선을 강제로 잡아 끌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즘은 인문과학서를 제외하고는 여백의 강화, 천연색 사진의 과잉, 표지의 과대포장 등 읽는 책이라기 보다 보는 책에 더 치중하는데 요리 책들은 더 심하다.

 

사진이 큼직하게 자리를 차지하게 하고 요란하게 편집하면 음식 만드는 과정과 그 속의 섬세한 손끝 감촉은 다 숨어 버리고 없다. 눈부신 천연색 사진들로 군침만 흐르게 하고 내 손끝이 생명의 밥상을 창조하는 일에 역사하게 하지는 못한다.

 

이 책은 제일 먼저 밥을 최고의 요리로 추천하고 있다. 그러니 '밥상' 아니냐고 하면서. 이유는 간단하다. 가공 과정이 단순하다는 것이다. 가공 과정이 복잡하면 이미 음식으로서의 생명가치에서 점점 멀어진다고 보면 된다. '헬렌니어링'이 지은 요리 책에도 그런 게 강조되어 있다. 오죽하면 '헬렌니어링'은 '요리하지 않는 요리'를 가장 잘 된 요리라고 극찬 했을까.

 

이 책은 그 다음 순서로 국과 찌개, 새참거리, 반찬, 양념 순으로 정리되어 있다. 각 단원마다 음식에 대한 짧은 단상들을 넣어서 우리가 왜 먹는지, 뭘 먹어야 하는지를 일깨우고 있다. 누가 만든 책일까? 두 사람의 채식요리 전문가이자 채식운동가가 눈에 띈다. 어린이 새참 전문가, 음식 전문비평가, 아름다운 문장가 등이 함께 만든 책이다.

 

이 책은 '녹색연합'에서 만들었다. 제목은 <소박한 밥상 환경을 살리는 음식>이고 '교보생명교육문화재단'에서 후원했다. 녹색연합에 가입하여 회비를 내고 활동까지 한다면 당신 밥상의 생명력은 훨씬 커질 것이다. 왜냐면 지구가 더 푸르러지고 공기와 물이 깨끗해질테니까 그렇다.

 

책에 대한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것 저것 잘라내고 벗겨내고 하지 말고 통째로 먹는 것(전체식), 굽거나 튀기거나 하지 말고 찌는 음식 위주로 할 것, 식용유를 쓰지 말 것, 감사 기도를 깊은 마음으로 하고 먹을 것 등을 좀 풀어넣어 주었으면 하는 점이다.


태그:#요리, #전희식, #목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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