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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임시 당 대회가 열린 3일 오후 센트럴시티 밀레니엄홀. 엘리베이터 입구에서부터 이미 분위기는 이날 나올 결과를 암시해 주고 있었다. 최기영 이정훈 제명을 반대한다는 큼직한 유인물이 양 옆으로 펼쳐져 있었고, 가족들의 호소어린 외침이 울려 퍼지는 중이었다.

 

참석하는 대의원들에게 제명을 막아달라고 외치는 일심회 가족들의 호소에 복도를 가득 메운 당원들은 큰 박수로 호응하고 있었다. 

 

로비에서 만난 한 청년 대의원은 이날 결과를 낙관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미 끝난 게임 아닐까요. (비대위 혁신안을)다수가 반대하는 분위기인데…….”

 

다수가 반대하는 안건이기에 결과는 낙관적

 

일심회 가족들의 호소가 끝나며 잠시 잠잠해지나 싶더니 곧이어 한쪽 편에서 탈당하는 당원들이 나타나 플래카드를 펼쳐들고 기자회견문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맞은편에는 최기영 이정훈 제명을 반대하는 학생당원들이 피켓을 든 채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입장이 다른 양쪽이 마주보고 서 있게 되면서, 의도하지 않게 서로가 대치하는 모양새가 되고 있었다.

 

 

탈당자들을 대표해 이민기씨가 탈당의 변을 읽어 내려가자 잠시 뒤 맞은편에서 거센 고함이 터져 나왔다.

 

“나갈려면 빨리 나가!” “부끄러운줄 알아!”  “해당행위 하지마!"

 

이에 질세라 탈당자쪽도 거칠게 응수했다.

 

“뭐가 부끄러운데!” “어디다 대고 반말이야!” 뭐가 해당 행위야!“

 

양쪽이 몸싸움 일보직전까지 간 상황에서 이를 말린 것은 앞에서 노조의 재정을 벌이고 있던 기륭전자 분회 노조원 아주머니였다.

 

“그런다고 떠나시면 어떻해요… 어떻게든 잡아야지… 당을 지켜야 할 것 아니요.”

 

양쪽에 대고 한마디씩 하던 아주머니의 표정에는 안타까움이 잔뜩 배어 있었다. 서로서로 힘합쳐 잘 헤쳐나가야 하는데 갈등하는 모습이 답답한 듯 했다.

 

 

공안검사의 말을 믿겠는가? 동지의 결백 주장을 믿겠는가?

 

심상정 비대위의 혁신안이 논란이 된 이날 당 대회는 민주노동당이 갖는 현실의식을 분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었다.

 

우선 논란이 됐던 최기영 이정훈 당원의 제명 건에 대해 대립되던 두 가지 시각은 비대위 정종권 집행위원장에게 질문한 한 대의원에 말에 압축돼 나타났다.

 

“국가보안법으로 동지를 기소한 검사의 말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억울하다는 동지의 결백주장을 믿을 것이냐?”

 

비대위를 찬성하는 쪽은 드러난 사실을 근거로 말하고 있었지만, 비대위안에 반대하는 쪽은 결백하다는 최기영씨의 호소에 더 믿음을 두고 있었다. 비대위가 관련 자료를 공개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 사건이기에 그것만으로는 믿을 수 없으며, 당사자들이 부인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공판에서 시인한 부분도 있으며 그 공판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전한 내용”이라는 설명에도 “그렇게 말한 사람이 누구며, 지금 당장 관련 자료를 공개할 수 있냐”는 질문에는 비대위 보다는 결백을 주장하는 당사자들의 주장에 신뢰를 보내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다수파 대의원들의 이런 분위기는 대선에 대한 현실인식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났다.

 

결론적으로 '지난 대선의 득표율 저조는 외부적 요인이 컸을 뿐 민주노동당 내부적으로는 큰 잘못이 없는, 다소 실망스럽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해서 얻어낸 최선의 결과물이라는 평가'가 이날 대의원 대회가 내린 결론이었다.

 

지난 대선은 '참패' 아닌 '실망스런 결과'일 뿐

 

당초 비대위는 혁신안에서 대선 패배의 원인과 의미를 설명하며, '17대 대선 결과는 분명한 참패'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수정동의안은 이를 ‘17대 대선은 실망스러운 결과’로 바꾸며 참패임을 부인했고, 또한 '대선패배가 그동안 누적된 당 활동의 결과'라는 반성도 완전히 부정했다.

 

경제가 침체되는 등 대외적인 여건이 어려웠고, 문국현의 등장과 노무현 정권의 실정이 결국 민주노동당에게 마저 영향을 미치는 등 외부요인이 많은 문제였을 뿐이지 비대위가 제기한 문제 중 5번 항목은 전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비대위 혁신안 '대선패배의 원인과 의미' 중 원안 삭제된 5번 항목

 

5) 대선 패배는 그동안 누적된 당 활동의 결과임

 

- 당은 국민들의 직접적 생존권과 경제적 요구에 대한 적극적 해결책을 보여주지 못하여 ‘무능력한 아마추어당’ ‘대안없는 진보정당’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형성되어 왔다.

 

- 이는 형식적인 지역위원회 활동, 진보적 실험과 전국적 관심을 촉발할 실천사업이 부재한 지방자치단체 운영, 정책에 치우친 의회 활동, 원내외의 통합적인 정치실천과 기획의 부재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 결국 당은 진보정당으로서 평등과 자주의 핵심 가치를 국민대중과 소통하지 못했다. 비정규 노동자를 중심에 둔 독자적 노동전략을 적극적으로 구사하지 못하고 민주노총에 과도하게 의존함으로서 정규직을 대변하는 정당으로 인식되었다. 평화와 통일을 위한 당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몇몇 편향적 친북행위에 대해 적극적 조치를 취하지 않음으로써 부정적 의미의 '친북정당'의 이미지가 형성되는 빌미가 되었다.

 

외부 사람들이 민주노동당을 특이하게 보는 부분 중의 하나는 어떤 결과물에 대해서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대선결과에 대해서도 이선후퇴를 한다거나 백의종군하겠다는 모습을 민주노동당에서는 보기가 힘들다. 도리어 어떤 책임을 묻는 사람들이 문제 있게 보이는 것이 민주노동당의 분위기다.

 

한 당원은 대선 3%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지난 서울시장선거 때 평등파도 3% 얻으면서 망쳐놨다. 그럼 그것부터 책임물어야 아니냐"고 되물었다. 

 

분당론이 나오고 혁신안이 나오는 과정에서도 어느 한 사람 “내게 책임이 있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경우가 드문 것도 민주노동당의 특징적인 분위기다. 원인에 대한 부분은 반성하지 않고 전개되는 상황에만 문제가 있다는 시각만이 보인다. 책임의식이 약하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은 이때문이다. 

 

대선 3%의 결과물을 내 놓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면죄부를 주는 것도 이런 인식에 기인한 것 같다. 그래서 비대위의 혁신안이 그리 쉽게 무력화 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해 보인다.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반대파의 딴지걸기 식으로 치부해 버리니, 적어도 외부에서 보기에는 책임은 간데없고 정파만 나부기는 꼴이다.

 

민주노동당의 위기 아닌 민중운동 전체의 위기

 

 

어찌됐든, 민주노동당 구성원들은 당의 최고 의사 결정기구인 당대회를 통해 지난 대선 결과는 크게 책임지고 반성해야 할 사안은 아니라는 판단을 내린 셈이 됐다. 

 

분명한 것은, 정치적 결정이나 선거를 통해 나타난 결과물에 대해 책임을 느끼는 사람이 없다는 점은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책임 정치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번 결정만큼은 그 결론을 내린 사람들이 끝까지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줘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결국 판단은 선거를 통해 국민들이 할 것이기 때문이다.

 

부산지역에서 왔다는 한 여성 대의원은 "당대회에서 제대로 반성이 없을 경우 탈당할 생각"이라며, 민주노동당의 위기상황에 대해 이렇게 진단했다.

 

"민주노동당의 문제는 단순히 당의 문제만이 아닌 우리나라 운동이나 민중투쟁과 연관이 있는 부분이다. 국가보안법은 사실상 힘을 상실한 법 인데도 사람들은 계속 얽매여 있고, 사법을 믿지 못하는 분위기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운동의 흐름에 맞게 민중들의 원하는 수준의 발을 맞추지 못하는 것 같다. 그리고 어떤 문제에 대해 막연하게 맞다 틀리다를 말하기보다는 정당이라면 제도적 장치를 가지고 대응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 상황은 당의 위기만이 아닌 민중운동 전체의 위기로 봐야 한다."


#민주노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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