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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3일) 내린 봄 눈. 부산 시민들은 얼마나 알까. 부산은 정말 자연의 혜택이 풍족한 도시다. 단 하나 아쉬운 곳은 겨울에 눈을 잘 볼 수 없다는 것. 영화 <왕과 나>에 나오는 열대지방 황실의 후예들에게 한 번도 눈을 보지 못한 눈을 설명하는 영국 교사의 안타까운 표정을 떠올릴 정도로, 이곳의 시민들과 아이들은 눈을 마음껏 구경할 기회가 적다. 
 
몇 년 전에 '백년의 폭설'이 쏟아졌지만, 해마다 펑펑 내리는 눈을, 보기 어려운 따뜻한 이 지방. 2월에 내리는 봄 눈은, 장산에다 부드러운 소금을 뿌리듯 잠시 내리고 아쉽게도 그쳤다.

 

 
'눈'에 대한 많은 고사일화 중 재미난 일화가 있다. '사안'이 눈 오는 날 조카들을 모아 놓고 문학을 강의했다. 점점 눈발은 커져 폭설로 변하자, 사안이 매우 경쾌한 얼굴로, "날리는 흰눈, 무엇과 같은가?" 하고 시를 읊었다. 
 
대뜸 그 조카 딸이 "공중에서 소금을 뿌리는 것과 같아라" 하고 대꾸하고 나서, 다시 "저 눈은 바람에 날리는 버들개지만 같지 못해라' 말했다. 사안은 이에 유쾌하게 웃었다. 그후 이 조카딸은 '돈오왕'의 처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해발 634m 장산 정상에만 살짝 내리고 가는 눈은 무엇과 같은가. 삶에 지친 이 퇴화된 눈에는 그저 따뜻한 새털  같다. 박목월 시인은 "2월에 내리는 봄눈은 친구와 걷기에 알맞다. 이야기에 열중하다 보면, 우산에 두툼하게 자기도 모르게 눈이 쌓인다. 무심결에 우산을 기우뚱하면 발 앞에 눈더미가 와르르 쏟아진다"고 <설중매>에 적고 있다. 이 눈은 장산에서 보는 내게는 첫눈이자, 마지막 내리는 봄눈. 그래서 장산에만 내리는 이 봄눈은, 왕후의 비유와 같이 소금처럼 귀한 눈이 아닐 수 없다.
 
 
'눈'은 옛부터 차디찬 얼음과 달리 풍요와 길상을 상징한다. 그러나 하늘의 얼음이 눈이고, 땅의 눈이 얼음이다. 우리나라 신화에서 '눈'은 해, 구름, 비, 이슬 등과 달리 우주론적인 의의가 취약하다. 눈은 우주 형성론상 어떠한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눈은 또 하늘의 신성함과 거룩함을 상징하기도 한다. '눈처럼 깨끗하게 살자', '눈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되자' 등 눈은, 순결과 순수와 동심의 대변이다. 눈은 사람의 마음을 순화시켜 순진무구한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게 한다.
 
 
'사각사각' 사과를 씹는 소리처럼, 눈을 밟으며 걷는 등산객들의 얼굴은 하얀 함박꽃 웃음이 절로 피어난다. 허나 눈길이 얼마나 위험한지, 이 지방에 사는 등산객들은 미처 아이젠을 준비해 오지 못해, 주르르 미끄러지고 넘어질 때마다 다시 한바탕 웃음꽃을 피운다. 봄눈이 내리니, 미끄러지고 넘어져도, '첫 눈 위에 넘어지면 일년 내내 재수가 좋다'는 위안에 그저 주르르 엉덩이 썰매 타면서 아이처럼 즐겁다.
 
"하늘나라의 봄은요,/ 벌써 왔나요 ?/송이 송이 흰꽃이 떨어집니다.//솔잎 위에 내려서/ 함박꽃 되고/ 마른 나무에 내려서/ 매화꽃 되고//하루종일 내려도/ 하얀 꽃송이/ 하늘 나라 꽃동산은/흰 꽃만 피나 ?//아니 아니, 이땅은/ 흰 옷 겨레라,/ 희고 흰 고운 꽃만 보내는 게지." - 서정봉 '눈'
 
 
우리나라 속신에 '첫눈을 손으로 받아 먹으면 눈이 밝아진다'고 한다. 흰색에서 밝음의 이미지가 연상되기 때문에, 또 '첫눈을 손으로 받아 씻으면 피부가 고와진다'고 한다. 이처럼 눈은 밝음과 희고 보드라움을 상징한다.

눈은 상서(祥瑞)를 상징하는 속담도 많다. 결혼 첫날밤에 눈이 오면 좋다, 그 해 첫눈을 먹으면 집에 뀡이 들어온다, 장사 지낼 때에 눈이 오면 좋다, 첫눈을 받아 먹으면 살찐다, 첫눈을 세 번 집어 먹으면 감기에 안 걸린다 등등 너무 많다.
 
 
민간에서는 겨울에 눈을 피해 내려오는 산 짐승을 잡지 않고 잘 먹여서 돌려보내는 풍속도 있다. 이는 눈 덮인 산에서 먹을 것이 없어 산신령이 내려 보냈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각사각 어린날 양철 지붕 위에 내리는 눈오는 소리는, 가만히 귀 세워 들으면 연필 깎는 소리였다.
 
하늘나라에서 천사들이 공부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마른나뭇가지에 하얀 눈꽃이 매달린 겨울 장산… 오랜만에 하얀 옷을 입은 '북극노인(중국에서 눈은 '북극노인', 즉 북두칠성과 관계가 있고, 눈은 장수와 풍요를 상징한다)'처럼 흰 수염을 날린다.
 
 
길은 미끄러운데, 발걸음은 새털보다 가볍다. 눈은 풍년을 상징한다는데, 이 눈은 그런 축복의 봄눈. '영원의 미소'처럼 눈송이들이 휘날리다 모자와 어깨에 내려 앉는다. "눈이 내린다, 무심히, (중략) 무식하게 무식하게" 봉준이가 울듯이 눈이 내린다는, 황동규 시인의 '삼남에만 내리는 눈'.
 
그 특별한 눈처럼, 아주 부드럽게 부드럽게 '장산'에서만 내리는 이 봄눈. "형제의 아버지가 남몰래 앓는 초가 그늘에 귀 기울여 할" 눈이라고, 바람은 그 귀한 소금의 눈을 다시 보기 좋게 흩날린다. 봄눈을 맞아 더욱 도톰해진 버들개지들과 앙상한 일만나무들, 일제히 기관총을 쏘듯이, 탕탕 꽃향기 날린다.
 

태그:#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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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곧 인간이다고 한다. 지식은 곧 마음이라고 한다. 인간의 모두는 이러한 마음에 따라 그 지성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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