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養(안양) 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지금 해야 합니다.” 2월2일 오전 11시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 안양 예술 공원내 ‘(주)유유산업 이전부지(이하 유유산업)’에서 안양지역 원로 역사학자 정덕한(65)씨를 만났다. 정씨는 안양 예술공원 내 ‘유유산업’에 매장되어 있는 유물을 발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양의 역사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 묻혀 있다는 것. 지난 1월24일 정씨는 안양시 의회에 유유산업 부지 매장 유물 발굴할 것을 청원했다. 정씨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60년이다. 60년 가을, 유유산업 신축당시 정씨는 시흥군(당시 안양지명) 청년학생단체 협의 회장 자격으로 시흥군에 공장 신축허가 취소를 요구 한 적이 있다. 국보급 유물이 두 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신라시대 유물인 중추사지 당간지주(보물4호)와 고려시대 유물인 삼층석탑(경기도 유형 문화재 122호)이다. 유물은 현재 유유산업 내에 전시되어 있다. 당시 시흥군수는 “한번 시행된 건축허가 취소는 불가능 하며 해체된 삼층석탑은 이전 복원하고 추후 공장 건축과정에서 출토되는 역사 유물들은 철저하게 수집 보존키로” 했었다. 유유산업이 들어선 후 에는 더 이상 유물 발굴을 요구 할 수 없었다. 합법적 절차를 거쳐서 지은 공장이었기 때문. 이번에 매장유물 발굴을 요구한 것은 유유산업 부지가 안양시 소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2007년6월 안양시는 (주) 유유산업 부지 및 건물을 240억원에 3년 분할 지급 조건으로 매입했다. 안양시는 이 부지에 있는 기존 건물만을 리모델링 하여 근대 건축가 김중업 박물관 등 복합 문화공간으로 활용할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 문제와 관련 정씨는 “안양 정체성 규명하는 데 중요한 매장유물을 발굴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전제되어 있는 것으로 보여 우려스럽다”고 밝혔다. 정씨는 유유산업 부지에 안양사7층 전탑 잔해가 묻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7층 전탑은 옛 안양사 역사와 실제 위치를 규명할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7층 전탑은 12각형 모양으로 지름이 약 10m 높이가 약 50m 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창건 시기는 고려 태조 때임이 분명하지만 현재까지 그 탑 자리는 찾지 못하고 있다. 지난 60년 유유산업 신축당시 출토된 기와나 벽돌 조각 중에 전탑에 쓰였을 것으로 예상되는 유물이 다수 나왔다. 정씨는 현재 중초사지 터인 유유산업 부지가 고려 태조 왕건이 창건했다는 ‘안양사(安陽寺) 터 라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그동안 많은 역사학자들이 제기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 사실을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가 바로 안양사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안양사 7층전탑이다. '7층 전탑' 은 안양 역사 밝히는데 중요한 유물
‘안양사’는 안양 정체성을 찾는데 중요한 역사적 유물이라고 강조했다. “안양사에는 고려건국 초기에 수천명 이상의 많은 승병(僧兵)이 거주 했을 것이다. 때문에 굉장히 큰 규모로 지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승군은 사찰을 본거지로 유지되는 지역 결사체로서 지역 주민 시주와 왕실 지원 아래 운영 되었다고 전한다. 안양지역 승군은 고려 건국초기 과정에서부터 고려 후기 최영 장군이 이성계와 마지막 저투를 벌인 ‘화원전투’에 까지 등장한다. 안양지역 승군은 고려 왕권을 지키는 유력한 군사력이었다. 건국당시에는 반 궁예 쿠데타 군으로 활동했다. 같은 백제 출신인 개성 왕건 세력과 함께 고려를 세워야 한다는 건국이념으로 함께 뭉쳤기 때문이다. 최충헌 무신 정권 때는 왕권 수호 전투를 벌였고 최영의 개성수호 전투 때는 이성계 군과 맞섰다. 최충헌 무신정권 때 왕권 수호 전투에서 패한 뒤 안양사는 무신정권에 의하여 철저하게 파괴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최충헌 아들 최이가 안양산 에 있는 침엽수를 개성에 있는 자기 집으로 옮기면서 여기에 동원된 연도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고 전한다. 그 후 최영 장군에 의해 다시 제 모습을 갖춘다. 옛 안양사는 왕건 집권 후 4년 전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씨는 왕건이 건국 과정에서 고려 건국에 뜻을 함께한 능정(能政)이란 스님 을 위해 ‘안양사’를 세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능정을 위해 중초사 터를 넓혀서 대규모 사찰과 칠층 전탑을 세우고 ‘안양사’라 절 이름을 고쳤을 것이라는 것. 능정은 왕건과 함께 안양사를 세운 스님으로 전해진다. ‘안양사’는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산 27, 28번지, 삼성산에 위치하고 있다. 정씨는 현재 안양사 위치로 볼 때 옛 안양사지는 유유산업 부지가 가장 유력하다고 말했다. 옛 '안양사' 승군 본거지 였기 때문에 큰 규모 였을 것
정씨는 安養(안양)의 본래 지명이 安陽(안양) 이라 생각한다. 기를 양(養) 이 아닌 볕 양(陽) 이라는 것. 안양사 창립 당시 볕 양자를 썼고 이후 천년 세월을 ‘安陽’으로 불리웠기 때문. 조선 말까지 지명이 안양(安陽)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안양(安陽) 이 안양(安養)으로 바뀐 것은 일제시대다. 일본인 토호 ‘오끼이’라는 사람이 최초 안양(安養)이란 지명을 사용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안양(安養)이라 표기되고 있다. 오끼이는 일제 강점기에 안양 땅을 많이 소유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본래 지명인 안(安)양(陽)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안(安)양(陽)을 300년 전에 사라진 만주어로 풀이 해 보면 ‘늘 나라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다’라는 뜻이다. 안이 ‘늘’ 이라는 뜻이고 양 이 제사 지낼 때 쓰는 불(관솔불)을 의미한다. 정씨는 백제를 세웠던 선조들을 기리며 제사를 지냈던 장소였기에 ‘안양’이라는 지명이 붙었을 것 이라고 말했다. 실례로 중국에 있는 ‘안양(安陽)’을 들었다. 은나라 조상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제사 지내던 곳이 바로 안양이다. 안양이라는 지명은 ‘제사터’를 의미하는 것이다. 정씨는 지난 60년부터 만주어를 공부해 왔다. 만주어는 고대 북아시아 기층언어고 훈민정음도 만주어에 기초해서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원로 역사학자 정덕한(65)씨와의 대화는 어릴 적 할아버지에게 옛날이야기 듣는 것처럼 흥미 있었다. 또,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으며 해박한 만주어 해설이 곁들여져 있어서 주장하는 바가 매우 설득력 있었다. 역사는 과거사가 아니라 현재를 보는 거울이다. 역사를 제대로 알고 바로 세우는 일은 현재 우리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반듯한 거울을 만드는 작업이다. 반듯하고 투명한 오늘 과 내일을 위해 역사 제대로 규명하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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