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내 유년의 설은 지독히 추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문고리에 손을 댈 때마다 쩍쩍 달라붙었다. 이른 아침 밥상 위의 젓가락도 손에 쩍쩍 달라붙었다. 처마 끝에는 굵은 고드름이 늘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겨울 한낮, 한줌 햇살 속에 웅크리고 앉아 그 고드름을 아삭아삭 깨물어 먹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그럼에도 그 지독한 겨울이 좋았다. 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설이 되면 늘 눈 내리는 소리만 사각사각 들리던 절간 같은 시골마을이 오랜 겨울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켰다. 동네 아낙들은 손을 호호 불어가며 집안 묵은 먼지를 털어냈다. 또 차례상에 쓰일 유기를 꺼내 닦는 일도 아낙들의 몫이었다. 부엌 바닥에 퍼질러 앉아 마른 짚에 재를 묻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박박 문질러 닦아야 했으니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남정네들은 눈 치우는 일이 우선이었다. 반나절 꼬박 눈을 치우고 나서야 겨우내 숨어 있던 길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뒤란에 켜켜이 쌓아놓은 장작을 부엌으로 옮기고 광에서 맷돌이며 절구를 꺼내 깨끗이 닦던 일도 다 남정네 몫이었다.

그때쯤. 어린 나는 할머니가 떠 주신 털모자에 털목도리, 그리고 벙어리장갑으로 중무장을 하고 시골동네 구석구석을 할 일없이 돌아다녔다. 한 집 건너 한 집이 다 친척집이었다. 앞집 작은 할머니네는 두부를 얼마나 만들고. 뒷집 작은 할머니네는 쌀강정, 콩강정에 깨강정까지 만들고, 건너 작은 할머니네는 식혜에 묵을 쑨다는 정보를 입수해 우리도 두부에 강정에 묵을 쑤자며 할머니를 졸라댔었다. 

어린 나의 강짜가 아니더라도 할머니는 언제나 설이면 두부에 강정에 묵에 식혜까지 푸짐한 먹을거리를 마련하셨다. 어찌나 푸짐했는지 이른 봄까지 그 먹을거리들이 어린 나의 요긴한 군입거리가 되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랬던 것 같다. 37~38년 전이니 지지리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쌀밥에 고기반찬이면 세상 부러울 것 없던 시절이니 명절에라도 푸짐한 먹을거리를 마련해 평소의 허기를 달래려 했음은 아닐까 싶다.

어쨌든 설이 다가오면 할머니는 설음식 준비를 서두르셨는데 그 첫 번째가 조청을 쑤는 일이었다. 조청은 일종의 물엿이다. 쌀이나 수수, 좁쌀 옥수수 등으로 고슬고슬하게 밥을 지어 뜨거울 때 엿기름을 붓고 7~8시간 삭히고 나면 밥알이 동동 떠오르고 이것을 베자루에 퍼 담아 짜면 뽀얀 액이 나온다. 뽀얀 액을 솥에 퍼담아 눌지 않게 저으면서 곤다. 이것이 곧 조청으로, 엿이 되기 전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할머니는 이 조청으로 강정을 만드셨다. 쌀강정, 콩강정, 깨강정 종류별로 만드셨다. 떡이나 떡가래도 이 조청에 찍어먹었다. 또 설이 한참이나 지난 후에도 딱딱해진 떡가래를 화롯불에 노릇노릇하게 구워 이 조청에 찍어 주시던 기억이 난다.

큰아버지는 설이 다가오면 광에서 맷돌을 꺼내 깨끗이 닦으셨다.
 큰아버지는 설이 다가오면 광에서 맷돌을 꺼내 깨끗이 닦으셨다.
ⓒ 김정혜

관련사진보기


노란 콩이 맷돌 구멍으로 들어가 하얀 콩물이 되어 맷돌을 타고 흘러 내리는게 어렸을적 그때는 참 신기했다.
 노란 콩이 맷돌 구멍으로 들어가 하얀 콩물이 되어 맷돌을 타고 흘러 내리는게 어렸을적 그때는 참 신기했다.
ⓒ 김정혜

관련사진보기


조청 만들기가 끝나고 나면 할머니는 두부를 만드셨다. 그 양을 가늠할 순 없지만 하여간 무진장 큰 함지박 가득 콩을 불리셨다. 그리고 큰어머니와 마주 앉아 교대로 콩을 맷돌 구멍에 떠 넣으시며 맷돌을 돌리셨다. 노란 콩이 맷돌 구멍으로 들어가 하얀 콩물이 되어 맷돌을 타고 흘러내리는 모습이 하도 신기해 나도 한 번 해보고 싶다며 두부를 만들 때마다 떼를 쓴 기억이 난다.

예전 큰어머니는 한 쪽 다리를 부뚜막에 걸치시고 큰 나무주걱으로 가마솥 안을 팔이 아프게 저으셨다.
 예전 큰어머니는 한 쪽 다리를 부뚜막에 걸치시고 큰 나무주걱으로 가마솥 안을 팔이 아프게 저으셨다.
ⓒ 김정혜

관련사진보기


갈아진 콩물이 큰 무쇠 솥에 부어지면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일은 큰아버지 몫이었다. 큰어머니는 부뚜막에 한쪽 다리를 걸친 채 큰나무 주걱으로 팔이 아프게 저으셨다. 가마솥 아래쪽이 눌러 붙지 않게 하기 위함이며 콩물이 끓어 넘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가마솥을 사이에 두고 함께 두부를 만들면서도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는 가타부타 말씀 한마디 없으셨다. 그럼에도 불이 세면 중불로 줄이고 콩물이 끓어 넘칠라치면 큰아버지는 약하게 불 조정을 하셨다. 얼핏 그 장면을 떠올려보니 부부일심동체라 두부 만드는 것도 굳이 말이 필요 없었던 듯싶어 웃음이 난다.

예전 그때. 할머니는 누런 광목주머니를 쓰셨는데...
 예전 그때. 할머니는 누런 광목주머니를 쓰셨는데...
ⓒ 김정혜

관련사진보기



짜고 또 짜고... 어린 마음에 할머니의 손이 뜨거운 콩물에 데일까 발을 동동 굴렀다.
 짜고 또 짜고... 어린 마음에 할머니의 손이 뜨거운 콩물에 데일까 발을 동동 굴렀다.
ⓒ 김정혜

관련사진보기



콩물이 부글부글 끓으면 안방에 계시던 할머니께서 누런 광목주머니를 들고 나오셨다. 함지박에 받침대를 걸쳐 놓고 광목주머니 안으로 끓은 콩물을 쏟아 부었다. 받침대 위에 콩물이 가득 든 광목주머니를 올려놓고 할머니는 있는 힘을 다해 짜고 또 짜셨다. 곁에서 지켜보던 어린 나는 뜨거운 콩물에 행여 할머니의 손이 데일까 발을 동동 구르곤 했다. 광목주머니 안의 콩물이 비지가 되어감에 따라 함지박엔 맑디맑은 액체가 줄줄줄 흘러 내렸다.

끓인 콩물을 고운 체로 다시 한 번 더 걸러낸다.
 끓인 콩물을 고운 체로 다시 한 번 더 걸러낸다.
ⓒ 김정혜

관련사진보기



콩물이 몽글몽글하게 변하고 있다. 간수를 만나 응고가 되는 과정이다.
 콩물이 몽글몽글하게 변하고 있다. 간수를 만나 응고가 되는 과정이다.
ⓒ 김정혜

관련사진보기


맑디맑은 그 액체를 할머니는 다시 가마솥에 넣고 끓이셨다. 그리곤 고운체로 다시 한 번 걸러 내셨다. 우유 빛의 맑디맑은 콩물에 간수를 휘휘 둘러 넣고 할머니는 조심스레 젓기 시작하셨다. 참 희한했다. 얼마나 저었을까. 콩물이 몽글몽글해지기 시작했다. 맑은 콩물이 간수를 만나 서서히 응고가 되는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가장자리까지 골고루 저어주니 함지박 가득했던 콩물이 몽글몽글한 순두부로 변했다.

몽글몽글한 순두부를 베보자기에 싸서 잘 여미고 무거운 돌을 얹어두면 두부가 된다.
 몽글몽글한 순두부를 베보자기에 싸서 잘 여미고 무거운 돌을 얹어두면 두부가 된다.
ⓒ 김정혜

관련사진보기



두부가 완성되었다.
 두부가 완성되었다.
ⓒ 김정혜

관련사진보기


할머니는 그 순두부를 온 식구들에게 한 그릇씩 퍼주셨다. 고소한 양념장 한 숟가락과 섞어먹던 그 순두부의 맛은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입에 군침이 돌게 한다. 식구들이 후루룩거리며 뜨끈뜨끈한 순두부를 먹는 사이 할머니는 함지박의 순두부를 베보자기에 부어 잘 여민 뒤 그 위에 무거운 돌을 얹는 것을 끝으로 두부 만들기를 끝내셨다.

이어 묵을 쑤고 식혜를 만들고 찹쌀을 쪄 절구에 쿵덕쿵덕 찧어 떡을 만드셨다. 할머니의 설 준비는 그렇게 몇 날 며칠 걸리셨다. 그러나 할머니는 단 한 번도 힘들다 내색 하지 않으셨다. 허리에 팔에 온몸이 쑤시고 결릴 법 하건만 한 번도 어린 내게 팔다리 내어주며 주물러 달라 하지 않으셨다.

어린 마음에 아양 떠느라 할머니 힘드시지 않느냐 여쭈어보면 오히려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내 강아지 입 속에 맛난 것 들어가는데 왜 힘이 들겠느냐’며 하얀 박꽃처럼 환하게 웃으셨다.

마흔 다섯. 내 유년의 설을 다시금 기억해본다. 지독히 추웠다. 그러나 지독히 추웠다는 그 기억 한 켠으로 풍요로움의 따스함이 스민다. 그렇다. 내 유년의 설은 지독히 추웠지만 차고 넘치게 풍요로웠다. 할머니가 계셨기 때문이다. 몇 날 며칠 칼바람을 맞아가면서도 오로지 가족들에 대한 하염없는 사랑 하나로 설 준비를 하셨던 할머니가 계셨다. 그랬기에 온 식구가 행복한 설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이틀 앞으로 다가온 마흔 다섯의 설. 할머니의 하얀 박꽃 같은 웃음이 사무치게 그립다.


태그:#설, #할머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왜 기자회원이 되고 싶은가? ..내 나이 마흔하고도 둘. 이젠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하루종일 뱅뱅거리는 나의 집밖의 세상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곱게 접어 감추어 두었던 나의 날개를 꺼집어 내어 나의 겨드랑이에 다시금 달아야겠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보아야겠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