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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 김정열씨의 허락 하에 취재기자가 시각장애인의 시점에서 작성한 기사입니다. <기자 주>

"집에 놀러 가도 되니?"

친구가 집으로 놀러온다고 전화가 왔다. 부랴부랴 무얼 대접할까 생각하다가 냉동 칸에 있는 가래떡이 떠올랐다.

며칠 전 친정어머니와 가래떡을 만들기로 하고 물에 담가서 불려놓은 쌀을 다음날 방앗간에 맡겼다. 방앗간 아주머니의 3시간 뒤에 다시 오라는 말을 듣고 집에 되돌아가 수다를 떨다 다시 가보았더니 구수한 향과 함께 기계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나는 가래떡이 나왔다.

집에 와서는 뜨끈뜨끈한 가래떡을 물에 적셔가며 하나하나 떼어낸 뒤 거실 한쪽에 서로 붙지 않게 펼쳐 놓았다. 사흘 정도 지나니 알맞게 굳었다. 도마에 올려놓고 어슷하게 썰어 떡국용 떡으로 변신시켰다. 일부는 꿀에 찍어 먹거나 떡볶이용으로 크게 남겨놓았다. 모두 후일의 맛있는 간식을 기대하며 냉동실로 직행했다.

놀러 온다는 친구가 맛있는 떡국의 첫 손님이 되었다. 우선 멸치 육수를 끓도록 두고 지단도 미리 준비했다. 거실에 신문지를 깔고 그 위에 도마를 놓고 떡을 썰 준비를 하고 있으니 큰아들 창희가 자기도 한 번 썰어보겠다고 끼어든다.

"자, 잘 봐, 이렇게 하는 거야" 하며 시범을 보여준 후 썰어보라고 하였다. 창희는 가래떡 반개 정도를 썰더니 생각보다 힘이 들었는지 이내 포기한다. 칼을 돌려받아서 다시 떡을 썰기 시작했다.

'딩~동.' 친구가 왔다. 자리에 앉은 친구의 첫마디.

"칼질 참 잘하네. 눈도 좋지 않으면서 칼 무서워하지 않니?"
"내가 벌써 주부 10년 차인데 이것도 못할까 봐? 흐리게 보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눈 감고도 하지."

10년차 주부, 이 정도 떡은 눈 감고도 썬다

나는 백내장 때문에 사물이 선명히 보이지 않는다. 세상이 늘 뿌옇게 보였기 때문에 잘 보인다는 게 어떤 것인지도 잘 모른다. 아주 어릴 적에 서울로 병원에 다녔던 기억이 나는데 의사 말이 수술해도 크게 좋아지지 않을 거라고 했단다. 그렇게 흐린 눈으로 초등학교에 다녔다.

체육 시간이나 방과 후 친구들은 운동장에서 뛰어노는데 나는 교실 아니면 집에만 있어야 했다. 그야말로 '방콕'…. 답답했던 시절이었다. 점점 학교에 가기가 싫어졌고 결석을 밥 먹듯 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 졸업 무렵에 맹학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돼 중학교는 맹학교로 가게 되었다. 소심한 꼬마에게 맹학교는 참 즐거운 곳이었다.

녹음도서로 책을 맘껏 읽을 수 있었던 일, 점자를 신기해하며 배웠던 일 등 참 재미있게 보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회상된다. 그 곳에서는 약시인 내가 전맹인 친구들보다 나은 편이라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그리고 17살 때 백내장 수술을 하게 되어 지금만큼이나마 볼 수 있게 되었다. 혼자 길을 다닐 수 있을 정도는 되었지만 여전히 시각장애 1급.

글자를 읽어야 할 때는 안경을 쓴다. 비싼 돈을 주고 세 번이나 압축한 렌즈인데도 두께가 1㎝에 가깝다. 그걸 쓰면 웬만한 글씨는 읽을 수 있지만 워낙 확대도가 높다 보니 조금만 오래 쓰고 있어도 머리가 어지럽다. 사람을 만나거나 외출할 때는 콘택트렌즈를 착용하는데 보행에 불편은 없지만, 길 가는 사람의 얼굴은 잘 알아볼 수 없다.

그래서 한 동네에서 산 지 오래 됐음에도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아는 사람을 만나도 인사 없이 지나쳐 건방지다는 오해를 많이 받았다. 그렇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일일이 설명하기도 번거로워 스스로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것 같다.

맹학교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할 때 자취하면서 요리 솜씨가 많이 늘었다. 잘한다고 말하긴 그렇지만 내가 먹고 싶은 음식들은 곧잘 만들어 먹곤 했다.

보글보글~ 떡국 끓이기

"창희야, 잘 마른 떡으로 골라줘."

창희는 딱딱한 떡을 골라 도마 위에 올려주더니 곧 덜 굳은 떡을 골라 꿀에 찍어 먹기 시작했다.

드디어 떡국 끓이기 시작! 멸치육수에 마늘을 넣고 소금으로 간을 한 후 떡을 넣어 끓였다.

"성진아, 이리 와봐~!"

국물을 떠서 후후~ 불어 둘째 성진이에게 간을 보게 했다. 음식 간을 보는 것은 늘 성진이의 몫이다.

"짜?"
"아니, 맛있어!"

떡국에 대파를 송송 썰어 넣으니 얼추 맛있는 떡국 완성이다. 상을 펴고 냉장고에서 김치와 나물을 꺼냈다. 김가루와 지단도 알맞게 넣어 먹으라고 따로 담아내었다.

늘 티격태격 대는 11살과 8살배기 두 아들은 이때도 어김없이 서로 때리고 뛰어다니며 장난을 친다.

"창희야 수저랑 젓가락 놔야지~? 물 준비는 성진이 담당이잖아. 얼른 준비해."

떡국에 김과 지단까지 넣으니, 꽤 맛이 좋다. 평소엔 떡국 만들 때 쇠고기나 굴을 넣어서 국물을 내는데 오늘은 갑작스럽게 만드느라 멸치로 대신했다. 그런데도 아이들이 맛있다며 잘 먹으니 기분이 좋다.

"떡국 다 먹고 윷놀이 한판 어때?"

떡국 잔치가 끝나갈 무렵 친구가 제안한다. 재빠른 큰아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윷과 윷판을 꺼내왔다.

윷이야~, 모야~!

윷 던지는 소리가 크지 않도록 얇은 이불을 깔고 말로 사용할 흑·백 바둑알도 네 개씩 준비했다. 나와 큰아들 창희가, 그리고 친구와 둘째 성진이가 짝을 이뤘다.

“앗! 모다. 한 번 더~!”
“아자, 잡았다!”
“또 개야? 이거 완전 개판이로구만~.”

어설프게 세워진 윷을 보며 걸이다! 개다! 서로 우기기도 하면서 시끌벅적한 윷놀이 한 판이 끝났다. 첫 번째 판은 우리 편의 승리!

"엄마, 한 번 더 하자~!"

승리의 주역인 창희가 말했다.

"그래, 이런 건 역시 삼세판이야."

옆에서 친구가 거든다.

두 번째 판이 시작됐다. 윷놀이 규칙을 잘 몰라 무조건 자기가 던지겠다고 우기던 성진이도 이제 제법 순서를 안 모양이다. 이번엔 성진이의 활약으로 친구네 편이 승리!

막상막하, 일대일이다. 셋째 판으로 돌입~!

"윷, 모, 걸 이렇게만 나오면 최고야~, 아자!"
"도 나와라~ 도."

서로 응원도 치열했다.

"와~! 우리가 이겼다!!”"

셋째 판도 친구네 편의 승리~!

"한 번 더! 아니, 두 번 더해요!"

창희가 결과에 승복할 수 없었던지 5판 3승제를 하자고 조른다. 넷째 판까지 2대 2로 팽팽하게 맞섰다. 다섯째 판에 접어들자 둘째 성진이는 슬슬 윷놀이가 지겨워지는 모양이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놀다가 제 순서 때만 조르르 와서 윷을 던지곤 했다. 그에 비해 창희는 이겨야겠다는 신념으로 끈질기게 윷가락과 윷판을 오갔다.

결국 우리 편, 창희와 내가 이겼다! 놀이가 즐거워 시간가는 줄도 몰랐다.

차를 한잔 나눈 친구가 집에 가야 한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함께 떡국을 만들어 먹고 윷놀이를 함께 해서인지 아이들이 꽤 아쉬워하는 눈치다.

"그러고 보니 오늘 떡국 먹고 윷놀이도 하고 우리끼리 설날 기분을 미리 낸 셈이네."

설에도 오늘만큼 재밌게 보내야겠다.

"잘 가, 친구야~!"

* 여기서 잠깐! 시각장애인의 윷놀이 방법을 소개한다.

[젓가락 뽑기]
시각장애인들이 가장 흔히 갖고 놀던 놀잇감.
▲ 맹인용 윷 (대구 점자출판박물관 전시) 시각장애인들이 가장 흔히 갖고 놀던 놀잇감.
ⓒ 김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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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란 필통 안에 10개의 젓가락이 꽂혀 있다. 젓가락 끝에는 각기 다른 모양의 홈이 파여 있어 각각 1~10까지의 숫자를 의미한다.

머릿속에 도·개·걸·윷·모로 이뤄지는 윷놀이 판을 그려놓고 두 개 또는 세 개의 젓가락을 뽑아 그 수만큼 말을 움직이는 놀이이다. 두 젓가락에 표시된 수를 더해서 그 끝자리가 1 또는 6일 경우 도(한 칸 이동), 2 또는 7일 경우 개(두 칸 이동),… 5일 경우 모(다섯 칸 이동), 이런 식으로 젓가락으로 윷놀이를 한다.

[말윷놀이]

젓가락을 뽑는 대신 말로 하는 윷놀이이다. 두 명 또는 세 명이 1~10까지의 숫자 중 하나를 동시에 외친다. 그 숫자들을 더해서 끝자리 수에 따라 도·개·걸·윷·모를 적용하여 윷놀이를 하는 것이다. 아무 도구도 없이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덧붙이는 글 | 시각장애인 잡지 <손끝으로 읽는 국정> 2월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한국점자도서관 기획홍보팀 기자로 취재한 기사입니다.



태그:#시각장애, #윷놀이, #떡국, #설, #한국점자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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