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 놓지 않고 찾아 보아야 할 역사의 현장 어느 누가 인물은 선산에서 다 난다고 했던가? 조선시대 선산에서는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는데, 선산의 인물 중에는 특히 일신의 평안함이나 세속의 영화를 버리고, 절의를 지켜나간 인물들이 많다.
선산에서 고려 삼은이라 일컬어지며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충절에서 은거하기로 작정하고 낙향하여 금오산 기슭에서 지낸 야은 길재 선생의 흔적을 따라 금오서원으로 한 번 가 보았다.
경북 구미시 선산읍 원리에 있는 금오서원(경상북도 기념물 제60호)은 조선 선조 3년(1570) 야은 길재의 충절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금오산 아래에 창건하였다. 1575년 '금오'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임진왜란(1592) 때 소실되었다가 현재의 위치에 복원되었다.
서원 철폐령에도 살아남은 서원금오산 아래에 있을 당시에는 길재 선생만을 향사 했으나 이건 후 서원에는 이 고장 출신이나 이곳과 관련된 인물로 김종직, 정붕, 박영, 장현광 등을 추가로 배향하여 선산 5현의 위패를 모셔왔다.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毁撤)되지 않은 47개의 서원 가운데 하나로 이 지방에서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서원이다.
산 비탈의 좁은 터를 이용해서 인지 계단식으로 터를 닦고 총 5동의 건물이 있다. 서원으로 딱 들어서는 다락집 형태의 누문인 읍청루, 좌우에는 기숙사 격인 동재와 서재가 있고, 이 보다 한단 높게 건물의 중심으로 학문을 강론하던 강당인 정학당이 있고, 정학당을 돌아 삼문을 지나면 문묘의 대성전이라 할 수 있는 다섯 선현의 위패를 모신 상현묘가 터를 잡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구조를 전학후묘라 한다. 전체적으로 매우 간결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7조의 조항이 적혀 있는 정학당중심 건물인 정학당에는 대청 안쪽 벽에 붙은 현판에는 '7조'의 조항이 적혀 있는데 학생들이 서원이나 가정에서 지켜야 할 생활규범 일곱 가지 조항이다.
창과 벽에 낙서를 하거나 책을 망가 드리거나, 놀면서 공부를 안 하거나, 함께 살며 예의가 없거나, 술이나 음식을 탐하거나, 난잡한 이야기를 하거나, 옷차림이 단정하지 않은 이 일곱가지를 어긴 자는 왔으면 돌아가고 아직 오지 않았다면 오지말라.이 교훈에서 당시 학생들은 무엇을 느낄까? 이 규칙을 어겼을 경우, 당시 학생들에게는 어떠한 조치가 취해 졌을까? 생각하니 할 수록 궁금해진다.
야은 길재 선생과 관련된 또 다른 유적으로 채미정(採薇亭: 경상북도 기념물 55호)이 있는데, 옛날 중국 주나라 백이와 숙제가 충절을 지키며 수양산에 숨어 살았다는 고사에서 빌려온 이름이다.
당시 자연 속에 학문을 연마하고 자유 자재한 삶을 살고 간 선현의 가르침과 성리학을 이해하는 좋은 기회가 된 곳이 바로 금오서원이다. 앞으로 펼쳐진 확 트인 벌판과 넓은 모래사장은 낙동강을 유유히 흐르는 물처럼 현재의 순간도 역사로 남기고 있다.
오백년 도읍지를 길 재오백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도라드니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 듸 업다.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