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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정은 우물이고 양산재는 사당이다

 

 

『삼국사기』신라본기 제1 ‘시조 혁거세 거서간’ 조에 보면 양산(楊山)과 나정(蘿井)이라는 말이 나온다. 양산은 버드나무가 많은 산이고 나정은 칡넝쿨 우거진 우물이다. 이곳 양산나정이 바로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가 태어난 곳이다. 고허촌장(高墟村長)인 소벌공(蘇伐公)이 말울음소리를 듣고 가서 얻은 큰 알에서 나온 어린 아이가 바로 혁거세이다. 박이라는 성은 큰 알이 박과 같다고 해서 붙였다고 한다.

 

경주 시내에서 오릉사거리를 지나 좌회전해 남간마을 가는 길로 들어서면 왼쪽으로 소나무숲이 보인다. 양산이라는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 버드나무가 있어야 하지만 현재는 이와 달리 소나무가 무성하다. 신라 왕조를 연 시조의 출생지라 후대에 소나무를 심어 보호했을 것이다.

 

 

이곳에는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평탄한 대지가 보이고 그 한쪽 편에 나정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조선 순조 3년(1803)에 세운 유허비가 있다. 나정은 역사적인 의미가 있어 찾는 곳이지 별로 볼 것은 없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우물은 매몰되어 볼 수가 없고 주변은 언덕과 밭처럼 쓸쓸하고 황량하기만 하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중앙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을 한 다음 정지작업을 해서 현재의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이곳 나정에서 삼사백 미터 올라가면 역시 왼쪽에 양산재가 자리 잡고 있다. 양산재는 양산에 자리 잡고 있는 재실이란 뜻으로 신라 건국의 모태가 된 6부 촌장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이 사당은 1970년에 건립된 것이어서 역사성은 없다. 위패가 모셔져 있는 사당인 입덕묘(立德廟)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양산재(楊山齋)란 현판이 붙은 정문과 홍익문(弘益門)이란 현판이 붙은 중문을 지나야 한다. 입덕묘 안을 살펴보니 이들의 위패가 유교식으로 배치되어 있고, 위패 앞에는 향로, 향합과 초가 마련되어 있다.

 

이들 6부 촌장과 이들이 이후 어떤 성씨를 받았는지 하는 것은 『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지리지」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왕족이었던 박씨, 석씨, 김씨를 제외하면 이들 6개 성씨가 신라의 주류 세력으로 활동하게 된다. 신라를 대표하는 학자인 설총과 최치원도 이들 6부 촌장의 후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본부(本府: 경주부)의 토성(土姓)이 6이니, 이(李)·최(崔)·정(鄭)·손(孫)·배(裵)·설(薛)이다.【김부식(金富軾)이 이르기를, “조선(朝鮮) 유민(遺民)이 산골짜기에 나누어 살아서 여섯 마을이 되었으니, 첫째는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 둘째는 돌산 고허촌(突山高墟村), 셋째는 취산 우진촌(觜山于珍村), 넷째는 무산 대수촌(茂山大樹村), 다섯째는 금산 가리촌(金山加利村), 여섯째는 명활산 고야촌(明活山高耶村)으로서, 이것이 진한 육부(辰韓六部)가 되었다.

 

육부 사람이 박혁거세(朴赫居世)를 높여서 임금으로 세웠으니, 이가 신라 시조가 되었다. 셋째 임금 유리왕(儒理王) 8년에 이르러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인해 성(姓)을 주었으니, 양산은 양부(梁部)로, 성(姓)은 이(李)로 하고, 고허는 사량부(沙梁部), 성은 최(崔)로, 우진은 본피부(本被部), 성은 정(鄭)으로, 대수는 점량부(漸梁部), 성은 손(孫)으로, 가리는 한지부(漢祗部), 성은 배(裵)로, 명활은 비습부(比習部), 성은 설(薛)로 하였다.”고 하였다.】”

 

남간사지 당간지주에는 십자 모양의 홈이 있네.

 

 

양산재를 나와 우리 일행은 다시 남간마을로 향한다. 가다 보니 오른쪽으로 논 가운데 당간지주가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이것이 남간사지 당간지주(보물 제 909호)이다. 남간사지가 남간마을 한 가운데 있었다고 하니 남간사는 남향을 하고 마을 앞 논쯤에 당간지주가 서 있게 된 것이다. 차를 근처에 대고 당간지주를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논으로 들어간다. 여름 같으면 멀리서 구경만 해야 할 텐데 겨울이라 가까이 가 만져도 보고 확인할 수도 있어 좋다.

 

높이가 3.6m로, 70㎝ 간격을 두고 동서로 마주보고 있다. 이 당간지주는 통일신라 중기인 8세기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돌의 윗부분과 옆모서리를 다듬어 부드러운 느낌이 나며 지주에 두 개씩 구멍을 뚫었다. 그런데 당간지주의 윗부분 안쪽으로 십자 모양의 홈이 파여 있어 특이하다. 우리 일행 중 한 사람이 “당시에 벌써 기독교가 들어왔나” 하고 농담을 한다.

 

 

남간사(南澗寺)는 해목령을 바라보고 세워진 절로 지금은 주춧돌과 탑재 그리고 우물만이 남아 있다. 남간사는 신라시대 창림사와 함께 이 주변에서 가장 큰 절이었다. 원화연간(元和年間: 806-820)에 일념(一念) 스님이 남간사에 머물며 불교를 위해 순교한 이차돈을 추모하는 ‘촉향분예불결사문(燭香墳禮佛結社文)’을 지었다고 한다. 이것을 우리말로 옮기면 ‘무덤 앞에 촛불과 향을 피우고 예불을 드리며 결의를 다지는 글’ 정도가 된다.

 

일성왕릉의 일성은 무슨 뜻일까?

 

 

당간지주를 보고 다시 마을로 해서 산쪽으로 가니 마을이 끝나는 지점에 큰 연못이 나타난다. 옛날 이 연못터에 절의 강당이 있었다고 해서 강당못이라고 불린다. 이곳에 차를 세우고 산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일성왕릉(逸聖王陵)이 나온다.

 

일성왕은 신라 제7대 왕으로 유리왕의 후손이다. 『삼국사기』의 설명이 신빙성이 없어 정확한 가계를 그리기는 어렵다. 21년의 재위 기간 동안, 안으로 농사 장려 등 내치에 주력했고 태백산까지 순행하는 등 외치를 위해서도 애를 썼다. 일성이라 시호한 것을 보면 뛰어나고 성스러운 왕이었던 것 같다.

 

일성왕릉은 봉분의 지름이 15m, 높이가 5m인 원형봉토분이다. 전문가에 의하면 봉분 안에 석실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능과 달리 계단을 통해 두 단을 올라간 다음 다시 또 한 단의 축대를 쌓고 그 안으로 봉분을 만든 조금은 특이한 형태이다. 산의 경사면을 평탄하게 하기 위해 이런 방법을 사용한 것 같다.

 

 

일성왕릉은 전체적으로 아주 아늑한 분위기다. 능의 계단 앞에 소나무 두 그루가 있어 문 같은 느낌이 들고 능 주위에 소나무들이 감싸고 있어 푸근한 느낌이 든다. 이곳은 또 아래로 연못과 장창골 계곡이 한 눈에 들어와 풍수지리적인 면에서도 상당히 좋은 위치로 보인다.


태그:#나정, #양산재, #남간사지 단간지주, #일성왕릉, #장창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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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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