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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가는 담당교수 붙잡고 얻어낸 청강 승낙

내가 와 있는 미국의 대학교는 1월 14일 새해 휴가를 마치고 개강을 하였다. 조용하던 캠퍼스에 갑자기 활기가 넘친다. 나도 학생들의 무리와 같이 첫 수업을 들으러 강의실을 찾는다.

벌써 교수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청강을 허락해 줄 것을 부탁을 해 보았지만 답변을 보내준 교수가 한 명밖에 없어 오늘은 일단 한국인의 막무가내정신으로 일단 강의시작시간에 찾아가서 부탁을 해 보기로 작정을 했다. 사실 영 부담스럽고 민망하기도 하기만 그 세계최고인 미국이라는 나라의 대학교에서 강의를 그것도 공짜로 들으려면 이런 정도는 감수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낭패다. 강의실로 들어가는 문이 양쪽으로 두 개나 있다. 더군다나 들어가는 문이 서로 보이지도 않는다. 그동안 수염도 깎지 않고 '개판'으로 살던 꾀죄죄한 나의 기본 이미지인 “노숙”분위기를 제대로 풍기고 있는 마당에 학부생들의 수업시간에 같이 들어가려하니 내가 보아도 좀 상황이 그런데, 좌우간 여러 가지로 도와주는 게 없다.

방법이 없다 일단 한쪽 출입구를 봉쇄하고 담당교수를 기다리고 있는데, 안 되는 놈은 역시 안 되는 건지, 역시나 교수로 보이는 사람이 다른 문으로 들어와서 교탁에 자료를 내려놓는다. 이런 XX.

그런데 이제부터 반전이 시작되었다. 교탁에 물건을 내려놓자마자 화장실을 가려는지 다시 강의실에서 나오는 것 아닌가. 그러지 않아도 교수에게 가서 안 되는 영어로, 그 많은 학생들이 다 주목하고 있는 가운데 나의 사정을 설명하고 청강할 것을 부탁하기가 무안하던 판이었는데 말이다. 거기다가 십중팔구는 안 된다고 할 것이 뻔한 것 같았는데 말이다.

그러던 참에 교수 스스로 밖으로 나와 주니 얼마나 다행인가. 좌우간 급해 보이는 표정으로 화장실에 가는 담당교수를 잽싸게 뛰어가 붙잡고 짧은 영어로 청강을 해도 되겠느냐고 하니까 흔쾌히 반가운 표정으로 승낙을 한다. 여러 가지 '개소리'는 일단 다음으로 접어두고 “땡큐 소 머치”를 하고 화장실에 고이 가도록 놔줬다.

역시 사람은 평소에 좋은 일을 해야 복을 받나 보다. 흐뭇해하며 안심을 하고 자신있게 강의실로 들어갔다. 애송이 같은 학부 저학년들이 첫 수업을 기다리는 긴장된 분위기는 한국이나 여기나 별로 다를 것이 없구나 생각을 하며 적당히 중간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나의 미국에서의 첫수업이 시작 되었다.

도대체 미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이렇게까지 세상을 호령하며 그들 멋대로 하는지 정말이지 알고 싶었다. 보고 싶었다. 이들의 대학이 얼마나 위대하기에 한국의 대학들은 그들의 발가락에 붙은 때만도 못한 것인지 느껴보고 싶었다.

그러한 조바심과 궁금증과 갑갑함을 풀기 위한 목적이 이번 연구년 기간 동안 제일먼저 이곳에 와 보려 하였던 이유 중 하나가 아니었던가. 그 행보의 첫 단추를 꿰는 이 순간이 나로서는 감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한 질문이 무슨 뜻인지 토론하던 멕시코 교수와 학생들

미국 대학에서 내가 듣는 수업을 담당하는 히스패닉 풍의 그 교수의 목소리는 큰 편이 아니었다. 교수 바로 앞쪽으로 다시 자리를 옮겨 앉고 나니 이제 온전히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한국에서 그 지긋지긋한 중고등 학교의 영어교육과 대학의 교양영어 수준의 교육이 전부인 내가 영어를 과연 알아들을 수 있을까? 나에게 뭘 시키지는 않을까? 그야말로 두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미 다른 나라에서 유학하며 외국어로 공부한 경험을 해 보기는 했지만 그래도 영어 귀머거리인 나로서는 두려움이 클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나의 첫 유학 경험은 정말이지 다시 생각할수록 식은땀이 나는 그런 웃지 못할 일화들의 연속이었다. 그 짓을 다시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걱정이 안 될 수 없었다.

매는 맞을수록 덜 아픈게 아니고 점점 더 두려움이 커져가는 법이다. “그때는 젊기라도 했지” 하는 마음이 자꾸 든다. 그럴수록 “그게 무슨 소용이야, 나이가 뭐 중요해 그냥 들이대는 거야, 멕시코 유학 때처럼 말이야” 하고 주문을 외워 본다.

친절한 멕시코 교수들이 나의 “한 수업시간에 무조건 한 가지씩 질문하기” 원칙에 얼마나 당황하고 고통을 겪었는지 생각을 하면 지금도 미안할 뿐이다. 내가 일단 손을 들고 질문을 하려하면 강의실 전체가 모두 긴장한다. 모든 학생들이 호흡마저도 멈추고 나를 주목한다. 저기서 끄덕 끄덕 졸던 녀석도 재미난 일이라도 생겼다는 듯이 땡그랗게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본다. 내가 엉터리 스페인어로 몇 마디 지껄이면 이제부터는 모두 다른 사람들의 몪이다. 학생들과 교수 모두 각각 의견을 내놓는다.

호세가 먼저 말을 한다.

“송(멕시코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불렀다)이 질문하려고 하는 거는 이런 걸 거예요 교수님”,

여기에 아드리아나가 반박을 한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저는 송이 이런 걸 묻고 싶었던 거 같은데요.”

내 말을 자기가 가장 잘 알아듣는다고 자부하는 전속 통역사를 자처하는 아이도 있었다. 저마다 한마디씩 하면서 나의 얼굴을 쳐다보면 내가 드디어 이 어려운 퀴즈의 정답자를 지정해 준다. 사실 딱히 정답 같은 것이 있는지 헷갈리는 경우도 많았지만 말이다.

그럼 교수는 또 열심히 쉬운 단어를 써서 천천히 설명을 해 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말을 이렇게 써서 그렇지 사실 그 상황이 나에게는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었던지 지금도 고개가 절로 저어지고 쓴웃음이 지워지지 않는다. 물론 그렇게 나에게 친절을 베풀어준 학생들과 선생님들에게 고마운 마음이야 한량이 없다.

멕시코 유학의 에피소드는 그야말로 무궁무진이다. 특히 초기 스페인어 실력이 부족할 때의 갖은 엉터리와 양심불량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한번은 짜깁기로 베껴간 리포트를 온전히 내가 쓴 것으로 생각을 한 교수가 나에게 잘했다고 박수를 쳐주던 적도 있었다. 그 교수는 한국 학생들의 천부적인 베끼기 기술에 대하여 잘 알 리가 없었다. 모든 학생들이 같이 박수를 쳐주었는데 지금도 그 순간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 쓰라린 표절의 기억을 말이다.

역시 사람은 죄짓고는 못사는가 보다. 지금도 그 교수를 만나면 고백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물론 거의 20년이 다 되어가서 그 교수는 이미 은퇴를 하고 안 계시지만 말이다. “교수님 죄송합니다. 저의 그 때 그 레포트, 베낀 거였습니다.” 지금도 그 때의 생각을 하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이런 나의 첫 유학시절의 일화들을 생각하면서 그때의 그 마음으로 다시 새로운 언어를 쓰는 나라의 강의실에 앉았다. 그런데 그때보다 상황이 별로 나아진 것이 없으니 어찌 수업시간에 긴장이 안 되겠는가. 20여년 전 멕시코 유학의 첫 수업을 듣는 그 느낌 그대로 그렇게 오늘이 느껴진다.

그런데 이곳 똑똑하고 잘난 미국 사람들이 나를 멕시코 유학시절처럼 그렇게까지 배려해 줄 것 같지도 않다는 느낌이 든다. 막무가네 정신으로 일단 수업에 들어오기는 하였는데 참 난감하기 그지없다. 그렇게 나이 44에 다시 학생이 되었다.

서툰 영어 발음에도 당당한 담당 교수

내가 미국에서 듣는 수업은 라틴아메리카 사회학 개론이다. 그런데 그 담당교수의 발음이 심상치 않다. 내가 영화에서 본 허연 금발의 미녀가 하는 그런 발음이 아니다. 중남미에서 온 사람이라는 표가 팍팍 나는 외모를 하고 있는 그 선생님이 쓰는 말은 스페인어를 영어로 그대로 직역해 놓은 듯 한 말투였다. 발음도 그렇고 문장구조나 쓰는 단어들도 스페인어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나로서는 안도의 한숨이 쉬어지기는 하지만 사실 좀 실망이다. 이곳에 왔으니 정말 제대로 된(?) 코쟁이의 그런 강의를 듣고 싶었는데 말이다. 하여간 그 교수의 말이 나의 귀에 쏙쏙 들어오며 잘도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그 교수가 자신의 영어에 대하여 한마디 한다.

“저는 책을 보면서 영어를 해서 영어가 부족하고 발음이 좀 다릅니다. 그러니 혹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거나 하면 언제든지 질문을 해 주세요. 우리가 언어를 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의사소통 아니겠어요?”

와우! 바로 내가 평소에 생각하던 바를 실제에서 그대로 보여주는 말을 아주 편안하게 하는 교수가 참으로 존경스러워 보인다.

한국 학생들에게 영어 그리고 영어 발음은 곧 생명이다. 영어 실력을 나누는 척도이고, 교양의 정도이고, 멋있는 놈과 꼬질한 놈을 구분하는 경계이기도 하다. 미국 할리우드 영화에서 들리는 그런 혀가 완전히 꼬인 발음이 일단 나왔다 하면 이건 분명이 뭔가 있는 사람이 된다.

영어는 좀 지껄이기는 하는데 발음이 영 그렇다고 한다면, 얘는 힘든 집안 살림에 그래도 신분상승은 좀 하고 싶어서 어렵게 필리핀 가서 궁상떨다 온 아이가 된다. 물론 그나마도 영어를 못하는 애들은 더 이상 말해 무엇하랴.

영어를 왜 배우는지 무엇에 쓰려고 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저 영어를 잘하느냐 못하느냐가 일단 한국에서는 참으로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리고 그 영어 잘하고 못하는 것의 척도 중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발음이다. 그러다 보니 그 발음이라고 하는 것이 의사전달을 정확히 하기위한 그런 것이 아니라 얼마나 본토의 발음에 가까우냐 아니냐가 중요한 척도가 된다.

껍데기, 포장지, 상표, 겉치레만을 좋아하는 한국사람들의 기질이 영어학습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다 보니 내용물에 대한 관심과 중요성은 그만큼 뒷전이 된다. 그리고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영어고, 백인 원어민 교사이고, 혀 꼬부라진 소리에 주눅이 든다.

그런 현실에서 살다 이곳 미국, 소위 영어의 본토라고 하는 곳에 와서, 그것도 대학의 강의실에서 교수가 하는 전형적인 히스패닉 발음과 자신의 영어에 대한 당당한 설명을 들으니 우리가 가진 그 껍데기 추종의 덧없음이 더더욱 느껴진다.

외국인이 한국말을 하면서 발음이 다르거나 어색한 것을 우리는 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재미있다고 티브이 프로에 앉혀 놓고 들으며 좋아하기까지 한다. 그들은 영원히 한국어 발음을 우리와 똑같이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부분이 재미있기까지 한 것이다. 그 사람들이 어색한 한국어 발음을 한다고 죄스럽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미국에 살고 있는 히스패닉들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언어 특징들이 드러나는 그 영어발음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고, 다만 정확히 의사소통을 하려고 노력을 한다.

경상도 사람이 경상도 말을 한다고 해서 서울에서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것이 아니다. 경상도 말을 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그것을 꼭 바꾸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도 없다. 언어는 그런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우리의 영어 흉내 내기에 대한 열등감과 막연한 우상화가 얼마나 실체가 없는 것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우리들이 한국적인 영어를 한다고 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끄러운 것으로만 생각하다 보니 히스패닉이 하는 영어를 들으면서 콧방귀를 펑펑 뀌는 웃지 못 할 일도 벌어진다. 누가 누굴 우습게 봐야하는 건지 이정도 되면 그야말로 꼴불견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미국 사람들이 한국사람들의 그런 영어에 더 후한 동정 점수를 주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한국사람들이 하는 영어보다도 내용을 중시하는 히스패닉들의 영어가 더욱 잘하는 영어가 되는 경우가 많다. 되도 않는 꼬부랑 발음을 하느니 비록 외국어식의 발음이지만 정확한 내용을 가진 언어가 훨씬 중요하다.

적확한 사고를 가지고 있으면 발음이 나빠도 이야기의 흐름상 내용을 더욱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생각이 확실하면 최소한의 언어로도 정확한 의사전달이 된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한편 만일 우리가 미국사람과 똑같은 발음을 할 수 있게 되었다치더라도 미국사람들이 뻔히 동양인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그런 한국계를 백인과 똑같이 대해 주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물론 이 문제는 또 다른 문제지만 말이다.

스페인 태생의 국제올림픽조직위원회(IOC) 위원장인 사마란치가 스페인어식 발음으로 “아이 암 아 쁘레지덴떼”(I am a presidente)라고 해도 그의 그런 발음이 세계 중요 직책을 수행하는 데에 결격사유가 된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영어를 못 알아듣는 미국 사람도 없다. 그런 발음을 조롱하고 격하하는 사람들은 우리뿐인 것 같다.

미국의 유명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에게 중요한 것은 발음이 아니라 내용전달이라고 하는 점은 이곳 미국 대학의 관계자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이곳에서도 그런데 영어가 국어도 아닌 한국에서는 그놈의 발음에 그야말로 목숨을 건다. 아예 혀 밑을 자르는 수술까지 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내가 엉뚱한 소리를 들은 것으로 믿고 싶다.

어찌되었건 이런 것을 보면서 내가 나의 조국인 우리나라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참 갑갑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특히 전 국민이 그 꼬부랑 발음으로 영어를 할 수 있는 날을 위해 새로운 정부가 목숨을 걸고 총 매진한다는 소리를 접하면 더 이상 논쟁의 의미조차 사라지고 만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겨레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미국#유학#영어#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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