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저래 김태수는 머릿속이 뒤숭숭했다. 그는 조랑말 흑주를 타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 마음은 오윤정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그는 광화문 앞 황토현에서 말 머리를 왼쪽으로 돌렸다. 그는 사직단 방향으로 천천히 말을 몰았다. 그러자 인왕산 옆 등성이가 눈에 들어왔다. 인왕산 위쪽 숲 사이에 펼쳐져 있는 하얀 바위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은 그 바위들을 병풍바위라고 불렀다. 병풍바위 아래에는 유달리 오뚝 튀어 나온 큰 바위 하나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치마바위라고 일컬었다
불현듯 뒤에서 말발굽 소리 같은 것이 들리더니 누군가 김태수 옆을 빠른 속도로 추월해 갔다. 그러더니 김태수를 앞질러 간 말과 사람은 얼마 안 가 급히 멈췄다. 놀랍게도 황강 위에 오윤정이 타고 있었다. 그녀는 한 무더기의 빛을 거느리고 있는 듯 휘황찬란해 보였다.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김태수 쪽으로 말 머리를 돌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그의 가까이로 소리 없이 다가왔다. 그녀는 다시 웃었다. 그녀의 웃음은 마치 석류 알이 으깨어지는 것처럼 화사하고 청순하게 느껴졌다. 김태수의 가슴이 맹렬하게 고동치고 있었다. 그는 자기 눈을 의심해 보았다. 도대체 꿈인지 생시인지 가늠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것은 꿈도 아니고 생시는 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김태수의 환상이었고 신기루였다. 하지만 그의 가슴은 여전히 거친 고동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었다.
김태수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말 머리를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그는 내일이라도 당장 말을 새로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 흑주만 타고 나오면 되는 일이라고는 없다는 생각이 치밀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당장 명월관에 가서 주옥경이라도 만나 수작이라도 벌이고 싶어졌다.
노란색 양장을 하고 머리를 틀어 올린 주옥경이 연한 술 냄새를 풍기며 방에 나타났다. 그녀가 앞에 앉자마자 김태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사랑하는 남자가 있소?”
“김태수 나리를 사랑합니다.”
“농담 마시오.”
“농담인 줄 아시는군요.”
“그럼 김태수가 사랑하는 여자는 누군지 아나?”
“주옥경이옵니다.”
“증거를 댈 수 있나?”
“물론 없사옵니다.”
“그럼 무효다.”
“사랑에는 증거가 없습니다.”
“그 말도 맞다.”
“동의하십니까?”
“그런데 사랑하지 않을 때에도 증거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제가 졌습니다.”
“아니다. 네가 이겼다.”
“왜입니까?”
“사랑에 증거가 없다는 네 말은 맞지만, 사랑하지 않을 때에 증거가 없다는 내 말은 사실은 틀린 말이다. 진실하지 않은 사랑에는 반드시 증거가 있게 마련이다.”
“나리는 솔직하고 영리하신 분입니다.”
“나리라고 부르지 마라.”
“그럼 뭐라 부르리까?”
“태수라고 불러라. 어려우면 씨 자를 붙여라.”
“둘이 있을 때만 그리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묻는다.”
“물으십시오.”
“나 빼고 어떤 남자를 사랑하는가?”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됩니까? 태수 씨.”
“솔직하게만 말해야 한다.”
“독립운동가를 사랑하고 싶습니다.”
주옥경…. 그녀는 말 그대로 훗날 독립운동가 손병희의 첩이 되었다. 손병희 등이 민족 대표를 자처하며 기미독립선언을 하고 서대문 형무소에 갔을 때, 그녀는 형무소 담장 가까이 있는 한 초가를 임대하여 살면서 손병희의 옥바라지를 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50여 년 후 대한민국 정부는 손병희에게 건국공로훈장을 수여한다. 이때 유족을 대표해 훈장을 받은 사람이 바로 주옥경이었다.
서울에는 북촌과 남촌이 있었다. 조금만 생각하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서울 풍수지리의 핵심 명당은 경복궁과 창덕궁이었다. 북촌은 두 대궐의 중간에 자리 잡은 서울의 최고 주택가였다. 당상관 급의 고관 양반이 주로 살아오던 북촌도 그러나 이제는 달라지고 있었다. 신흥 부자들이 고택을 허물고 신식 주택을 짓고 있었다. 문화주택이라고 부르는 이 새 집들에는 돈 많은 지방 지주들의 자녀가 입주하였고, 그들은 그곳에서 사치스럽게 인력거를 타고 학교에 다녔다.
이에 반해 명동과 충무로 일대를 남촌이라고 불렀다. 명동성당만이 우뚝 서 있었던 그곳에도 이제 신식 건물들이 줄지어 들어서고 있었다. 그곳에는 한양에서 가장 먼저 상수도가 보급되고 넓은 도로가 열렸다. 전깃불이 밤을 낮처럼 밝혔고 상가에는 신식 상품들이 속속 진열되고 있었다. 이렇게 남촌은 신흥 부촌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남촌에는 일본인들이 많았고 조선인일 경우 친일 인사가 대부분이었다.
북촌과 남촌 사이를 흐르는 개천이 청계천이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집들과 허름하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에 주민들은 익숙해져 있었다. 특히 개천가의 집들은 주택일 수도 있고 주택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었다. 땅을 판 다음 달랑 거적을 씌운 이 집들은 멀리서 볼 때 좀처럼 사람이 사는 집으로 보일 리가 없었다. 청게천에는 남촌에서 쫓겨나는 조선인들과 굶주림을 벗어나려고 무작정 상경한 시골 유민들이 뒤섞여 살았다. 그런 경황 중에도 아이들 놀이터와 아낙들의 빨래터가 자연스레 조성되어 가고 있었다.
청계천 부근에 살면서 북촌의 휘문학교에 다니는 민필호는 지난 봄 최도애의 집이 남촌으로 이사해 갈 때만 해도 딱히 수상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런데 신설된 총독부 참여관에 도애의 아버지가 임명되었다는 신문 기사를 보고는 그 연유를 알게 되었다. 사실 그때 필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사랑하는 여자의 부친이 친일파? 당연히 그것은 자신의 실존과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필호는 중학 졸업을 채 반 년도 남겨 놓지 않고 있었다. 마음은 언제나 형 제호처럼 독립운동의 길을 떠나고 싶었지만, 결심이 확고해진 뒤 준비를 철저히 하고 오라는 형의 당부 때문에 애써 늦추고 있는 중이었다. 결심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흔들려 본 적이 없지만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고 보아서 학교를 마치면 곧 결행하려고 마음먹고 있던 차였다.
문제는 최도애였다. 같이 가자고 하면 처음에는 당황하겠지만 결국은 그녀가 따를 것이라고 필호는 생각했다. 그만큼 필호는 그녀를 믿은 것이었다. 많은 건 아니었지만 이미 여성도 일본이나 대륙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머뭇거린다면 그녀가 학교를 졸업하는 내후년까지는 기다릴 수도 있다고 필호는 생각해 왔다.
하지만 이제 필호는 혼란스러워졌다. 그녀가 이미 아버지의 영향권에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코 그럴 리는 없었다. 그녀는 맑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필호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오히려 더 잘 된 일일 수도 있었다. 예정보다 앞당겨 떠날 수도 있는 일이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만약에 아니라면?’
‘만에 하나 그녀가 나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자꾸 이런 의문이 지펴지면서 필호의 가슴은 답답해졌다. 그는 밤을 새우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리고 그는 최종적인 결정을 새벽녘에야 내릴 수 있었다
“우리는 이미 맹세했습니다.”
최도애는 필호의 엄중한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지난 달 수령이 300년도 넘었다는 삼청동 측백나무 아래에서 두 사람만의 약혼을 감행했다. 약혼은 최도애가 먼저 제안한 것이었다. 필호는 자신은 독립운동을 해야 할 몸이니 잘 생각해 보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결심을 끝냈다고 했다. 그들은 아름드리나무 아래서 서약문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포옹을 하면서 서로의 뛰는 가슴을 느꼈다.
“먼저 하나만 묻겠습니다. 아버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녀는 다시 고개를 숙이더니, “잘못된 일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얼굴을 들더니 물었다.
“그렇다고 필호 씨의 사랑이 변하지는 않겠지요?”
“내 사랑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도애 씨가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입니다.”
필호는 곧 중국으로 가려 한다는 자신의 계획을 털어 놓았다. 그리고 당연히 도애도 함께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도애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덧붙이는 글 | 이 소설은 짝수일과 31일에 게재됩니다.
소모적인 친일청산 논쟁보다는 극일에 성공한 매혹적인 영혼들의 삶과 사랑을 그림으로써, 식민지 역사를 로맨틱하게 청산하고자 하는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