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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일찍 길을 나섰다. 고적한 산사라고 칭하기에는, 너무 유명한 범어사 일주문 지나, 잿빛 승복을 입은 노(老)보살님께 청룡암을 여쭈니, 그런 암자가 여기 없다고 한다.

바위의 자력이 그의 시를 찾는 나침판이었네.
▲ 범어사 바위에 새긴 '이안눌의 시' 바위의 자력이 그의 시를 찾는 나침판이었네.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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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암은 암자가 아니라 바위. 그 바위에 새겨진 이안눌의 '오언율시, 칠언절구'의 시(詩)는 한자의 뜻 그대로 풀이하면 언어로 지은 절 한 채. 큰 바위는 산 속의 절 한 채. 금정산 속의 절 한 채, 범어사 경내를 두리번 살피니, 지장전 옆에 큰 청룡암이 있다. 

동래부사를 지낸 바 있는 이안눌(1571-1637) 시인의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이며, 시호는 문혜(文惠). 1599년(선조 32)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형조 ·호조의 좌랑을 역임하고 예조좌랑이 되어, 서장관(書狀官)으로 진하사 정광적(鄭光積)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다고 한다.

청룡암에 새긴 이안눌의 시
▲ 범어사 지장전 옆에 있는 청룡암에 새긴 이안눌의 시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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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부사를 거쳐 1623년 인조반정 때 예조참판이 되었으나, 조정의 일에 시비를 가려 극언하다 고관들의 미움을 사는 바람에 사직했다가, 청나라 사신이 사문(査問)하러 왔을 때, 다시 실언해, 북변으로 귀양가야 했다.

정묘호란 때는 왕의 피난처인 강화부유수로 있다가, 다시 형조참판 ·함경도관찰사를 지내고, 1632년(인조 10) 주청부사로, 명나라에 가서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원종(元宗)이라는 시호를 받아왔다고 한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을 남한산성에서 호종하고, 죽은 후 청백리에 녹선되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시문과 글씨가 뛰어나, 이에 혹자들은 그를 이태백(李太白)에 혹은 두보에 비유되기도 한 그의  문집에는 <동악집>이 있다.

문신과 같은 동악 이안눌의 시
▲ 바위 엉덩이에 새긴, 문신과 같은 동악 이안눌의 시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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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 열중한 계기는 18세에 진사시에 수석하여 성시(省試)에 응시하려던 중 동료의 모함을 받아 과거 볼 생각을 포기하고 있을 때, 마침 동년배인 석주 권필(權韠)과 선배인 윤근수(尹根壽)·이호민(李好閔) 등과 동악시단(東岳詩壇)이란 모임을 열었다.

범어사 청룡암에 '오언율시, 칠언절구'를 새긴 이안눌은 1609년에 동래부사를 지내고 있었다. 이른바 이 시기는 조선시대 한시(漢詩)의 목릉성세(穆陵盛世)였는데, 특히 '동악시단'의 석주 권필(1569-1612)과 이안눌은 시의 쌍벽을 이루었다 한다. 이안눌 시인은 두보의 시를 만독(萬讀)을 했다고 한다. 이에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지장전 곁에 있는 청룡암
▲ 범어사 지장전 곁에 있는 청룡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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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水李居士 (덕수이거사)덕수 사람 이 거사
萊山晶上人(내산정상인)동래 사람 혜정상인
烟霞一古寺(연하일고사)안개 속 한 옛 절에
丘壑兩閑身(구학양한신)산수 즐기는 한가한 두 사람
掃石苔粘屐(소석태점극)바위 밟으니 신발에 이끼 푸르고
觀松露塾巾(관송로숙건)소나무 보느라 두건에 이슬 젖는다
蒼崖百千劫(창애백천겁)수만 겁 내려온 푸른 바위에
新什是傳神(신십시전신)이제 새로이 문장을 새기네
- 청룡암에 새긴 이안눌 '오언율시'

시는 바위보다 불멸하다
▲ 바위속에 '시 한 채' 시는 바위보다 불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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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崖苔逕入烟霞(석애태경입연하)바위 벼랑 이끼 낀 길은 안개 속으로 접어들고
坐倚松根看夕暉(좌의송근간석휘)소나무 뿌리에 기대 앉아 석양을 바라본다
蜀魄一聲山寂寂(촉백일성산적적)접동새 한 마리 우는 소리에 산은 적막하고
轉頭三十九年非(전두삼십구년비)돌이켜 생각하니 삼십구년 내 인생 어리석구나
- 이안눌의 '칠언절구'  

이안눌
▲ 해운대 올라 이안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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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을 얻으면 경제일세(經濟一世)하고, 뜻을 잃으면 은둔한거(隱遁閑居)한다"는 의지를 가지고 그는 살았다고 한다. 시작(詩作)에 주력하여 동악 문집에 무려 4379수라는 방대한 양의 시를 남겼으면서도, 창작에 매우 신중해서 일자일구(一字一句)도 가벼이 쓰지 않았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 동래부사로 부임한 시기에 지은 <동래사월십오일 東萊四月十五日>은 사실적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절실한 주제와 기발한 시상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국란을 두 차례나 거친 그가 여러 지방을 옮겨 다니면서 지은 시편들은, 지방의 민중생활사 및 사회사적 자료의 가치가 높다고 한다.

동악 이안눌 동래부사 그가, 신라시대 해운 최치원 시인 이후, 최고의 시인이란 칭송과 함께, 대한팔경 해운대에 시비가 같이 있다는 점도 매우 큰 의미가 부여된다.

호추도압강(胡雛渡鴨江)   오랑캐 새끼들 압록강을 건넜다
선등의주함(先登義州陷)   먼저 의주로 올라 함락하고
직도곽산항(直擣郭山降)   바로 곽산을 처 항복 받았다
파죽공삼로(破竹空三路)   파죽지세에 세 길은 모두 비고
분파동일방(奔波動一邦)   달아나는 물결이 온 나라를 울린다
고신우령하(孤臣羽嶺下)  외로운 신하는 우령 고개 아래에서
발검대한강(拔劍對寒釭)  칼을 뽑아들고 차가운 촛대를 마주보노라
- 정월이십일무자야좌구호(正月二十日戊子夜坐口號) '이안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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