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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어제 거부권을 행사했다. 국회에서 여야가 합의 처리한 학교용지부담금환급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한 것이다. 이번이 6번째다. 첫 여소야대 시절이었던 13대 국회 때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와 같은 기록을 세웠다. 정부조직법 개편안이 어떻게 통과되느냐에 따라서는 최다 기록 경신이 이뤄질 수도 있겠다.

 

노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법률로는 한나라당이 추가로 제출한 대북송금특검법과 노대통령 측근 비리 특검법 등 특검법 2건을 비롯해 대통령 사면권 제한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사면법 개정안 1건, 거창 사건 관련자 명예회복 특별조치법과 일제 강점하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 등 과거서 관련 법 2건, 그리고 이번 학교용지부담금 환급법 1건 등이다(사면법 개정안과 거창사건 명예회복 특별조치법에 대해서는 고건 대통령 직무대행이 거부권을 대신 행사했다).

 

이들 거부권이 행사된 법률 가운데 노 대통령 비리 특검법 1건만 국회에서 재의결돼 공표됐다. 일제 강점하 국외 강제 동원 희생자 지원법은 정부 안대로 수정돼 통과됐고, 16대 국회 말에 의결된 사면법 개정안에 대한 재의결은 탄핵 정국에서 이뤄지지 못했지만, 17대 국회에서 유사한 내용으로 개정안이 통과됐다. 거창사건 명예회복 특별조치법과 추가 대북송금특검법은 폐기됐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처럼 거부권을 비교적 자주 행사한 것은 노 대통령이 국회 입법권에 대해 상대적으로 까다롭게 대응한 것으로 볼 수 있겠지만, 원초적으로 국회가 자초한 측면이 크다. 뻔히 거부권이 행사될 것을 예상한 정치공세적 입법이었거나 졸속 입법이 많았기 때문이다.

 

대북 송금 특검법이 이미 통과된 가운데 한나라당이 추가로 통과시킨 대북송금특검법안은 처음부터 폐기될 운명이었다. 일제 강점하 강제동원 희생자 지원에 관한 법률 같은 경우는 대표적 졸속 입법 사례였다. 국회 심의과정에서 희생자 단체까지도 반대한 '생존자 보상' 규정을 일부 의원이 생색내기 차원에서 끼워 넣은 것이 문제가 됐다. 결국 이 조항을 삭제한 수정법률안을 통과시켰다.

 

거창사건 명예회복 특별조치법은 거창 사건 피해자에 대한 보상 규정이 문제가 됐다. 정부는 6·25전쟁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첫 입법 선례가 되고, 향후 민간인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에 막대한 재정적 부담이 예상된다면서 거부권을 행사했다.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사안이었지만, 당시 정국이 탄핵정국이어서 결국 국회에서도 제대로 논의되지도 못한 채 폐기됐다.

 

노 대통령이 이번에 거부권을 행사한 학교용지부담금 환급 특별법의 쟁점은 크게 두가지다. 하나는 소급입법의 문제다. 학교용지부담금환급특별법은 2001부터 시행된 학교용지부담금제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마련된 특별법이었지만, 헌재의 위헌 결정 이전에 징수된 학교용지부담금에 대해서도 환급토록 하고 있다. 헌재 결정의 소급효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만약 이런 소급효를 인정할 경우 토지초과이득세 등 위헌 결정이 난 다른 사안과 형평의 문제가 있으며, 앞으로 위헌 결정이 날 때마다 소급효를 적용해줄 경우 엄청난 사회적 혼란이 야기될 수 있다는 점을 거부권 행사의 이유로 들었다.

 

거부권 행사의 또 하나 이유는 학교용지 부담금은 지방자치단체가 징수했는데, 환급은 중앙정부가 하도록 하고 있는 점이다. 당초 법률안에는 지방정부가 환급해주도록 돼 있었지만, 법사위 심의과정에서 환급 주체가 중앙정부로 바뀌었다. 지방정부의 열악한 재정 사정을 감안한 것이라는 게 법사위 의원들의 이야기이지만, 한마디로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다. 내 돈 아니라고, 국민 세금을 쌈짓돈 취급한 셈이다.

 

국민 세금 '쌈짓돈 취급' 거부... 보도할 가치 없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13일) 노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관심을 보인 신문은 거의 없었다. <동아일보>와 <한겨레> 정도가 해설 기사를 싣는 등 관심 있게 보도했을 뿐이다. <동아일보>는 특히 노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관련 기사를 1면에 비중있게 배치한 데 이어 해설기사를 통해 쟁점을 비교적 자세하게 분석했다.

 

<동아>의 정성희 논설위원은 논설위원들이 돌아가며 쓰는 기명칼럼 ‘횡설수설-학교용지부담금 파동’에서 학교용지부담금 환급 특별법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노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것은 ‘타당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국회의원들이 지역 주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앞뒤가 맞지 않는 무리한 입법을 강행했다는 분석이다. 국회의원의 ‘자질’과 ‘입법능력’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한겨레>는 노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대한 한국납세자연맹의 반발 기류 등 이 문제를 둘러싼 사회적 쟁점과 논란을 전했다. 소급 입법의 문제와 피해 구제의 충돌, 법을 지켜 학교용지부담금을 낸 사람들만 결과적으로 피해를 보게 되는 문제, 또 아파트 신축 지역 등에 학교 신설 수요가 집중되고 있는 반면 부족한 교육 재정의 문제 등을 종합적으로 조망했다.

 

하지만 다른 신문들은 임기를 얼만 남기지 않은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 말 투정 정도로 치부했는지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조선일보> 같은 경우는 사회면에 2단 기사 정도로 간략하게 보도했다. 몇 신문은 아예 보도도 하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임기를 10여일 앞두고 거부권을 행사했다는 점에서라도 주목할 만 했다. 특히 학교용지부담금 환급법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쟁점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언론으로서는 더욱 관심을 가질 만 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이기에 퇴임을 10여일 앞둔 대통령이 거부권까지 행사했을까 한번쯤 생각할 법도 할 터인데, 그러지 않는다. 도대체 얼마나 중요한 일들에 몰두하고 있기에 그런 것일까?

 

숭례문 화재를 통해 한국 사회의 속이 참으로 부실하다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당연히 관심을 갖고 살펴보아야 할 일들인데도 대충 넘어가는 세태가 그런 부실을 키운 주범일 것이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마저 기사가 되지 않는 신문 지면이나, 정치적 논의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정치권의 행태야 말로 그 단적인 사례라 할 만하다.


태그:#대통령 거부권 행사, #학교용지부담금,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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