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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그냥 그 자리에 서있고 싶었는데

날 지켜주지 못한 당신들이 죄인입니다.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임금에 항거하다 바로 눈앞에 효수된 자가

충(忠)인지 적(賊)인지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말없이 지켜보는 백성들이 다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치마폭에 휩싸인 군주에게 곧은 소리하다 능주로 귀양 가던 자가

나를 통과 하며 내뱉던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말없이 살아가는 무지렁이들이 다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적이 부산포에 상륙했다는 소리에 허겁지겁 의주로 줄행랑 친

나랏님을 조롱하던 시정잡배의 비웃음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비웃음의 참뜻을 아랫것들이 다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랑캐라 멸시하던 청군에 쫓겨 허둥지둥 나를 빠져 나가던 임금이

용렬한 왕인지 성군인지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말없이 살아가는 민초들이 다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장에서 붙잡혀온 장수가 창덕궁에서 치도곤을 당하고

백의종군 하러 단기로 나를 지나면서 읊조리던 말.

“신에게는 아직도 열 두 척의 배가 있나이다.”

처음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다음에 알았습니다.

 

 

이 땅을 강점한 일제가 내 팔을 잘라내고 전찻길을 놓던 날.

아픔에 겨워 눈물이 나왔지만 꾹 참았습니다.

그들이 물러가던 날의 기쁨을

이 땅의 주인들과 함께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큰 놈들의 싸움에 대신나서 형제간에 박 터지게 싸우며

불을 뿜는 쇠뭉치가 내 옆을 지나갈 때

붙잡고 싶었지만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손을 마주잡고 참회의 눈물을 흘릴 날이 올 거라 믿기 때문입니다.

 

한강 인도교를 건넌 일단의 무리들이 내 옆을 지나갈 때

그들이 귀신 잡는 군대인지 백성 잡는 악당인지 알고 있었지만

나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남산에 끌려가지 않은 사람들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챙겨주어야 할 위인이 읊조리던 거시기 답사기 타령이

가락도 좋고 추임새도 좋고 볼품도 있었지만

그 소리가 빈 소리라는 것을 나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라를 도적질한 적당들은 편하게 잠들도록 순라꾼을 풀어놓고

홀로 서있는 나를 지켜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고관대작 나으리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이름 없는 만백성이 지켜 주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바보같이 살아왔습니다.

 

마지막 가는 내 모습을 지켜봐주어 대한궁민 여러분 고맙습니다.

구십 여대 영구차와 번쩍이는 조명이 과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화장인지 수장인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불구덩이에서 몸부림치며 흘린 눈물은 뜨거워서가 아닙니다.

탁한 공기 마시며 그 자리에 그렇게 서있고 싶었는데

당신들이 가라하시니 서러워서 흘린 눈물입니다.

켜켜이 쌓인 세월의 흔적을 보여줄 수 없어 흘린 눈물입니다.

 

바보같이 살아온 나에게 폭포수 같은 눈물을 쏟게 한

이 땅에 살고 있는 당신들이 죄인입니다.


#남대문#역사#숭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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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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