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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림사지 가는 길

 

 

경덕왕릉에서 35번 국도로 나올 때는 용장리로 난 길을 찾는 게 좋다. 이 길은 직선으로 나있을 뿐더러 용장리에서 바로 35번 국도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용장리에서는 남산을 오른쪽으로 끼고 시내로 들어가는 35번 국도를 타면 금방 포석 마을 앞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곳에서 창림사 가는 길을 찾기는 쉽지가 않다. 창림사지 가는 길이 잘 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창림사지는 나정 쪽에서 들어갈 수도 있고 포석 마을에서도 들어갈 수 있다. 시내 쪽에서 오면 나정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우리는 경덕왕릉을 구경하고 배리 삼릉 쪽에서 오는 길이어서 포석 마을로 들어간다. 그런데 마을 안에서 왼쪽으로 가는 정확한 길을 몰라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본다.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는 집을 왼쪽으로 돌아가라는 설명을 듣는다.

 

 

이 길은 창림사지 앞을 지나 남간사지로 이어지는 일종의 농로다. 남간사지 당간지주를 보고 찾아갔어야 하는 건데 그때 깜빡 잊어 이제야 답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길이 좁아 최운철 선생의 차 뒷바퀴가 잠깐 논에 빠지기도 했다. 다행히 금방 나올 수 있어 우리는 창림사지로 향한다. 창림사지에 가기 위해서는 길 한쪽에 차를 주차하고 걸어가는 수밖에 없다.

 

동쪽으로 언덕이 보이는데 그 안에 창림사지가 있다는 설명을 이곳 관리인으로부터 듣고 논길을 따라 100m쯤 올라간다. 논 가운데 널려 있는 탑재들을 통해 이 주변이 옛날 큰 절터였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언덕을 약간 올라가니 평지가 나타나고 그곳에 묘가 몇 기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쌍귀부가 기어가는 모습을 하고 있다. 귀부는 대개 비석 받침으로 쓰이는데 비석이 사라진 지 오래 되었는지 등의 받침 부위가 둥글둥글하다.

 

 

이제 쌍귀부는 비신도 없이 머리마저 잘린 채 외로이 남쪽으로 기어가고 있다. 앞의 네 발 중 가운데 두 발은 앞으로 가기 위한 건지 헤엄치기 위한 건지 뒤로 젖히는 모습이다. 뒷발은 귀갑 속에서 조금 나오게 표현되어 있다. 거북이 등의 6각형 장식도 세월의 흐름 속에서 희미해졌고 이끼까지 끼어 오히려 친근해 보인다. 그러나 과거에 있었을 비석이나 이수 그리고 절과 관련된 문화재 친구들이 모두 사라져 버린 지금 쌍귀부는 아주 외로워 보인다.

 

이러한 쌍귀부는 숭복사 비석과 무장사 비석에도 나타난다. 숭복사 비석은 원성왕(785-798)의 비석으로 알려져 있고 무장사 비석은 소성왕(799-800)의 비석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8세기 후반에 쌍귀부가 많이 만들어졌고, 창림사 쌍귀부도 8세기 후반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 창림사비는 어디로 간겨?

 

 

그렇다면 이 쌍귀부가 사라진 창림사비(昌林寺碑)를 받치고 있었을까? 연구자들에 따르면 이 쌍귀부 위에 신라의 명필 김생이 쓴 창림사비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창림사비 비신은 현재 사라져 없고 그 파편 한 조각만이 남아 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파편을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고, 책을 통해 그 탁본을 볼 수 있었다. 탁본에 보면 삼계(三界), 세존(世尊), 본국(本國) 등의 단어가 나온다. 이를 통해 창림사비는 불교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성해응(成海應: 1760-1839)이 편찬한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외집 권 61, ‘고려비(高麗碑)’ 편에 따르면 창림사비는 금오산 기슭 신라의 왕궁터에 세워진 창림사의 비석이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창림사비와 김생의 관계 그리고 김생에 대한 중국의 평가 등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창림사비는 경주 금오산 기슭에 있다. 신라시대 궁궐터가 있던 곳이다. 후에 그 땅에 절을 세웠는데 지금은 사라졌다. 옛날 비석의 글자를 찾을 수 없다. 원의 학사인 조자앙이 창림사비 발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오른 쪽에 신라 김생이 쓴 글씨가 있다. 이것이 창림사비인데 자획이 깊이가 있고 전형적인 모습이다. 비록 당나라 사람의 유명한 각자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 낫지 않을 것이다. 옛 말에 이르기를 어느 땅엔들 인재가 나지 않으리오. 맞는 말이다.’(昌林寺碑 慶州金鰲山麓 有新羅時宮殿遺址 後人卽其地建寺 今廢 古碑亦無字 元學士趙子昂昌林寺碑跋云 右唐新羅金生所書 其國昌林寺碑字畫 深有典刑 雖唐人名刻 無以遠過 古語云何地不生才 信然)”

 

위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창림사비는 김생의 글씨로 인해 더 유명해졌다. 김생(711-791)은 왕희지의 필법을 토대로 그만의 독툭한 서체를 개발했다. 그래서 그는 해동 서성이라 불렸으며 예서 행서 초서에 아주 능했다. 그의 필명은 당나라에까지 알려졌으며 원나라 때 조맹부(호: 자앙)까지 그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김생의 흔적은 전국에 걸쳐 있는데, 충주시 금가면의 김생사, 봉화군 청량사의 김생굴 등이 대표적이다. 현재 충주에는 김생연구회가 있어 김생의 필법을 복원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 결과 2005년에는 『김생서법자전』을 펴내기도 했다. 이 책은 전국의 비석과 서첩에서 김생의 글씨를 집자해 가나다 순으로 정리한 김생서법 사전이다.

 

창림사지 3층석탑은 신라 하대를 대표한다

 

쌍귀부를 보고 3층석탑을 보기 위해 산길을 따라 올라간다. 길 양편으로 건축에 쓰였을 것 같은 주춧돌 받침과 기둥받침 등이 보인다. 이러한 석재들로 봐서 이곳에는 법당이나 누각 등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한 옆에는 조각을 하지는 않았지만 모나게 자른 돌들이 있는데 이것 역시 건축 부재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들을 지나 동쪽으로 한 50m쯤 올라가면 소나무 사이로 웅장한 삼층석탑이 나타난다. 이런 숲 속에 이런 정도의 삼층석탑이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창림사지 삼층석탑은 용장사지 3층석탑이나 남산리 3층석탑에 비해 훨씬 더 크고 웅장하다. 이중 기단 위에 세워진 삼층석탑으로 상륜부가 훼손된 현재의 높이가 7m나 된다. 이를 세분해 보면 하층 기단이 0.52m, 상층 기단이 1.5m, 1층 옥신이 1.8m, 2층 옥신이 0.8m, 3층 옥신이 0.6m쯤 된다. 나머지는 세 개 층의 옥개석으로 이들의 합이 1.8m쯤 된다.

 

 

이 삼층석탑은 또한 기단부에 네 개의 팔부중상이 남아 있고, 1층 옥신부에는 여닫이문에 두 개의 문고리 조각이 있어 예술적으로도 대단히 아름답다. 원래는 4면에 두 개씩 총 8개의 8부 중상이 있었으나 현재는 서쪽의 천과 가루라, 남쪽의 아수라, 북쪽의 마후라가만이 남아 있다. 이들 조각은 근육의 움직임, 천의 흩날림까지 표현하여 생동감이 있고, 높은 돋을새김으로 되어 있어 양감이 풍부하다.

 

1층 옥신부 사방에는 양쪽으로 열 수 있는 여닫이문을 새겨 넣고 문에 동그란 문고리 모양을 해달았다. 그리고 1층 옥신부 윗면에 둥글게 파인 사리공(舍利孔)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옥개석으로 덮여 있어 확인할 수 없다. 이 탑은 1824년 도굴되는 과정에서 ‘창림사 무구정탑원기(昌林寺 無垢淨塔願記)’가 나왔으며, 그를 통해 이 탑이 855년(문성왕 17) 건립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추사 김정희의 글을 통해 알려졌다.

 

     

이곳에는 현재의 삼층탑보다는 규모가 작은 또 하나의 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이곳에서 수습되어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진 팔부중상들을 통해 확인된다. 긴나라, 가루라, 야차상이 발견되었는데 이들의 크기가 현지에 있는 삼층석탑의 팔부중상보다 조금 작다고 한다. 만약 법당과 석탑이 훼손되지 않았다면 창림사는 지금도 약간 높은 언덕에서 우리에게 웅장하면서도 경건한 모습을 보여주었을 텐데 아쉽기 이를 데 없다.

 

이별의 시간이다

 

창림사지 삼층석탑을 보고 우리 일행은 언덕을 내려와 차로 향한다. 내려오면서도 아쉬워 자꾸자꾸 뒤를 돌아본다. 경주 남산 완전정복을 마감해야 하기 때문이다. 4일 동안 정말 남산을 구석구석 찾아 다녔지만 실제로 본 것은 전체의 60% 정도밖에는 되지 않는 것 같다. 물론 지정문화재만을 따진다면 70-80% 정도는 본 셈이다. 보물 13점은 모두 보았고, 사적 13개소 가운데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은 남산성과 천관사지 정도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문화유산을 본 방법이 여유를 가지고 세부적으로 관찰하는 방식이 아니고 주마간산 식이어서 아쉬움이 많다. 차를 타고 버스 터미널로 향하면서도 우리는 그동안 느낀 보람과 아쉬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래도 모두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최소한의 경비로 최대의 효과를 냈다는데 동의하면서.

 

 

무엇보다도 이번 답사를 계획하고 진행한 '광나루', 코스를 안내하고 문화재를 설명한 '동해의 푸른 바다', '뜬구름', '매꾸러기', 총무를 맡아 금전 출납을 담당한 '여유와 낭만'의 분업은 정말 답사만큼이나 완벽했다. 그래서인지 경주 버스터미널 앞에서 헤어지면서 모두 작별을 아쉬워한다. 회자정리 거자필반.

덧붙이는 글 | 경주 남산 답사를 이번 20회로 마감한다. 그동안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린다.


태그:#창림사지, #쌍귀부, #창림사비, #김생, #창림사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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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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