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월 17일 주말을 맞아 종묘는 사람들로 붐빈다. 연인에서부터 일본인 관광객까지.

 

마침 이날은 매섭던 추위가 한 풀 꺾인 날이어서 그런지 가족단위 관람객들이 유난히 많았다.

 

호기심이 많은 아이들은 부모 손을 놓기가 무섭게 이곳 저곳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고 눈 한가득 호기심을 담고 이리저리 기웃거린다.

 

"향로? 이게 뭐지?"

 

관람객이 궁금해 할 찰나, 막힌 데 없이 설명을 '술술' 늘어놓는 이가 나타난다. 바로 종묘안내 지도위원 이상하(72)씨다.

 

언뜻 보기에는 종묘공원에 있는 다른 평범한 어르신과 달라 보이지 않지만 말하는 걸 듣노라면 그 지식이 범상치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문화재안내 지도위원'으로, 담당구역인 종묘를 관람객들에게 설명하고 안내하는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야, 종묘안내 지도위원!

 

65세 이상 노인들의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문화재청에서 운영하는 '문화재안내 지도위원'은 매년마다 까다로운 심사와 면접을 통해 뽑는다. 올해 2년째 운영되고 있으며 서울·경기권의 '궁'과 '능'에서 활동하고 있다.

 

종묘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상하씨는 올해로 2년째 근무하는 베테랑 지도위원이다. 작년에는 창경궁에서 근무했는데 근무배치가 달라지면서 올해 종묘로 오게 됐다. 현재 종묘에는 이씨를 포함한 두 명의 지도위원이 활동하고 있다.

 

이씨가 담당하고 있는 곳은 제사예물을 보관하는 '향대청'. 현재 종묘제례 의식을 담은 상영물이 상영되는 등 '홍보관'으로서의 역할도 함께 하고 있다. 제사 때 쓰는 제기 등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삼엄한 관리가 필요하다. 그래서 이씨가 전담해서 오전부터 오후까지 맡고 있다. 

 

 

"거기 밟고 가면 안 돼요."

 

이씨가 갑자기 어린이 관람객들을 불러 세운다. 알고 보니 어린이들이 밟고 서 있는 곳이 향로(香路)인 것. 향로는 종묘제례 때 향과 축문을 모시는 길로 향대청 입구에 전석으로 깔려 있다.

 

언뜻 보기에는 돌을 깔아놓은 것으로 보이지만 알고 보면 '존엄'을 나타내기 위해 다른 길과 차별을 둔 것으로 아무나 밟고 다니지 못하게 한 것이라고 한다.

 

이씨는 어리둥절해 하는 아이들을 부른 뒤 설명이 적혀있는 안내판을 읽게 한다. 아이들이 또박또박한 음성으로 읽어내려 가자 이씨가 설명을 덧붙인다. "존엄한 길인 만큼 아무나 밟을 수 없게 한 것"이라며 "이것도 역사의 하나"라고 설명한다.

 

그제야 아이들은 그 이유를 알고 고개를 끄덕인다. 설명문을 직접 읽고 이씨에게 설명까지 들으니 향로가 무엇이고 왜 밟으면 안 되는지 알게 된 것이다.

 

주 5일 매일 출근…쉬는 이틀은 '한글수업' 강사까지

 

점심시간을 제외하고 아침 9시부터 저녁 5시까지 이씨는 꼬박 이곳에서 근무한다. 종묘가 문을 닫는 화요일과 본인이 하루 쉬는 목요일을 제외하고는 매주 5일을 향대청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만큼 외국인들도 많이 찾는 종묘. 이날도 먼 곳에서 온 일본인관람객들이 눈에 띄었다. 이씨는 향대청에 있으면서 외국인들이 찾으면 직접 설명을 해준다. 영어는 물론 일본어도 문제없다.

 

알고 보니 그는 "35년 간 영어교사로 교직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도 쉬는 날이면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글교육을 한다"고 한다. 문화재 지도위원 일부터, 강사 일까지. 웬만한 젊은 사람 못지않은 열정과 부지런함이다.

 

그가 한글교육을 하는 곳은 '메릴랜드대학교 아시아분교'다. 교육생들 중 98%가 주한미군으로 "군복무를 하면서 학점을 얻을 수 있게 돼 있다"고 한다. "이수한 학점은 미국대학에 가서도 학점으로 인정되기에 욕심 있는 학생들은 40학점까지 얻어간다"고 한다. 그가 맡은 한국어 수업은 인문과목에 해당하는 수업이다.

 

문화재해설 지도위원 일을 하면서 그나마 쉬는 날인 화요일과 목요일마저도 일을 하다니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에게 "힘들지 않으냐"고 물으니 "84년부터 강사로 활동했다"고 말한다. 그런 그가 내민 명함을 보니 이름 옆에 '부교수'라 쓰인 직함이 눈에 띈다. "20년 넘게 해오고 있는 일이어서 교사 정년퇴직을 한 후에도 틈틈이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외국인들에게 역사 바로 알리고 싶어 시작

 

그렇다면 그가 문화재해설 지도위원에 관심을 갖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을 설명하는 게 참 중요한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년퇴직을 한 후 할 일이 없던 그는 인천국제공항 통역 자원봉사를 5년간 하고, 청계천 공사 때 외국인들에게 안내를 하는 일도 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안내사 대부분이 외국인들이 오면 기피했다"며 "한국의 역사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고 느껴 "공고를 보고 문화재해설 지도위원에 응시했다"고 한다. 서류전형과 면접을 거쳐 합격한 그는 창경궁을 시작으로 올해 종묘까지 오게 됐다.

 

자신의 일에 대해 그는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역사를 바로 알아야 다른 이에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 그가 배움을 얻는 곳은 주로 책이다. 일주일에 두 세권을 읽는 그는 "작년부터 조선왕조실록을 읽고 있다"고 했다.

 

"영조 숙종 때부터 5대왕까지 모두 읽었고 올해 목표가 독파하는 것"이라며 "올해 근무처가 바뀐 후에는 주춤해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도 독서에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은 "알면 알수록 부족한 게 드러나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얘기하는 내내 "배워야 한다"는 말을 강조한다.

 

 

숭례문 화재는 미국의 9·11테러에 버금가는 아픔

 

"숭례문 화재는 정말…기가 막혀요…기가 막혀서 참…."

 

얼마 전, 온 나라를 들썩이게 한 숭례문 화재에 대해서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기가 막히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리고 "이번 화재를 저지른 범인이 창경궁에서 일하기 3개월 전, 일어났던 화재의 주인공"이라며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했다.

 

"기가 막힐 노릇이죠. 창경궁에서 벌써 일을 저질러 벌금을 물었던 전과가 있는 사람인데 주의해서 지켜봤어야죠. 사후관리는 도대체 어떻게 했는지 기가 막힐 따름입니다."

 

그는 '기가 막히다'는 말을 두세 번 했다. 그리고 최근의 일화를 들려주며 속상하단 말도 덧붙였다. 삼일 전 그는 대학교에 한국어 수업을 하러 갔다고 한다. 그때 "미군 학생이 숭례문 일에 대해 물었다"며 "숭례문 화재로 우리가 느낀 충격은 너희들이 9·11 테러 때 느낀 슬픔과 같을 것"이라 설명했다고 한다.

 

비록 인재는 없었지만 600년이 넘는 역사가 송두리째 날아갔기 때문이다. 특히나 문화재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그에게 이번 사건은 더더욱 마음이 아플 수밖에 없다. 그 일이 생긴 후부터 종묘의 관리체계도 더욱 엄격해졌다. 하지만 그는 "근본 문제부터 바로 잡는 게 우선"이라 말한다.

 

"지방분권이 된 후로 각 지자체에 문화재를 관리하도록 했는데 국가에서 나서서 해야 될 일이 아닌가요?"

 

그는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관리를 하고 책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문화재에 대한 국민들의 의식도 중요하다고 했다.

 

"가끔 단체 관람객들이 많이 오는데 학생들의 경우 소란스럽게 하거나 이것저것 만져서 문화재를 훼손하는 경우가 많다"며 "하루 전 오리엔테이션을 하는 등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교사들의 역할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 것'을 소중히 하는 마음. 이씨가 강조하는 것 중 하나다.

 

사극 보는 것도 역사 공부

 

"전 참 욕심이 많아요. 살아오는 동안 제대로 산 게 맞을까 의문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 나이가 돼도 공부를 하려고 하는 것이겠죠. 앞으로 역사 공부를 열심히 해서 사람들에게, 외국인들에게 우리 것을 알리고 싶습니다."

 

그는 요즘 집에 가면 사극을 빼놓지 않고 본다. 당시의 역사를 고스란히 알 수 있고 또 다른 배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런 그를 보며 왜 욕심이 많을 수밖에 없는지 알 것 같다. 한국의 역사에 관심이 깊기 때문에 배우고 또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일흔 두 살. 역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제2의 인생'을 열심히 설계해 나가는 그를 보며 숭례문 화재의 아픔이 좀 가시는 듯했다. 

덧붙이는 글 | 김정미 기자는 <오마이 뉴스> 7기 대학생 인턴기자입니다.


태그:#문화재, #종묘, #향대청, #숭례문화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