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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대사들

 

곤궁에 빠져 있으면서

구걸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는

곤궁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선을 위해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다.

 

현대 사회는 거지를

게으름뱅이나 비렁뱅이라고 부르며

발가락의 때처럼 여긴다.

 

그러나

예전에 그리스 사람들은

곤궁한 사람을

신이 보낸 대사라고 말하곤 했다.

 

당신이 게으름뱅이나 거렁뱅이라는 이름으로 불릴지 모르지만

사실은 당신은 하느님의 대사다.

 

하느님의 대사로서

당신은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당연히 음식과 옷과 거처를 받아야 한다.

 

이슬람교의 선생들은 하느님께서 환대할 것을 명령하신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환대는 이슬람 국가에서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국가에서는

환대의 의무를 가르치지도 않고 실행하고 있지도 않다.

 

- 피터 모린

 

인천 화수동에 가면 '민들레 국수집'이 있습니다. 좀 길지만 민들레 국수집 누리집에 적혀 있는 인사말을 옮겨 보겠습니다.

 

민들레 국수집은 배고픈 사람에게 동정을 베푸는 곳이 아니라 섬기는 곳입니다

열 사람이 앉으면 꽉 차버리는 작은 식당이지만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곱 시간 동안에는 찾아오신 분들이

맛있게 식사를 하실 수 있는 곳입니다.

매주 토, 일, 월, 화, 수 닷새 동안 문을 열고 목, 금요일에는 쉽니다.

매일 150~300 여명 분의 식사를 대접하고 있습니다.

두세 번 오셔서 식사할 수도 있습니다.

간단한 뷔페식입니다.

비록 민들레 국수집에 십자가가 벽에 걸려 있지만

찾아 오신 분이 마음에도 없는 기도는 하지 않아도 좋고, 잘 살아라, 일해라는 잔소리를 하지 않는 곳입니다.

가난하고 배고픈 이들의 작은 쉼터!

 

이 인사말 뒤에 바로 앞에 적은 피터 모린의 짧은 잠언과도 같은 에세이가 이어져 실려 있습니다. 피터 모린은 도로시 데이와 함께 1933년 5월 1일(노동자의 날May Day)에 2500부의 <가톨릭노동자> 신문을 창간하면서 미국 가톨릭노동자운동을 시작한 사람입니다. 누구나 쉽게 사보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1페니를 받고 판 이 신문은 2년 뒤 15만부를 발행하게 됩니다.

 

피터 모린은 이 신문에 무운시(無韻詩) 형식으로 당대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모든 주제에 대해 자신의 생각과 신념을 <읽기 쉬운 에세이들>이라는 이름으로 계속해서 발표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대사들'도 이 가운데 하나입니다.(피터 모린, <푸른 혁명>, 공동선 참조)

 

피터 모린과 도로시 데이는 걸인이나 노숙자나 여행자나 그 어느 누구도 돈이 없다고 업신여김 당함이 없이 환영받으며 먹고 잘 수 있는 '환대의 집'을 설립하였고 이같은 우애와 환대의 집은 전국 각지로 퍼져 갔습니다. 민들레 국수집은 말하자면 우애와 '환대의 집'입니다.

 

풍요의 시대, 극단의 양극화

 

오늘날 한국은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 역사상 최대로 풍요로운 시절을 마음껏 구가하고 있는 중입니다. 거리에는 갖가지 상품들이 넘치고 넘칩니다.

 

그런데 그런 풍요로운 세상에 오히려 우리 주위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굶주리는 극빈층의 사람들만도 150만 명이 넘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깜짝 놀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북한도 아니고 한국에서 굶주림이라니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시면 쌀 한 포대 들고 민들레 국수집에 한 번 가보시면 됩니다.

 

집도 절도 없는 노숙자는 말할 것도 없고 움막이나 도저히 집이라고 할 수 없는 주거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입니다.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차상위 빈곤계층까지 합하면 무려 700만 명이 이런 극한의 나락에 떨어져 있습니다. 여기에 비정규 노동자들이 거의 900만 명입니다.

 

한국 사회는 풍요와 굶주림이 동시에 존재하는 극단의 양극화 사회인 것입니다. 아니 그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극단의 노예사회입니다. 살기 위해서는 오로지 돈을 벌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 몸도 마음도 영혼까지도 송두리째 팔아야만 하는 사실상의 노예사회입니다. 그러다보니 나 이외에는 돌아볼 여유도 마음도 다 빼앗겨버린 살벌한 심성만이 남아버렸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는 공동체가 해체되어 버린 사회입니다.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오던 전통 농업 사회, 마을 공동체는 말할 것도 없고 도시에서는 아예 이웃이 누구인지조차 모르고 삽니다. 대가족은 옛말이고 핵가족조차도 해체되어 가고 있는 중입니다.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사건 사고는 공동체 정신이 해체된 사회, 만인의 만인에 대한 살벌한 경쟁과 오로지 시장논리만이 판치는 사회에서 배태된 필연의 어긋난 몸부림 결과입니다.

 

우리는 진실로 이런 우리의 현실을 바꾸어야 합니다. 외면하지 않으면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극빈의 이웃들이 있는, 나날이 자신의 양심을 속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끔찍한 이 사회를 바꾸어야 합니다. 이웃을 돌보지 않는 기계인간들의 사회를 우애와 환대가 넘치는, 사람 사이에 정이 오가며 사람 냄새가 나는 사회로 바꾸어야 합니다. 도대체 삶의 목표가 남을 거꾸러뜨리고 돈만 움켜쥐는 것이라면 그게 제정신인 사회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삼풍백화점 5분 전의 한국사회

 

물론 우리는 서구 근대화를 본받아 자본주의 산업사회를 압축해서 훌륭하게(!) 건설했습니다. 그 결과 한국은 이제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자랑하는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한국 자본주의 사회를 정말 살기 좋은 사회라고 말한다면 아마도 그 사람은 미쳤거나 아니면 더불어 함께 사는 공동체정신이 심장에서 아예 녹아내려 버린 극단의 개인주의 환자, 극단의 경제성장 중독자일 것입니다.

 

이런 자본주의 산업문명의 풍요는 전혀 지숙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머지않아 붕괴가 불가피합니다. 그럼에도 다가오는 붕괴의 쓰나미를 우리는 전혀 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준비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월소득 100만원이라면 차상위 빈곤계층으로서 정말로 팍팍하게 살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 100만원은 북한이나 동남아 노동자의 대략 2년치 연소득과 맞먹습니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이런 빈곤계층의 소비생활 수준도 사실은 역대 어느 제왕 부럽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세종대왕님도 여름에 에어컨 나오는 가마를 타시지는 못했을 것이며 겨울에 수박을 마음껏 먹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풍요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값싼 석유와 값싼 천연자원 덕입니다. 우리는 화석연료와 자연자원을 무제한으로 착취해서, 우리의 미래세대가 사용할 자원까지도 미리 꺼내 흥청망청 '노세노세 살아서 노세'를 구가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런 풍요가 지속되려면 아마도 지구가 10개라도 모자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낭비와 착취의 삶을 강요하는 사회를 밑바닥부터 다시 바꾸어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도 나중에 우리는 우리의 손자들한테 할아버지·할머니들은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렇게 살았냐고 뺨따귀를 얻어맞을 지도 모릅니다.

 

'환대의 집' 정당, 불가능하기만 한 몽상일까

 

2007년 대선은 이른바 진보개혁운동의 전면 붕괴를 확인한 선거였습니다. 민주화운동은 죽었습니다. 진보와 개혁을 부르짖던 정당도 죽었습니다.

 

민노당이나 집권여당이나 그동안 도대체 어떤 정당정치 활동을 했는지 되돌아보면 차라리 스스로 해체를 선언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일반 인민들에게 속죄하는 길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말로는 인민들을 섬긴다고 하면서 도대체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 되돌아 보면 참으로 한심한 정도를 넘어서 민망하기조차 합니다.

 

민노당은 사회주의를 주장하면서도 노동자 서민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정당이 권력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모심과 섬김은 없고 국회의원 10석도 권력이라고 권력투쟁, 정파투쟁에 게다가 철지난 주체사상 논쟁이 불거져 나올만큼 참으로 한심한 집단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차라리 민들레 국수집에 가서 먼저 공양 봉사라도 하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거기 오는 노숙자나 굶주리는 사람들을 위해 밥 한끼 나누는 일을 하며 그동안 진보와 개혁을 부르짖던 정당들이 인민들을 위해 실제 어떤 일을 했는지 진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성찰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한국 사회를 뿌리에서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적어도 어떠한 경우에도 굶주리거나 길거리에서 노숙하는 사람들은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민주주의가 밥먹여주냐는 냉소가 아니라 그야말로 민주주의 아니면 밥조차 먹을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진실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회운동, 새로운 정당정치 운동이 필요한 소이가 여기 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숙명처럼 생각하는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사회를 극복하는 새로운 의식혁명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런 미몽과 환상을 깨는 데서부터 다시 새집을 지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당정치도 전혀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새로운 정당은 지역구를 관리하는 지구당이 아니라 민들레 국수집처럼 지역에서 '우애와 환대의 집'부터 만드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민중의 집'이 되었건 '전태일의 집'이 되었건 지역의 어려운 이웃들, 비정규직과 빈곤계층과 노인과 장애인과 소수자를 위한 상담과 도움의 활동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의료생협을 비롯한 각종의 협동조합과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지역공동체 형성의 활동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 길이야말로 우애와 환대의 새로운 공동체 사회를 실현하는 지름길입니다. 아기걸음처럼 걸음마의 첫발은 서툴고 낯설고 때로는 넘어지고 깨지고 실패할 지라도 우리는 그런 낯선 '환대의 집' 정당정치 운동을 벌여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그렇게 말합니다. 현실과 이상은 다르다고 말입니다. 정말 이런 '환대의 집' 정당정치 운동은 한국에서 불가능하고 잠꼬대같은 얘기일까요.


태그:#진보정당운동 추진위, #박승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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