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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 신촌 '아름나라'를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까?

신촌 대학약국 모퉁이를 돌아서면 골목에 자리하고 있던 문화 공간 '아름나라'. 낡은 피아노와 통기타, 꽹가리 장구 북, 나무와 짚으로 짠 탁자와 곳곳에 묻어있던 사람들의 손때 발때, 검고 파란 매직으로 성난 채 쓰여 있는 벽보들, 공간을 휘감아 나가던 낮고 정감 있는 김민기ㆍ정태춘ㆍ안치환ㆍ김광석의 음악들, 음악 사이를 메우던 사람들의 억센 억양들, 때로는 모이고 때로는 흩어지던 목소리들, 노래 소리들.

그렇게 십 년 넘게 신촌 거리를 지켜오던 아름나라는 2001년 문을 닫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아름나라를 찾았던 사람들은 허탈해했고, 방황했다. 하지만, 아름나라의 목조 간판은 신촌이 아닌 경기도 파주 어유지리에 변함없이 걸려 있었고, 7년이 지난 2007년 12월 다시 신촌으로 돌아왔다. 지하 창고를 뜯어고쳐, 흙을 바르고 목조 공사가 한창인 아름나라에서 '형님' 오상환(49)씨를 다시 만났다.

신촌 아름나라 (90년대 초)
 신촌 아름나라 (90년대 초)
ⓒ 오성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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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몇 년 만에 돌아오신 거죠?

"9년 허고도 6개월…그 중에서 2년은 서울과 파주를 오고갔어. 922번 버스 타고 매 차로 갈아타고는 어유지리까지 갔었는데, 추억이 많지."

-다시 돌아오시게 된 계기가 있을 것 같은데요.
"원래 한 6년 정도만 살려고 했는데, 훨씬 넘겨서 9년 반이라는 세월을 지낸 거야. 어유지리 마을에서 막내로 살면서, 주민들과의 관계, 문화를 통한 공동체 활동,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충분히 경험했지. 이제 시효가 끝났다고 해야 하나. (웃음)

오래도록 아름나라가 추구했던, 생활운동 문화예술운동이 많이 사라져가는 것 같아. 다시 더욱 종합적이고 복합적으로 일으켜 세우고 싶었어. 여전히 절실하게 필요한 때라고 생각해서 흙 바르고 망치질하는 것부터 시작한 거지. 민주적인 문화공동체가 성공해야만 정치도 올바로 일어서게 될 거라는 믿음은 아직까지 변함이 없고. 문화를 통해서 사람들 사이의 깨진 신뢰를 회복시키는 것이 문화꾼들의 임무니까."

-다시 서울로 돌아오시니 어떠세요?
"아직 공간이 충분히 알려지지 못했어. 저녁에 사람이 없으니까 심심해 죽겠다. (웃음) 사람들이 많이 그리워. 예전 공간을 가득 채웠던 사람들 열 명 중에 한 명 두 명 밖에 아직 못 만났거든. 그 때 그 사람들 거리에서 싸우고, 아름나라를 왁자지껄하게 채웠던 많은 사람들이 제일 그립지. 돈이 없어서 여기저기 융통하고, 원금이나 이자 이런 게 모두 빚이 되니까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게 사실이고."

-예전 공간 얘기 좀 해주세요. 처음에 어떻게 아름나라를 열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군부독재 시절에 대학생, 농민, 노동자 할 것 없이 거리에 나와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싸움 뿐만 아니라 놀이와 삶 자체가 세상을 바꿔나가는 동력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 인간과 문화를 통해서 하고 싶었지. 그걸 이루기 위한 접근방식이 생활문화운동이었던 거야. 사랑방처럼 가장 인간적이고 소박한 공동체 문화를 이루어 보고 싶어서 만든 거야. 한 11년 동안, 공간 차지하고 문화운동부터 법 개정 운동, 강습, 공연, 소모임까지 만들면서 신촌 주민들한테 사랑 많이 받았지."

-자체적으로 소모임이 운영되었군요.
"땅과 삶, 소도, 공연팀, 작은권리찾기모임, 아름지기모임까지 소모임이 꽤 많았어. 땅과 삶은 민통선 지역으로 이사하면서 만들었는데, 도시 사람들과 임진강 논밭에다 농사 지으면서 자연의 기운을 나누는 모임이었고, 소도는 강습팀인데, 민요·판소리·민중가요까지 통합해서 인왕산 북한산 임진강 줄기 따라가면서 연습도 하고 강습도 하고 그랬지."

-작은권리찾기모임은 98년에 헌법소원 같이 했던 분들이죠? 아름지기모임은요?
"아름나라 운영을 위해서 도와줬던 친구들 모임이야. 많을 때는 스무 명이 넘을 때도 있었는데, 매일같이 오는 친구들도 있고, 이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오는 친구들도 있었지. 이 친구들 덕분에, 공간이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었고."

-처음에 공간의 주를 이뤘던 분들은 어떤 분들이세요?
"기본적으로, 풍물 했던 민요연구회 터울림 봉천놀이마당 소리내력 같은 단체들도 있고, 풍물뿐만 아니라 영화 사진 마당굿까지 여러 가지 문화 매체들을 활용했던 우리마당이라는 곳도 있었고, 한국문화연구소, 여기는 한국 문화를 노동자의 시각에서 해석하려고 했던 친구들. 청소년밥알패처럼 전교조 운동하는 교사 모임도 있었지.

89년 처음에는 폭발적인 반응이었어. 청소년 단체, 대학 동아리, 시민사회단체, 전교조 등등 다양한 패들의 아지트였지 뭐. 오전에는 세미나팀들 들어차고 저녁에는 술도 한잔씩 걸치고 풍물 치고 노래하고. 자리 없어가지고 스무 명 서른 명씩 바깥에서 기다리고 그랬는데. (웃음) 그래. 거리 투쟁 있는 날이면 공간이 텅 비어있다가 저녁에 싸움 끝날 때 즈음 다시 미어터져서 새벽까지 뒷풀이 하고. 참 훈훈했어."

아름나라 대표 오상환씨
 아름나라 대표 오상환씨
ⓒ 오성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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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청소년보호법 때문에 힘든 상황이 생긴 거군요.

"그게 한 97년 정도일 거야. 나이 안 된다고 대학 생활의 특수성은 싹 무시해버리고 형사들이 무작위적으로 단속하는 거지. 선배들과 동아리 형성하고 같은 문화에 속해있는 친구들을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된다고. 대학가 주변에 형사상 범죄자 아닌 범죄자를 무더기로 만든 거야.

처음에는 맞불 작전이라고 시민들 서명도 받고 신촌 상가에서 뒷거래하는 형사들 고발조치 한다고 으름장도 놓고 했지. 근데, 5번 걸쳐서 벌금이 2,200만 원인가 나오는데,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 신촌 주변 5개 대학 총학생회, 법대 친구들, 시민단체 활동가들 같이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다가 작은권리찾기모임을 만든 거지."

-작은권리찾기모임에 대해서 좀더 얘기해주세요.
"법정 싸움 준비한 거야. 한 12개 단체 정도 됐나. 여튼, 현실하고 맞지 않는 법이 주민들과 학생들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것을 골간으로 해서 민사, 행정, 헌법소원까지 모두 4건의 소송을 제기한 거지. 사람들이 도움을 많이 줬어. 각기 소속되어 있는 단체나 직장에서 서명도 받아주고 문건 만들어 언론에 배포하고 자료집도 내고.

나중에 법정소송 자료로 기맥히게 쓰였지. 여론 형성이 잘 되서, 국민 경향 한겨레 동아 한국 여성저널 시사저널 노동신문 노동일보 대학 신문까지 다 호응해주고, <화제집중> <시사매거진 2580> MBC, SBS 메인뉴스에도 다루어지면서 승기를 잡은 거야. 헌법소원은 기각됐지만, 이후에 청소년보호위원회 공청회 거치면서 00년 법 개정까지 이른 거지."

-법 개정 싸움도 이기신 셈인데, 공간을 왜 닫으신 거에요?
"공간을 없애지 않으려고 했지. 70~80년대 문화운동의 보고로, 문화공동체로 자리잡을 것이라 생각했었고, 실제 거리 싸움도 잘 했는데. 청소년보호법에 뒤통수를 맞은 거야. 기본적으로 서울에 대한 염증에다가 원래 귀농에 대한 꿈도 있었고, 법정싸움하면서 힘도 소진되어 버린 거지. 그래서, 부러 고향도 아니고 친척도 없는 파주 민통선을 선택한 게야." 

-귀농은 어떻게 결심하시게 된 거에요?
"문민 정부, 국민의 정부 겪으면서 실제 사람들의 삶의 질은 조금도 개선되지 않고, 정치에 대한 회의, 사회에 대한 답답함이 많았어. 그렇게 믿었던 80년대 운동 주도했던 지도부들이 정계에 진출해서 국민들에게 신뢰도 잃어버리고. 좌절이 심했지.

예전부터 사람들이 나이 들면서 잘 못살고 행복해지지 못하는 것이 근원적으로는 국토의 허리가 잘려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었기 때문에, 분단 지역 주민들의 삶과 자연, 그곳에 상주하는 군인들 문화를 직접 겪으면서 시대적인 울분을 담아보려고 했던 거야.

그곳에서 농사 지어가며 지역주민들하고 두레풍물도 치고 풍물패를 한 300명까지 꾸려서 비무장지대에서 떼로 풍물 한 번 거나하게 치면 오히려 그런 감성적인 신명이 세상을 더 밝혀주지는 않을까 했지. (웃음)

물론, 기본적으로 도시를 받쳐주고 있는 농촌과 땅에 대한 믿음, 땅에 씨앗을 뿌려서 봄 여름 가을로 가꾸고 추수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아까 처음에 계획했던 6년보다 훨씬 더 오래 머무셨다고 하셨는데, 민통선 지역 마을에서 아주 좋으셨나봐요.
"왜 힘든 것도 있었지. 정서적으로 안 좋은 파편도 많이 맞았는데, 치유도 좀 필요하고. 지금은 서해안 섬 자월도에다가 살림도구 옮겨놓은 상태야."

-식자재도 매번 파주에서 가져오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먹거리 문화에 대한 욕심도 많거든. 욕심도 욕심이지만, 이제 화학 조미료나 세제는 몸에서 받아들이지 않아서. 민통선에서 10년간 살면서 막걸리 엄청 먹었는데, 양주 파주 포천 연천 통틀어 가장 깨끗하고 좋은 막걸리야. 당연히 방부제 안 치고 골짜기 물 길어다 담근 막걸리지.

물도 연천 궁글산에서 제사 지낼 때 쓰는 약수물 길어다 쓰고. 두부도 이웃들이 만든 손두부 떼어다가 쓰고, 고기는 이장댁. (웃음) 그 고기가 산에 방목해서 기르는 돼지라 아주 괜찮거든. 달걀도 마찬가지고. 양식하고는 많이 달라. 야채가 좀 문제…"

- 나라님글은 계속 손 안댔는데 먹는 부분은 예민하니 한마디 남깁니다. 야채가 문제라는 말이 좀…정말 야채가 문제있는 줄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냥 '야채는 여유가 되면직접 대려고'로 하시는게…
"… 여유가 되면 저기 인왕산 밑에 한 200평 정도만 땅 일궈서 직접 대려고. 소모임 친구들하고 같이 하면, 꽤 괜찮을 거야."

- 마지막으로, 앞으로 아름나라 운영계획 좀 말씀해주세요.
"전통민요, 판소리, 고전가요, 마당극의 건강한 부분은 이어받고 현대문화에서 재즈, 락, 제3세계 민속음악부터 영상, 문학 등 형식에 관계 없이 다양한 민중문화, 대중문화를 아우르고 싶어. 수수하게 가족처럼 어울리지만, 그 속에서 모두가 감동받을 수 있는…. 문화는 흩어진 사람들을 다시 모이게 할 수 있거든.

아직 공간을 홍보할 만큼 구심점이나 시스템이 형성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문제인데. 일단, 힘닿는 대로 꼼꼼하게 준비해서 다양한 매체들을 이용해 이곳에서 공부하고 나눌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어야지.

다양한 악기들을 마련해놓고 하나의 주제로 시나위 합주가 가능할 정도로 시설을 마련하고 싶어. 풍물은 난장으로 하니까 특별히 차릴 것이 없지만, 노래하는 친구들이나 영상 하는 친구들은 앰프나 마이크, 스피커, 조명 이런 것들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아직 부족해서 좀 신경이 쓰이지.

영상도 빔 프로젝트를 통해서, 지역이나 현장의 소모임들이 의미 있는 상영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고. 굳이 구분하지 않고 여러 매체들이 결합해서 종합적인 문화로 발전할 수 있으면 가장 좋지. 영상과 음악과 문학이 모일 수 있는 문화의 밤 같은 모임도 만들고 싶고. 지금은 문화꾼들의 노력과 투자가 절실해."

신촌 아름나라 (2008.02)
 신촌 아름나라 (2008.02)
ⓒ 오성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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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 신촌 현대백화점 뒤 먹자골목에 새로 자리를 마련한 ‘아름나라’는 현재, 오후 시간에는 단체 학회 동아리 등의 모임 장소로, 저녁 시간에는 노래패ㆍ풍물패를 비롯한 시민들의 주점으로 운영되고 있다.

한 쪽 벽면을 가득 메운 전통음악, 고전가요, 민중가요 음반과 고성능 앰프를 비롯한 음향시설을 갖추고 있고, 통기타와 전통 풍물악기들도 비치해 놓았다. 공간 운영자인 오상환 씨에 따르면, 내달 중에 빔 프로젝트를 비롯한 영상시설도 설치할 계획이다.

식사와 차, 술, 안주류도 함께 판매하고 있으며, 이에 사용되는 식자재들은 모두 오씨가 귀농하여 살았던 경기도 파주와 인천 자월도에서 유기농으로 재배한 것 만을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단체모임 예약이나 공간 이용 문의는 전화(☎ 02-335-0272)나 방문을 통해 가능하며, 현재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카페 ‘아름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http://cafe.naver.com/areumnara)’을 운영중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온 금요일 저녁의 신촌 먹자골목은 사람들의 발걸음과 다채로운 업소 홍보물, 호객 행위로 분주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변화의 바람에 흔들리는 신촌 한복판에서 아름나라가 다시금 싹틔우려는 생활문화 운동이 어떻게 뻗어나갈지 기대해본다.


태그:#아름나라, #민중가요, #풍물, #청소년보호법, #신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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